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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61화 (61/100)

61화

집무실에 남은 발레리안은 아리엘이 나가자마자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아리엘이 방문하기 전의 일에 대한 연장선이었다.

어디서 한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두 부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막으셨습니까? 진짜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작은 레인 페드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공작의 축객령에 레인 페드로의 푸르죽죽했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일은 면하게 되었다.

레인 페드로는 만세! 소리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으며 재빨리 집무실을 나갔다.

발레리안의 질문에 루드비히 공작은 찌푸린 미간을 매만지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공작은 발레리안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진짜 이유.”

발레리안은 제 아버지의 반응에 확신했다.

‘분명히 뭐가 있는 게 틀림없다.’

제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사실을 말하는 것을 망설인 적은 없었다.

그는 대답을 재촉했다.

“저에게 말해 주십시오.”

어쩌면 이브가 내내 저에게 숨기던 무언가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발레리안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급해졌다.

어서 대답을 듣고 이 답답한 마음을 해결하고 싶었다.

무언가 큰 비밀이 그녀에게 숨겨진 것 같았다.

공작은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진실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예.”

일순 멈칫한 발레리안의 모습을 공작의 시선이 서늘히 스치고 지나갔다.

“진실을 듣고 후회할 자신도-.”

“없습니다.”

제 아들의 한 치 망설임 없는 대답에 공작은 야트막한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이브 에스텔라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발레리안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면, 다른 종족이라는 뜻이었다.

이종족.

현재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은 침투한 악마들이 파괴를 일삼아 인간계를 떠나거나 멸종한 상태였다.

또한, 마법사는 100년 전에 멸족되었다.

그러면 남은 종족은 마물, 그리고…… 악마뿐이었다.

그중에 인간의 탈을 쓸 수 있는 건 악마가 유일했다.

“설마…….”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근거가 있습니까?”

발레리안은 단박에 의심이 짙은 시선으로 제 아버지를 보았다. 공작은 예상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황제의 탄신연에서 너도 모르게 엘라의 힘을 방출한 적이 있었지.”

발레리안은 그때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사실 당시의 상황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브가 자비에를 붙잡고 키스하는 모습을 보던 순간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비에를 잡아서 죽이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러나 그 상황을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보고 있던 루드비히 공작은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모두의 기운이 흐트러진 상태였는데, 딱 한 사람, 변화가 없던 자가 있었다.”

“……그게 이브였단 말입니까?”

발레리안의 입술이 떨렸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브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브가 마물의 숲에 납치당했었을 당시.

발레리안은 그 참혹한 현장을 보고 그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버젓이 그의 앞에 저물지 않은 태양처럼 존재했다.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야. 이걸 이용해서 가까스로 악마에게서 도망쳤어.”

다시금 떠올리면 아티팩트 하나로 상급 악마에게서 달아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에 정신이 팔려 더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보통 사람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기에 운 좋게 달아난 것이리라.

그리 자신을 설득하고 애써 넘겼다.

그러나 며칠 전, 가면무도회에서 악마에게서 느낀 낯선 마력.

그리고 발레리안은 그런 마력을 느낀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바로 마물의 숲이었다.

갑자기 악마가 제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상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의적인 게 아닌 타의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짐작 가는 데가 있나 보군.”

발레리안의 눈빛을 읽은 공작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엘라의 힘에 동요치 않는 이브의 모습에 루드비히 공작은 하나의 사실을 떠올렸다.

이 땅에 마법사의 후예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루드비히 가문만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었다.

‘마법사의 후예가 남아 있을 줄은.’

그 가정은 성인식을 치른 이브 에스텔라가 급히 나딘 마을로 향한 것으로 더 확실해졌다.

하지만 루드비히 공작은 그녀를 신성 재판대에 올리지 않았다.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그녀를 그가 나서서 벌을 내린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았던 탓이다.

‘성인식 때 정체를 깨달은 모양이지.’

그 정체를 들킬까 봐, 파혼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브 에스텔라를 보면……. 분명히 그의 부인이었던 멜린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말했을 터였다.

이브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모습을 보아 왔던 루드비히 공작도 제 손으로 그녀를 처단한다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한편 꼿꼿한 나무처럼 굳어 있던 발레리안은 황급히 집무실을 나섰다.

정원으로 나온 발레리안은 바로 마구간으로 향했다.

전쟁 시에 쓰는 군마에 올라탄 발레리안은 빠르게 마물의 숲으로 향했다.

* * *

어젯밤. 황태자가 이브에게 아론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딘 마을에서 아론의 행방은 찾지 못했지만, 산에서 이십 대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백골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주위에 있던 옷들은 아론의 것이라고 로만 부부가 증언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이브는 시종일관 가라앉은 얼굴을 했다.

‘……아론.’

비록 알고 지낸 게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순박한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허무하게 죽었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내가 나딘 마을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더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 뒤로,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운 이브는 백작저 서재에 앉아 있었다.

물론 평범한 서재가 아닌, 숨겨 놓은 비밀 공간에 있는 서재였다.

그녀는 다 읽은 마법서를 꽂아 넣고, 새로운 마법서를 든 채 자리에 앉았다.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힘을 키우는 수밖에.’

평소 마법서를 읽으면 곧잘 금방 집중을 했는데, 지금은 집중이 완전히 흐트러져 돌아오지 않았다.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론이 죽었다니.’

아직도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쉽게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브는 계속 마법서를 붙잡고 늘어졌다. 뭐라도 습득해서 저와 가족들을 보호할 힘을 갖추고 싶었다.

그러나 곧 하녀 로즈가 전해 온 소식에 이브는 마법서를 덮을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안이 날 찾아왔다고?”

이 밤중에 갑자기 왜 찾아온 거지?

시간을 보니 웬만한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본래 발레리안은 그녀의 집에 방문할 때 늘 연통을 보냈었는데…….

‘최근 들어서 연통을 보낸 적이 없었지.’

늘 갑작스러운 방문의 기억만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브는 발레리안이 이곳에 올 만한 이유가 있는지 예상해 보려다가 생각을 포기했다.

‘그래 봤자 이유리에 관한 일이겠지.’

이번 일의 여파로 유리는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소문이 좋지 않게 퍼졌다.

아마 곁에 있던 발레리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을 터.

이곳에 온 이유도 그녀가 나서서 소문을 잠재워 달라고 부탁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 생각하니 괜히 심사가 꼬였다.

‘왜 그걸 나한테 부탁한담.’

당사자인 유리도 아니고, 그녀의 호위 기사인 발레리안 루드비히가 이런 일에 나서고 말이야.

“정말이지, 충직한 기사 납셨어.”

“뭐?”

복도를 걷던 이브는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했다. 어느새 제 옆에 발레리안이 다가와 있었다.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까부터.”

“인기척이라도 내 주면 좀 좋아…….”

이브는 괜히 민망하여 구시렁거렸다.

‘혹시 내가 중얼거린 말을 듣진 못했겠지.’

충직한 기사. 단어 뜻만 보자면 문제 삼을 것이 없었지만, 누가 봐도 팍팍 비꼬는 말투라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 법했다.

‘드, 들었나 보네.’

발레리안의 표정이 완전히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가 이렇게 딱딱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볼 때마다 낯설고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무슨 일 있어……?”

이브는 뻔뻔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발레리안은 대답 없이 한참이나 보았다.

‘그러고 보니…… 혈색이 안 좋네.’

잠이라도 설쳤는지 눈 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짙게 내려와 있었다.

문제라면 그에게 그 모습조차 지독히도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입을 다문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늘 햇살만 비출 것 같은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니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흘렀다.

‘어차피 유리와 관련해서 온 거겠지.’

그러나 곧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일전에 그가 도와준 일로 잠시나마 그가 저에게 마음이 남아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발레리안은 엘라로서 할 일을 한 건데.’

혼자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참다못한 이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용건부터 말해 줘.”

응접실까지 데리고 갈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유리에 관한 용건이라면 빠르게 거절하고 돌려보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

그녀의 말에 발레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로 향했다.

진득한 감정을 담은 듯한 시선에 이브는 일순 움찔했다. 무언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자조적인 미소였다. 이브는 그에게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대화가 길어져?”

“조금.”

“아무래도 응접실에 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네.”

그의 긍정에 이브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의 말대로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의 얼굴은 더욱 어둡게 가라앉기만 했다.

‘사형 집행을 당하러 가는 사형수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지금 발레리안을 감싼 분위기는 태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한 밤, 음산한 폭풍 전야 같았다.

그의 상태를 곁눈질로 확인하고 있던 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응접실에 들어가자, 로즈가 익숙한 태도로 잔에 차를 채운 뒤 나갔다.

“무슨 일이야? 할 말이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줘.”

이브가 입을 열었다. 왠지 태평히 차를 마시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와 그녀 사이에 적지 않은 일이 벌어졌지만, 이토록 그가 저기압이었던 적은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이브는 저도 모르게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발레리안을 쳐다보았다.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브.”

“으, 응.”

“제발 솔직하게 말해 줘.”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이브는 그 반응이 당혹스러워 얼굴을 굳혔다.

그가 천천히 다시 입술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목울대가 떨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넌, 인간이 맞아?”

이브의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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