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브는 찻잔을 들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잔을 들고 있었다면 볼품없이 테이블 위에 찻잔이 나뒹굴고 있었을 테니까.
“제가…… 악마의 끄나풀이요?”
이브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당황한 시선을 가만히 응시하던 오필리아 공녀는 찻잔을 한 입 머금은 후, 말했다.
“그래요. 아직 대다수 귀족은 모르는 소문이지만, 대귀족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니 퍼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겠죠.”
이브는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는 게 이런 상황을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당장 입 밖으론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들을 다 쏟아 내고 싶었다. 가까스로 이성을 잡은 이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리는 거죠?”
“글쎄요, 지금은 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도는 소문이니 그 무리 중에 있겠죠. 혹은 관계자라든가.”
오필리아 공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대화는 끝이라는 듯이.
“이제 제 역할은 여기까지니까 이만 가 보도록 하죠.”
“역할이라니……? 누가 공녀에게 그런 일을 시킨 건가요?”
사교계에 도는 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이브는 공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를 놓치지 않았다.
“혹시 황태자 전하이신가요?”
이브는 금방 답을 도출했다. 오필리아 글렌을 직접 움직이게 할 이는 많지 않았다.
“꽤 눈치가 빠른 분이었네요.”
오필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브는 황태자가 뒤에서 그녀를 돕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러면 그 신문도 황태자가 한 일인가?’
하지만 자비에가 했다고 하기엔……. 자비에는 언론을 장악하는 일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아무리 제국이 중앙집권제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만큼은 자유롭게 풀어놓는 걸 선호했던 탓이다.
‘정말 노아의 말대로 의리 때문에 날 도와준 건가?’
그래도 자비에라면 이런 식으로 도와주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오필리아 글렌을 통해 이 소문을 전해 준 게 그의 방식에 가까웠다.
“혹시 최근에 발행된 제국신문을 보신 적 있나요?”
이브가 물었다. 오필리아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연히 신문의 내용을 상기했는지 오필리아는 싱긋 웃었다.
“아, 누군지는 몰라도 에스텔라 영애를 꽤 좋아하는 모양이던데 궁금하네요. 혹시 에스텔라 영애는 알고 계시나요?”
“전하께서 하신 일이 아니었나요?”
이브의 물음에 오필리아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 헤드라인을 누구보다 싫어할 사람이 자비에 오라버니라고 단언할 수 있죠.”
“그 정돈가요…….”
언론 장악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싫어하는 줄은 몰랐다.
‘그러면 절대 아니겠네.’
그럼 누구란 말인가?
이브는 유력했던 후보군이 지워지자 혼란만 가득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별안간 악마의 끄나풀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게 가장 심각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신성 재판에 끌려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보통 정적 관계에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악마의 끄나풀, 즉 마녀로 몰아서 신성 재판에 넘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웬만해선 사용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악마의 끄나풀로 몬다는 건 그에 상응하는 위험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거짓으로 밝혀지면, 오히려 역으로 처형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사례는 꽤 많았다.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에요.”
남의 일에 말을 올리는 걸 즐기지 않는 오필리아도 드물게 첨언했다.
“그러면 그 소문을 낸 사람부터 찾아내야 하는데, 나랑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발레리안을 광신도처럼 좋아하는 사람만 추려도 족히 백 단위는 가볍게 넘길 것이다.
이브의 해탈한 미소를 보던 오필리아는 부채를 펼치곤 얼굴을 가렸다.
“억울하다면 자구책을 세우는 수밖엔 없지 않겠나요?”
이브는 그녀의 행동에서 답을 얻었다.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라는 말씀이군요.”
여름제의 막바지 이틀 동안 열리는 가면무도회에서 그 소문의 발원지를 찾아내야만 했다.
오필리아가 나가고 응접실에 홀로 남은 이브는 찻잔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그 소문을 퍼뜨린 범인을 찾아내라고?’
그래, 으레 이런 상황에 빠진다면 소문을 낸 범인을 찾아내서 결백을 밝히는 발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브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똑똑.
그 순간, 노크 소리에 그녀의 상념이 깨졌다. 흠칫한 이브가 들어오라 대답했다.
“무슨 일이죠?”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생각이 복잡해서 손님을 응대하기 적절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브가 거절의 뜻을 비치려고 했을 때였다.
“아니지…….”
이브는 생각을 바꾸었다.
‘혹시 유리일지도 몰라.’
만약 방문자가 유리라면 그녀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비교적 고위층 귀족들과 쉽게 인연이 생기면서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연 성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론 로만이라고 합니다. 아가씨와는 나딘 마을에서 친하게 지냈다고…….”
“아론이?”
조금 의외였다. 지금 루드비히 공작 성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그가 여기까지 왔을 거란 생각을 못 했다. 이브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의 근황에 대해 물어봐야겠어.’
유리에게 편지를 보내도 회신이 오지 않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물론 연회에 꾸준히 참석하며 데뷔식을 치르느라 바쁠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왠지 불길해.’
자꾸만 그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신과 관련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벌어지고 있었다.
이브는 제 눈으로 그 근원을 찾아내고 싶었다.
“이브! 오랜만이네! 잘 지내고 있었어?”
그녀의 허락에 백작저로 들어온 아론은 말쑥하게 옷을 차려입은 채였다. 누가 봐도 완전히 제도 사람처럼 보였다. 살짝 뜨내기 같은 느낌은 났지만. 이브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릴 뻔하였다.
“이 옷도 나한테 잘 어울리지?”
허리를 곧추세우며 어깨를 으쓱한 아론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 안부를 물었다.
“아, 유리는 잘 지내고 있어?”
곧이어 이브는 자연스레 아론에게 유리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연회가 꽤 적성에 맞나 봐. 굉장히 재밌어하던걸.”
“다행이다. 긴장을 많이 하길래 걱정했는데,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야.”
그 말을 한 이브는 차를 마시는 척 아론의 눈치를 빠르게 살폈다. 그의 표정이 살짝 모호한 빛을 띠었다.
“음…… 혹시 연락 안 하고 지내?”
“응, 유리한테 회신이 안 와.”
이브는 솔직히 말했다. 뭔가 아론에게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그랬구나.”
아론이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서렸다.
“그게 아니라, 사실 유리가 이브한테 화가 난 게 있는 것 같았거든.”
“나한테 화가 났다고?”
“이브가 엘라 님한테 편지를 보냈잖아. 그걸 유리가 발견했어.”
“아…….”
이브는 탄식을 흘렸다. 대충 어떤 오해를 하고 있을지 가늠이 되었다.
그래도 발신인을 써서 보내지 않았는데, 제 편지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건 의아스러웠다.
‘그냥 편지를 보내지 말 걸 그랬나.’
일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해하고 있다면 직접 풀어 주는 쪽이 나았다.
“그래서 유리가 이브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했는데, 연회를 다녀오니 잊어버린 것 같더라.”
말을 덧붙인 아론이 다행이라며 웃었다. 이브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 없이 가만히 있는 이브의 모습에 아론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아론.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발레리안이랑 훈련은 괜찮아?”
“응? 아아. 뭐, 제국 최고의 실력자시니까.”
아론은 웃으면서 훈련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브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 가려진 루비색 눈동자에 예기가 서렸다.
‘아론이 이상해.’
아론이 발레리안을 좋아하는 건 거의 광신도 수준이었다. 발레리안에 대한 것 말고는 다른 건 아예 관심이 없을 정도로.
그런데 그렇게 동경하던 이와 같이 지내며 훈련까지 하는데도 발레리안의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다고?
일부러 그녀와 유리 사이에 있던 일을 언급한다는 것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을에선 유리랑 붙어 있어서 잘 몰랐는데.’
가만 보니 그 점도 이상했다. 발레리안보다 유리의 곁을 고집하는 아론. 새삼스럽게 성녀에게 반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질투 유발 작전에 흔쾌히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에게 이성적 호감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또래 친구를 만나서 반갑다고 하기엔 아론답지 않았다.
일면 억측이란 생각도 들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아론이, 아론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속내와 달리 이브는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아론, 발레리안한테 선물은 줬어?”
“응? 무슨 선물?”
아론이 당황한 시선을 보냈다.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발레리안을 만난다면 직접 만든 나무 조각상을 주겠다고 했잖아?”
“아, 그랬지. 깜빡했네.”
아론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브는 그 모습을 보며 마주 웃었다.
“하여간 건망증이 심하다니까.”
태연히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녀의 속에선 어느 때보다 선득한 바람이 불었다.
‘설마.’
발레리안을 만나겠다고 산으로 떠난 아론이 돌연 바닥에서 자고 있던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악마랑 바꿔치기를 당한 거라면-.
‘그러면 진짜 아론은 어디 있는 거지?’
하지만 그런 차이만으로 아론을 악마라고 속단할 수는 없었다.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찻잔을 기울이는 이브의 모습을, 아론이 샐쭉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그때 이브가 입을 열었다.
“아론, 혹시 나랑 같이 이번 연회에 참석해 줄 수 있어?”
글렌 공녀의 말대로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긴 했지만, 그 목적을 조금 수정했다.
“연회?”
“응, 나한테 초대장이 왔는데 가면무도회라서 나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거든.”
“이브가 연회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아론이 의외라는 얼굴로 이브를 보았다. 그의 눈빛에 의심이 어렸다. 그를 본 이브의 입가에 찰나 미소가 스쳤다.
“나에 대한 질 나쁜 소문들이 돈다고 해서 복수도 해 줄 겸 가는 거야. 난 당하고는 못 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