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여름제의 엿새째 연회가 시작되었다. 첫 가면무도회이기도 한 연회장 안에는 귀족들이 저마다 화려한 가면을 쓴 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친분이 있던 귀족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암암리에 상대가 누군지 짐작했다.
특히 장내에 있는 사람들 중 무도회에 있는 두 사람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바로 성녀 이유리와 발레리안 루드비히.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가면 너머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자태는 모든 이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
이브는 그 둘이 붙어 있는 걸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지금 그녀는 평소의 은발이 아닌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에스텔라 영애라는 걸 알지 못한 귀족들은 그냥 뜨내기 귀족 영애라고 치부하며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복수를 하겠다는 건데?”
옆에 있던 아론이 말했다. 그는 이브가 가지고 있던 연회 초대장으로 함께 파트너 자격으로 참석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잔, 보여? 이걸 얼굴에 확 끼얹어 줄 거야.”
이브는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론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리고…… 이 구둣발로 콱 발을 뭉개 줘야지.”
이브는 슬쩍 치마를 들어서 날카로운 구두를 보여 주었다. 아론은 생각만 해도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재밌겠다면서 자신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난 누가 이브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지 탐색하고 올게.”
“응.”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제 곁을 떠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바로 그녀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안 그래도 옆에 아론이 있으면 오늘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할 수 없었다.
이브는 제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마셨다. 누군가한테 이런 걸 뿌릴 정도로 눈에 띄는 짓은 전혀 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변장까지 했는데 그런 짓을 할 리가.
그런 그녀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하나였다.
‘아론을 감시해야 해.’
만일 아론이 악마라면, 유리에게 붙은 이유가 너무 명확했다.
‘이간질.’
그녀와 자신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 지금 악마들은 성녀와 마법사가 가까이 지내는 상황이 무척이나 껄끄러울 것이다.
어떻게든 마법사가 자신들의 편이 되어야 하니까.
‘협잡 방식이 릴리트보다 고단수야.’
유리가 눈치채지 못할 악마라면 최소한 마력의 형질을 위장할 수 있는 상급 악마일 게 분명했다.
일전에 만났던 상급 악마 릴리트보다 확실히 영리한 녀석이었다.
‘이 모든 게 내 착각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별로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브는 샴페인을 조금 머금으며 아론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에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브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인식도 못 할 만큼 작은 물방울이었다.
한편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던 유리는 제 옆에 있던 발레리안이 다른 쪽을 보고 있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그는 어느 한쪽을 보면서 시선을 아예 떼지 못했다. 유리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서 그의 시선을 쫓았다.
그의 시선 끝엔 갈색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 주위에 있던 귀족들도 그 갈색 머리의 여자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이브가 여기에 왔을 리는 없었다. 자신에 관해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런 이브가 무슨 이야기를 들으려고 여길 왔단 말인가.
유리는 곧이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귀족 때문에 억지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아직도 그 갈색 머리의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브.’
그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이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비단 여기 오기 전부터 이브가 가면무도회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그것도 나딘 마을에서 제도까지 따라온 아론 로만을 파트너로 대동한 채.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머금었다. 그걸 알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발레리안은 방에 제가 두었던 이브의 편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문 내 쓰레기 처리 담당자를 불러서 편지가 있었냐 물어도 그 존재는 알지 못했다. 제 방에 침입할 만한 사람은 가문 내에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인이 그의 편지를 훔쳐 갔다는 말인데, 그럼 그가 유리와 황실에 갔을 때밖에 없었다. 유리가 범인이 아니라면 남은 사람은…….
‘아론 로만.’
그래서 발레리안은 은밀히 심복 칼렙을 아론 로만에게 붙였고, 예상대로 아론이 그의 편지를 훔친 것을 알아냈다.
그럼 본디 편지를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게 응당 이치에 맞는 것이지만 아론은 그러지 않았다.
무슨 심산인지 파악하기 위해 발레리안은 직접 묻지 않고 조용히 감시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유리에게 보여 주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다.
더욱 수상한 행보였다.
발레리안은 심복 칼렙에게 명령을 연장했다.
“아론 로만의 뒤를 계속 감시하고 일거수일투족 나에게 보고해.”
그 뒤에 아론이 에스텔라 백작저로 향한다고, 칼렙이 소식을 가져왔다.
이어 연회에 이브와 아론이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브.’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지금 이 순간마저 그녀의 시선이 아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론을 감시하던 이브는 가면을 뚫고 찌르는 듯한 시선을 감지하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했다.
‘뭐, 뭐지?’
발레리안이었다. 이브는 저도 모르게 가면을 고쳐 쓰며 시선을 회피했다.
‘혹시 알아차린 건가?’
가면을 쓴 그녀가 이브 에스텔라라는 사실을.
이브는 황급히 잔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기존의 긴 은발 대신 어깨에 닿는 갈색 단발머리 여자가 제 얼굴보다 조금 큰 가면을 쓴 채 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봐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우연히 보는 거겠지.’
발레리안의 시선을 무시한 그녀는 아론의 뒤를 감시했다.
‘자, 잠깐만!’
그러나 곧 이브는 저에게 점점 다가오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속으로 기겁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는데!’
이브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피할 곳을 살폈다.
가면무도회 첫날이라 그런지 발 디디는 곳마다 사람이 득실거렸다. 마땅히 자리를 피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발레리안이 물었다. 이브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나름 음성 변조를 시도했다.
“성녀님의 곁을 지키셔야 할 고귀한 분께서 저에게 무슨 볼일이신지요?”
“중요히 할 말이 있습니다.”
넌지시 성녀 옆이나 지키지 왜 여기서 알짱거리고 있냐는 말을 돌려 말했건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갑자기 나한테 무슨 볼일이람.’
제도에 올라오고 난 뒤,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던 그가 여기서 알은체를 해 오니 퍽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요? 시간은 많이 못 내 드릴 것 같은데 괜찮나요?”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 내에 붙어 있는 테라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로 오라는 의미였다.
‘남녀가 나란히 테라스에 간다는 건…….’
심지어 상대가 발레리안 루드비히인데, 그와 단둘이 테라스에 간다니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별말 아니기만 해 봐.’
이브는 콧방귀를 뀌며 발레리안의 뒤를 따랐다. 유리가 토끼 눈을 뜬 채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테라스로 들어온 이브는 곧장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여기서 대화를 길게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저 밖에서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칠지 모르는 법이니까.
‘여기서 더 구설수를 만들 수는 없는데.’
이브는 흘긋 발레리안을 노려보았다. 유리에게 마음이 생겼을 시점인데, 구태여 다른 여자를 데리고 테라스까지 왔어야만 하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브, 너야말로 여기는 왜 온 거야?”
발레리안이 대답했다. 이브는 어깨를 움찔했다. 예상대로 그가 그녀의 정체를 간파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가 단숨에 알아보았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눈치가 빠르다니.
‘이러다 조만간 내 정체도 밝혀지는 거 아니야?’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섬뜩한 기분에 휩싸였다.
“가면무도회에 한번 참석해 보고 싶었어, 왜?”
이브는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브, 여기에 도는 소문을 직접 확인하려고 온 거지.”
“……소문?”
이브는 모른 척했지만 흠칫했다.
그가 그것까지 알고 있으리란 생각은 못 했다.
‘발레리안도 이미 그 소문을 알고 있는 건가?’
이브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게 다행처럼 느껴졌다.
안 그랬으면 자신의 연기가 모두 거짓이라는 게 금방 들통났을 테니까.
‘혹시 들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일순 이브는 발레리안에게 물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왜 도와준단 말인가.
이브는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지금 그는 그녀를 비웃기 위해 소문에 대해 알고 있는지 떠보는 걸까. 그런 거라면 아예 상대조차 하기 싫었다.
그대로 대답 없이 나가려던 그녀의 팔을 발레리안이 재빠르게 붙잡았다.
그가 말했다.
“이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를 보는 붉은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동요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