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브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발레리안이 먼저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건넨 말을 한참 곱씹던 이브는 잠시 입을 달싹이다 물었다.
“도움을 요청하라고?”
“응.”
이브는 그의 의도가 무언지 가늠하기 위해 눈을 마주했다. 그러나 가면에 가려진 그의 눈은 무얼 담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 발레리안. 유리 곁에서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어?”
“…….”
발레리안은 그녀의 대답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를 파악하지 못해서 망설이는 것이다.
이브는 차분한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바라보았다.
“크게 의미를 둘 필요 없는 질문이야. 내 부탁을 들어줬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발레리안은 그 말에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러나 곧 그의 입이 열렸다.
“그래,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어.”
그는 대답했다. 이브는 그의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 본래 그 대답이 나온다면 하려던 말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에게서 그런 답을 얻으니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이 밀랍을 발라 놓은 것처럼 빳빳하게 굳어졌다.
잠시 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유리에게서 별다른 일은 없었고?”
“……어떤 일?”
발레리안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연회에서, 유리에게 따로 접근하던 사람은 없었냐고 물은 거야.”
“……공개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비밀리에 접근했던 사람은 없었어.”
그걸 왜 묻느냐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론이 귀족으로 위장한 걸까?’
이브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유리가 연회에 있는 동안, 아론은 뭐 하고 있었는지 알아?”
그가 멈칫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이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유리가 연회에 참석하면 발레리안도 유리 옆에 있는데, 아론의 행보를 어떻게 알겠어.’
따로 아론에게 감시를 붙이지 않는 이상, 발레리안이 아론의 행적을 아는 것도 이상했다.
“……개인 숙소에서 내내 나오지 않았어.”
발레리안이 말했다. 이브는 당황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감시를 붙였거든.”
그게 진짜였다니. 이브는 어안이 벙벙해 말을 잇지 못했다. 제 입장에선 환영해 마지않을 일이건만, 그가 아론에게 감시를 붙였다는 것에 놀라움이 앞섰다.
“대체 왜?”
“기본적으로 루드비히 공작 성에 들어온 외부인에게는 일정 기간 감시를 붙여.”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발레리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을 입에 담았다. 이브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아론이 방에만 있었다는 거지?”
“응.”
그리 대답하는 발레리안의 푸른 눈에 의심의 빛이 어렸다.
이 순간에 갑자기 아론의 행적을 묻는 이브의 모습이 이상했던 탓이다.
“혹시 아론 로만이 그 소문이랑 관련 있어?”
정곡을 찌르는 발레리안의 말에 이브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는 그 반응을 보고 바로 답을 얻었다.
“그렇단 말이지.”
발레리안의 눈빛에 살심이 어렸다.
안 그래도 이브에 관해 나쁜 기사를 싣는 제국신문사에 ‘계속 그따위 기사를 내보내면 신문사를 박살 내 버리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브에 관해선 좋은 내용만 신문에 넣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여태까지 훼손된 이브의 이미지를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신문사 사장을 신성 재판에 회부시키겠다는 경고와 함께.
그랬더니 이번엔 이브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이브 에스텔라가 악마의 끄나풀이라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이 시사하는 확실한 사실은 하나였다.
‘누가 이브를 악의적으로 매장하려고 하고 있다.’
발레리안은 곧장 그 소문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범인의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이브가 그리 말한다면 분명 근거가 있을 터. 빠르게 판단을 마친 그가 테라스를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잠깐만!”
이번엔 테라스에서 나가려는 그의 팔을 이브가 붙잡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이브는 이대로 그와 계속 테라스에 머무르는 게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기세가 워낙 험악했기 때문이다.
‘발레리안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의 저돌적인 행동에 이브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그녀의 말만으로 아론을 범인으로 속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말대로라면 숙소에서 나오지 않은 아론이 그런 소문을 퍼트릴 수 없었다.
‘악마가 아니라면 말이지.’
이브는 그러한 심증이라도 있었지만, 발레리안은 이런 심증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만 믿고 행동한다는 게 너무…… 너무 이상했다.
‘나한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난 게 아니었나?’
아니면 단순히 정의 구현을 위해 움직이는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행동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망설이던 이브는 저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발레리안.”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이브는 그 시선을 슬쩍 피하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유리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그걸 묻는단 말인가. 이브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끝내 속내를 내비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론에 대한 확증이 아직 없어. 조금 더 지켜봐야 해.”
“그런데 아론이 왜 그런 짓을 벌이는 거지. 그리고 무슨 수로?”
발레리안은 뒤늦게 의문점을 짚어 냈다.
방금 그녀의 말에 분노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할 뻔했지만, 이성을 찾자 자연히 이 상황에 대한 이상한 점을 발견해 냈다.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어떻게 사교계의 중추에서 소문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빠르게도 물어보시네요. 엘라 님.”
이브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꽂혀서 미동도 없었다. 아까 제 행동에 대한 머쓱한 기색조차 없었다.
“설마.”
발레리안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이브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단박에 깨달은 것이다.
“아직 몰라. 그냥 추측일 뿐이야.”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보는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로운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런데 넌 여길 아론이랑 함께 왔다고?”
“……응.”
“이브, 그건 너무 무모한 짓이었어.”
“알아.”
이브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는걸.’
그녀는 제가 쓴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보라색 깃털이 달린 가면이었다.
‘애초에 범인을 찾을 생각이 아니니까.’
만약 아론이 공격을 해 온다면 그녀도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그녀는 수도에 올라온 뒤, 업무 시간을 제외하면 서재에 틀어박혔다.
마법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어제 아론이 악마라고 추측을 하고, 밤새 서재에 있는 악마에 대한 서적을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악마의 약점에 대한 것을 더욱 유심히 탐독했다.
‘악마의 약점은 순수한 마력.’
가령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성력이었지만, 마법사의 순도 높은 마력도 꽤 효과가 있었다.
본디 악마의 마력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검은색이었다.
여러 오염된 마력들이 한데 엉키면 나오는 색이 검은색이었던 탓이다.
거기에 순수한 마력이 침범하게 되면, 반발 작용으로 진짜 마력이 튀어나와서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한다.
악마의 본래 모습은 인간의 외형과 다르게 굉장히 흉측한 모습을 지녔다고 일컬어졌다.
‘시도해 볼 만한 일이야.’
이브는 굳은 각오를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브.”
그녀의 침착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발레리안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체 왜 모든 걸 혼자서 하려고 해?”
“그러면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할까? 황태자 전하? 유리? 아니면…… 너? 더는 구설수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나도 이제 피곤해.”
날카롭게 쏘아붙인 이브는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이제 저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면서 설득시키는 상황이 지겨웠다.
심지어 발레리안을 향한 모든 게 제 오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싱숭생숭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이곳을 주시하던 시선들이 빠르게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호기심과 관심을 채 거두지 못한 몇몇만이 그녀의 얼굴을 흘긋거렸다.
‘아론은 어딨지?’
이브는 빠르게 연회장을 훑었다. 아론이 보이지 않았다. 아론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이브는 갑자기 다가온 사람이 쏟은 술에 옷이 흠뻑 젖었다.
“아…….”
하늘색 원피스라 그런지 붉은 와인이 끼얹어지니 확 티가 났다. 그녀의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영애였다.
“어머……! 죄송합니다. 제가 닦아 드릴게요.”
“괜찮아요.”
이브는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지만, 영애가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내가 닦아 준다니까……! 어머!”
그 순간,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영애가 이브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가발을 벗겨 버렸다. 갈색 머리의 가발에 감추어져 있던 은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나왔다.
“…….”
“어머, 설마 에스텔라 영애? 미안해요, 이런 가발을 쓰고 올 줄은 몰랐어서.”
그러나 이브는 제 앞에 있는 영애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발견했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일부러 그런 거구나.’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다들 그녀의 시선을 스리슬쩍 피했다. 이윽고 귀족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모였다. 덕분에 이브는 머지않아 그 주동자가 이유리라는 걸 눈치챘다.
‘주동자는 원래 직접 움직이지 않고 뒤에 있지.’
이브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연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가 이런 의도였나.
“그런데 에스텔라 영애께선 여긴 웬일이세요?”
그녀에게 와인을 쏟았던 영애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브를 보았다. 그러다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애께선 가면무도회가 아니라 신성 재판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이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루비색 눈동자가 말없이 그 영애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발하듯 그 말을 꺼낸 영애는 차가운 이브의 시선에 움찔했다. 이브의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으레 신성 재판 이야기가 나오면 벌벌 떠는 사람과는 달랐다.
“흠…… 신성 재판이요?”
오히려 이브는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휘어 웃었다. 누가 봐도 우아하고 매력적인 미소였지만 묘한 멸시가 느껴졌다.
“세리나 영애가 참 재밌는 농담을 하시네요.”
“……왜 이렇게 당당하신지 모르겠네요. 영애께서 그러실 입장이 아닌데 말이에요.”
세리나의 얄팍한 평정심이 이브의 미소 하나에 깨졌다.
“성녀님의 마음이 넓지만 않았다면 바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텐데.”
“그게 맞는 말이죠.”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세리나의 말에 동조했다. 이브는 이쪽을 보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일순 눈이 마주쳤지만, 유리는 시선을 빠르게 피했다.
‘오해를 풀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대화 없이 행동부터 하는 걸 보면 그녀가 무엇을 말하든 오해가 풀릴 여지는 없어 보였다.
“누구 마음대로 재판에 회부합니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드비히 소공작의 목소리에 귀족들이 당황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이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레리안이 이 순간에 나서 줄 거라 상상조차 못 했다.
‘지금이 기회야.’
시선이 발레리안에게 몰려 있는 이 순간.
이브는 눈을 감고 아론의 머리에 맺히도록 한 수분 주위로 다른 수분이 모이도록 했다.
‘만약 아론이 다른 귀족으로 변신했다면.’
그 귀족의 머리는 비라도 맞은 것처럼 젖어 있을 터였다. 이브는 슬그머니 눈을 뗐다.
그때였다.
“어머! 패트릭 백작, 머리가 흠뻑 젖으셨어요!”
중년의 귀족 부인이 부채를 든 채 패트릭 백작의 젖은 머리를 보며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