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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59화 (59/100)

59화

“이게…… 무슨.”

백작은 당황한 얼굴로 제 옷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내려다보았다. 마력을 감지했는지 그는 곧바로 이브를 보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이브는 난감한 척 말했다.

“어머, 어쩐담. 점점 옷이 젖고 있네요.”

이브가 손수건을 들고 패트릭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시선이 점차 패트릭 백작과 이브에게 모여들었다. 젖은 옷을 내려다본 이브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잡았다!’

역시나 아론이 눈에 보이지 않던 이유가, 다른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서 그런 것이었나.

‘이럴 줄 알았어.’

악마라면 그녀와 발레리안이 사라진 틈을 놓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악마가 성녀와 마법사의 관계가 틀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비운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필시 주위에 있을 거라 예상했다.

애초에 이브의 목적은 소문의 범인을 찾아내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범인을 찾아낸다고 해도 날 매장하려는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벌일 거야.’

한번 악마의 끄나풀, 마녀 따위로 몰리면 그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싹을 자르는 편이 나았다.

‘그러면 진짜 아론은 어디 있는 거지?’

이브는 제 가정이 현실이라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니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걸 내색할 틈은 없었다. 이브는 어머, 탄성을 흘리며 패트릭 백작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괜찮으세요?”

“…….”

패트릭 백작으로 변신한 악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당했다는 얼굴로 입술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시선을 의식한 패트릭 백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잠시 에스텔라 영애에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브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달렸다. 뻔히 술수가 보인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백작님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이브의 대답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악마는 속에서 들끓는 이상한 기운에 당황했다. 그러자 곧 그의 얼굴이 거멓게 변하며 흉측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머……! 백작님, 얼굴이 왜 이러시는 거죠?”

이브는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발레리안은 재빠르게 이브의 곁에 다가와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이브는 발레리안이 유리보다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자 당황했다. 이어 비명이 곳곳에서 터졌다.

“꺄아아악!”

“악마다!”

“패, 패트릭 백작이 악마였어!”

장내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악마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당황하다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이브를 노려보았다.

이브는 그에게 있는 수분에 순수한 마력을 담아서 자신의 마력을 억지로 밖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설마, 네년이!’

슬쩍 미소를 짓고 있던 이브는 주위 귀족들처럼 잔뜩 놀란 듯 연기했다. 그녀는 유리 쪽을 흘긋 보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유리는 잔뜩 당황한 채 이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악마의 본질적인 모습은 과연 책에 묘사된 대로 흉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악마 구시온은 진퇴양난에 처하자 새카만 이빨을 드러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악마 구시온의 빨간 눈동자가 섬뜩하게 장내를 훑었다. 살생욕이라도 채우고 떠날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건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거기까지다.”

발검한 성검 아치볼드가 성스러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발레리안은 악마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성검은 당장이라도 악마의 목을 베어 버릴 듯 첨예한 빛으로 번쩍였다.

“크으…….”

구시온은 침이 끓는 소리를 내며 분노했다. 그 순간 이브가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당황한 발레리안이 그녀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이브, 멈춰!”

이브는 발레리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악마를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악마의 등장으로 인해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졌을 때가 기회였다. 이브는 입 모양으로 구시온에게 말했다.

‘살고 싶으면 유리에게 매달려.’

그녀의 입 모양을 읽은 구시온의 시선이 흔들렸다.

본디 악마는 욕망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장 큰 욕망은 생존, 불사에 대한 갈망이었다.

악마들이 인간계에 와서 인간들을 죽이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 있었다.

수명을 늘리는 가장 좋은 수단은 다른 종족들의 영혼과 피를 갈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등에 빠진 악마가 끄떡도 하지 않고 버티자, 이브가 발레리안의 몸을 붙잡았다.

“……악마를 빨리 죽여 줄 수 있을까?”

그녀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말하자, 발레리안이 그녀를 잠시 보다가 구시온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단 한 발짝에 불과했지만, 보폭이 넓어서 훌쩍 가까워졌다.

본능적으로 힘의 차이를 느낀 구시온은 빠르게 마력을 끌어 올려 모습을 바꾸었다. 아론이었다.

그는 곧장 유리를 향해 소리쳤다.

“유리, 제발 나 좀 살려 줘!”

‘옳거니!’

이브는 쾌재를 불렀다. 아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악마의 모습에 유리가 더욱 당황했다.

“아, 아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단지 유리, 널 위해서 한 짓밖에…….”

지금 잡을 동아줄이 유리밖에 없다는 걸 악마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이브는 제 생각대로 상황이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러면 그 소문을 퍼트린 것도 이 악마의 짓인 게 확실해.’

악마다운 위선이 여기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브는 자꾸 가슴에 찬 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그 산에 발레리안을 찾겠다고 갔을 때 바뀌었구나.’

아론이 실종된 지 한 달 넘게 흘렀다는 얘기였다. 진짜 아론의 생사 확률이 많이 희미해진 상태라는 뜻이다.

‘악마라는 종족이 이다지도 잔인한 존재였다니.’

그걸 두 눈으로 처음 확인하게 되자, 이브의 손이 절로 떨렸다. 그녀의 떨림을 무엇으로 해석했는지 발레리안의 눈빛에 어린 살기가 더 짙어졌다.

“아, 아론…….”

유리는 제 앞에 벌어진 상황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는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브는 그런 유리를 보고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은 악마를 모른 척하는 게 능사일 텐데.’

이브에겐 잘된 일이었지만 막연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유리에게 매달리던 악마는 생각을 바꾸었는지 공격을 시도했다. 하나 얼마 가지 않아 악마는 발레리안의 성검에 의해 목숨이 끊어졌다.

* * *

여름제의 가면무도회를 주최했던 글렌 공작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황제는 이 안에 악마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며 전수조사를 명했다.

이브는 루드비히 공작 성으로 향했다. 중요한 용건으로 발레리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공작 성의 문은 굳게 닫힌 채 그녀에게 열리지 않았다.

“……공작님이구나.”

이브는 이 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가, 발레리안이 아니라 루드비히 공작의 명 때문이란 것을 눈치챘다.

이로써 공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했다.

루드비히 공작 가문과 에스텔라 백작 가문의 교류는 일절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간 세월을 떠올리니 조금 씁쓸했지만, 공작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부모가 제 자식을 배신한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고 싶을까.

깔끔하게 포기한 이브는 다시 마찻길에 올랐다.

자비에는 또 연통도 없이 방문한 무례한 손님을 향해 헛웃음을 흘렸다.

“안색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군요.”

“전하는 안색도 안 좋으시네요, 일이 많으신가 봐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자비에는 우아한 몸짓으로 다리를 꼬며 진지한 눈빛을 했다.

“영애에게 그런 소문을 퍼트린 수뇌가 패트릭 백작이었습니다.”

“……굉장히 정보가 빠르시네요.”

이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얼거렸다.

“제도 내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조사를 하는 건 당연합니다.”

사실 자비에는 며칠 전, 사촌 누이 오필리아 글렌에게서 에스텔라 영애에 관한 소문을 듣고 처음 알았다.

그 소문을 들은 뒤로는 은근히 신경이 쓰여, 결국 자비에는 오필리아를 궁으로 불렀다.

“패트릭 백작이 벌인 일이에요.”

사교계의 중추답게 오필리아 글렌은 금방 그 주동자를 파악했다.

그러나 자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고, 공적인 일을 처리했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는 몰랐다.

오필리아가 그를 보던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 더욱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바보를 보듯이 했지.’

원래 도도한 오필리아 글렌의 성격상 남을 깔보는 경우는 허다했지만, 자비에를 그런 노골적인 시선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한 가지, 더 도움을 요청해도 될까요?”

“뭡니까?”

“아론 로만이라고, 나딘 마을에서 태어난 남자가 있어요.”

“아, 이번에 영애와 함께 제도로 올라온 사람을 말하는 겁니까?”

“네.”

역시 황실 사람답게 모르는 게 없구나. 이브는 작게 감탄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굳혔다.

“악마가 아론으로 변신해서 제도로 올라왔어요.”

“그럼 그 악마가 나딘 마을에서부터 제도까지 따라왔다는 말입니까?”

“맞아요. 그래서 저는 그 아론의 행방을 찾고 싶어요.”

“……하.”

자비에는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흘리더니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진짜 패트릭 백작도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면 더 희박하겠네요.”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악마라는 존재는 잔인하고 끔찍한 족속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분노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자비에는 잠시 제 생각을 바꾸었다.

사실 오필리아 글렌에게서 소문을 들었을 당시, 자비에도 잠시 의심했었다.

‘이브 에스텔라가 악마의 끄나풀.’

발레리안에게서 도망치듯 파혼을 감행한 이유가 이게 더 명확했던 탓이다. 엘라를 누구보다 두려워할 사람은 악마거나 악마와 관련된 무언가였다.

그래서 잠시 그 소문을 잠재우지 않고 묵과하고 방조했다. 이브 에스텔라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에스텔라 영애의 행동은 악마의 끄나풀이라고 하기엔 사리에 맞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비에와 마주하는 걸 꺼릴 그녀가 구태여 입궁한 이유가 ‘아론 로만’의 행방 때문이라니.

그는 그녀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이유를 당연히 하나로 예상했다.

그런 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엄벌해 달라고.

하지만 이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악마에게 희생당한 아론 로만의 행방을 찾아 달라고 요청할 뿐.

아론 로만의 친구였다던 성녀 이유리조차도 요청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력을 다해 찾아보겠습니다. 제국민의 안전을 위한 일이니.”

“감사해요.”

이브의 미소에 자비에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하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잡은 잔 안의 찻물이 작은 파동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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