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여름제 마지막을 장식할 피날레의 가면무도회는 잠정적으로 연기되었다.
갑작스러운 악마의 출몰 사건이 제도에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이다.
심지어 그저 그런 악마도 아닌, 상급 악마가 중앙에 섞여 들었다는 소식은 제도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브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위기는 잘 넘겨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 사교계엔 성녀가 거짓말쟁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심지어 일각에선 악마를 구분하지 못하는 성녀가 진짜 성녀는 맞냐는 여론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브는 그 뒤로 유리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악마의 끄나풀로 몰았던 건 절대 우습게 볼 일이 아니야.’
자칫하면 생사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아는 유리가 그런 소문이 나도록 동조했다는 건 이미 모든 게 끝이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초대장은?”
이브는 집사장에게 물었다. 그는 수북하게 쌓인 초대장을 차례대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가면무도회가 무기한 연기되자, 여름제의 열기를 더 느끼고 싶은 귀족들이 너도나도 파티를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많은 파티 초대장이 백작가에 쏟아졌다.
그 사건의 주인공인 그녀를 부르고자 하는 건 당연했다.
그녀가 참여한 파티는 주목을 받을 테니까.
제 파티가 주목을 받을수록 귀족들은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커진다고 믿었다.
“아스트리 자작, 루이제 백작…… 그리고 카트린 후작 가문에서 각각 연회 초대장을 보내오셨습니다.”
“잠깐. 카트린 후작 가문이 좋겠어.”
이브는 별로 사람과 어울려 파티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카트린 후작 가문의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가 담긴 편지를 빠르게 작성하여 집사장에게 넘겼다.
“카트린 후작 가문에 보내 줘.”
“알겠습니다.”
보통 파티에 참가할 때,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참석한다는 회신은 보내지 않는다.
이브도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편지를 보냈다.
‘왜냐하면 내가 참석한다는 걸 알아야 그 파티가 더 주목을 받을 테니까.’
이번엔 사람이 많고, 특히 제도에 영향력을 많이 떨치는 사람이 많이 참가할수록 좋았다.
* * *
다음 날.
루드비히 공작 성의 집무실, 그곳에 발레리안이 급히 발걸음을 했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틀 전 이브가 이곳에 왔지만, 아버지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막 들었다.
이 소식마저도 철저히 함구했기에 이틀 뒤에나 그의 귀에 들어온 것이리라.
발레리안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루드비히 공작이 여상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끝난 인연이다. 끝난 인연을 붙잡고 있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지.”
“그렇다면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일도 다 부질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의 말이 발화점이 된 듯 루드비히 공작의 푸른 눈동자에 차가운 불꽃이 파팍, 피어올랐다.
“지금 네 어머니를 모욕하는 것이냐.”
“전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렸을 뿐입니다.”
발레리안이 차갑게 읊조렸다. 의도치 않게 그 사이에 끼어 버린 공작의 보좌관 레인 페드로는 난감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소공작님마저 이럴 줄은……!’
얼음 인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공작님이 이러는 건 새삼스럽지 않았건만, 공작저의 햇살이라 불리는 소공작님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소공작님만큼은 마님을 닮아서 따스한 분일 거라 굳게 믿었는데…….
‘피는 못 속인다.’
그 격언을 눈앞에서 확인한 기분이었다. 레인 페드로는 낭패가 짙은 얼굴로 굳어 있었다.
“그럼 차라리 제삼자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군요.”
“나도 마침 그리 생각하던 바다.”
두 부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들었을 때, 레인 페드로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누구의 잘못이지?”
공작이 물었다. 그러자 레인 페드로는 자신을 보호하듯 양팔을 교차해 제 몸을 가렸다.
“무, 묵비권 행사하겠습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묵비권이라니, 재밌는 농담입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은 집어치우지.”
두 부자의 서슬 퍼런 푸른 눈동자가 레인 페드로를 불살라 버릴 듯 바라보았다.
“……!”
식은땀이 흥건해진 레인 페드로는 땀조차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석고처럼 굳어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구세주처럼 누군가 집무실을 노크했다.
“들어와라.”
공작의 허락에 노크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발견한 공작은 눈썹을 까닥했다.
“대주교 아리엘, 오랜만에 보는군.”
그녀의 방문을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발레리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왜 여기에 대주교 아리엘이 온단 말인가?
“후후, 오랜만이에요. 공작 각하. 어머, 발레리안도 마침 여기 있었구나.”
아리엘이 웃으며 발레리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상급 악마를 단칼에 죽였다고 들었단다. 정말이지, 아주 훌륭해.”
“대주교, 여기는 성국이 아니다.”
루드비히 공작이 냉담하게 일갈했다. 성국을 벗어난 지금은 대주교와 기사가 아닌, 대주교와 소공작의 관계라는 점을 꼬집었다.
더 나아가 위에서 아랫사람을 평가하는 말을 내뱉은 아리엘의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를 건네는 입가가 작게 파들거리며 떨렸지만, 그녀는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여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흘긋 발레리안을 보았다.
이때쯤이면 부드럽게 웃으며 괜찮다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발레리안에게서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그 또한 공작과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서늘히 아리엘을 보고 있었다.
그러곤 시선을 마주치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조심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그래…….”
아리엘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당혹스러웠다. 평소의 발레리안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설마.’
유리가 벌인 일에 성국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성녀와 악마 사이에 있던 일은 성국에도 빠르게 도달했다.
아리엘은 일이 심상치 않게 굴러가는 걸 깨닫고 한달음에 제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성녀를 만나 물었다.
“정말 성녀님이 그 소문에 일조한 건 없으신 게 사실이지요?”
당연히 그녀는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정말 없어요!”
“저에게만큼은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태를 수습할 방향을 찾을 수 있답니다.”
“사, 사실…….”
아리엘의 추궁에 결국 성녀는 실토했다.
“이브 에스텔라 옆에 있으면 머리가 아프다, 조금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는 식으로 말을 흘린 적은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동조했다는 증거가 되기엔 부족하지 않나요?”
아리엘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욕을 뱉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정말 앞뒤 가리지 않는 멍청한 계집이었다.
그러나 성녀는 제가 무척 억울한 듯 씩씩거렸다.
아리엘은 일순 실망감을 숨길 수 없었다.
‘괜히 제도에 성녀를 보냈어.’
성국과 황실 간 결속의 증표로 제도에 성녀를 보냈는데, 이렇게 성녀가 경솔히 행동할 줄은 몰랐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꼴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 발레리안의 반응은 이상한데.’
발레리안을 보는 아리엘의 시선이 의아함을 띠었다.
단지 성녀와 이브 에스텔라. 그녀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를 배신한 전 약혼녀가 악마의 끄나풀로 오해받는 게 무슨 대수라고.
아리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빠르게 하나의 사실을 도출해 냈다.
‘발레리안이 아직 이브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게로구나!’
그렇다면 그가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것이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아리엘은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펴는 데 집중했다.
엘라가 성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다니!
이제 와 그래선 곤란했다.
“그래서 여기에 방문한 이유는 뭐지?”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리엘은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세간에 도는 성녀님에 대한 소문이 너무 와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국을 대표하여 루드비히 가문에 도움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도움?”
공작은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까닥였다.
“루드비히 가문이라면 충분히 이 소문을 불식시킬 수…….”
“한 가지 묻지.”
“네?”
아리엘의 의문 어린 시선 속에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사자한테 사과는 하고 오는 건가?”
“당사자라면…… 이브 에스텔라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걸 몰라서 묻는 거라면 이 이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시간 낭비군.”
가차 없는 축객령과 함께 공작의 시선이 발레리안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발레리안이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이만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대주교님.”
“……발레리안!”
아리엘은 믿었던 사람이 이럴 줄 몰랐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미동도 없었다.
별수 없이 아리엘은 빈손으로 집무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되었어요?”
복도를 서성거리며 아리엘을 기다리고 있던 유리가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하아……. 성녀님.”
아리엘은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이브 에스텔라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유리는 펄쩍 뛰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사과한단 말인가!
전혀 반성하지 않는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아리엘이 입술을 열었다.
“아무리 에스텔라 영애가 미워도 악마의 끄나풀로 몰면 안 된답니다. 성녀님의 평판에 자칫 큰 흠이 될 수도 있었어요.”
“알겠어요…….”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끝내 입술을 오물거리던 유리는 억울한 듯 눈매를 휘었다.
그래도 그렇지, 악마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고 이런 식으로 야단을 맞아야 한다니.
억울함이 불쑥 치밀었다.
‘이브 에스텔라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만약 그녀의 정체를 알았다면 자신을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양치기 소년처럼 호도하진 못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