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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55화 (55/100)

55화

일주일간 열리는 여름제가 어느덧 닷새째 되었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던 이브는 문득 유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유리한테 편지가 없네.’

여름제가 열리기 전까지는 그래도 편지를 꼬박꼬박 주고받았는데, 그때 이후로 뚝 끊겨 버렸다. 그래서 먼저 잘 지내냐고 안부 편지를 보냈는데 회신이 없었다.

‘뭐, 연회에 참석하느라 바쁜 모양이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유리가 다쳤다는 소식이 딱히 들려오지 않자 이브는 안도했다.

‘발레리안이 호위를 잘해서 그런가.’

그가 유리의 곁에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았다면 악마들이 유리에게 접근하는 일에 큰 난항을 겪었을 터였다.

그러니 이렇게 조용한 것일 터. 이브는 자신이 발레리안에게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노아는 괜한 오지랖이라면서 수선을 떨었는데…….’

막상 유리가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으니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의 편지만으로 발레리안이 유리의 곁에 붙어 있진 않았을 테고, 상당 부분 자의적으로 호위를 자처한 것일 터였다.

‘닷새 동안 둘이 많이 친해졌겠지.’

이브는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커피만 들이켰다.

발레리안은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데, 그런 그에게 미련을 갖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브는 한숨을 내쉬곤 백작의 집무실로 향하다가 멈칫했다. 복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며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자식으로선 금실 좋은 모습이 보기가 좋은 광경임은 틀림없으나, 그들의 딸인 이브는 웬일인지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오랜만에 온 딸한테는 밀린 일만 왕창 떠맡기고!’

기껏 오래간만에 휴식을 만끽하나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였다.

밀린 업무들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전보다 한층 강화되어 돌아온 살인적 업무량에 현기증이 일었다.

‘나 돌아갈래!’

당장이라도 나딘 마을로 돌아가서 사랑스러운 텃밭을 영접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불쑥 치밀었다. 그녀는 곧장 집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발끝엔 묵직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이브는 금세 정원에 도착했다.

“아버지!”

정원에서 어머니와 까르르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를 발견한 이브는 소리쳤다.

“무슨 일이더냐, 이브?”

그가 말똥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자, 가슴이 답답해진 이브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참자, 참는 자에겐 복이 오리.

“아니…… 휴, 제가 부탁드린 일은요?”

“응?”

이브는 환장하겠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지그시 노려보는 딸의 눈빛에 그제야 그 말뜻을 알아차린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거라면 이미 조사를 시켜 놓았다!”

“신문사를 매수한 사람이 누구라던가요?”

“그게 말이지……. 우리의 힘으로 밝힐 수 없는 사람이었단다.”

에스텔라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고?

에스텔라 백작의 표정이 진지하게 굳어졌다.

“다른 가신들은요?”

에스텔라 가문은 그다지 큰 영토를 보유한 것이 아님에도 꽤 많은 가신을 거느리고 있었다.

과거부터 그게 조금 의아했지만, 명맥이 깊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가문이라 생각해 깊이 파고들진 않았던 터였다.

‘결국 그 가신들도 마법사들의 후예였었지.’

생각보다 선대에 마법사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 실제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힘으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아마 상상조차 못 할 권력자의 외압이 있던 거겠지.”

백작이 말했다. 그도 조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이브는 그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큰 동요는 없었다.

‘애초에 제국에서 제국신문사를 권력으로 휘두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하나의 커다란 의문점이 남는다.

구태여 제국신문사까지 손바닥 안에 둔 권력자가 이브의 평판을 신경 쓴다는 점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혹시 발레리안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길 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신문을 가장 언짢게 여길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밑천이 여실히 드러나는 인맥을 더듬으며 한 명을 추측했다.

‘혹시 자비에?’

황태자라면 충분히 그만한 권력이 있었다. 하지만 자비에가 왜 그녀의 평판을 신경 쓴단 말인가. 우리가 무슨 관계라도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자비에가 날 좋아하나?’

이브는 일순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나딘 마을로 떠나겠다는 자신의 발언에 자비에는 아쉬운 기색조차 없이 너무나 담백한 태도를 보였었다.

‘절대 날 좋아하는 건 아니지.’

저택으로 들어온 이브는 마침 한량처럼 돌아다니는 노아를 집무실로 끌고 들어왔다.

“야! 야?!”

노아는 질겁하며 몸부림쳤지만, 이브의 힘엔 속수무책이었다.

“이 신문, 누가 한 건지 예상되는 사람 있어?”

여전히 신문은 이브 에스텔라에 대한 칭찬이 헤드라인에 대대적으로 걸려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황당하기만 했는데 이젠 슬슬 부끄럽고 부담스러웠다.

‘이 미친 자를 어서 찾아내야 해.’

이브는 빨리 찾아내서 신문에서 제 이름을 빼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아니면 고도의 안티인가?

이런 식으로 그녀의 얼굴에 먹칠하려는 사람일 수도.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 알아내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노아는 별안간 끌려온 게 못마땅한지 소리를 빽 질렀다. 이브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자비에일까?”

황실에서 징세관으로 일하며, 황태자와 비교적 자주 마주쳐 왔던 노아라면 알 수도 있었다.

노아는 그녀가 무얼 묻는지 깨닫고 고민했다.

자비에 루 힐리오스.

이브는 그가 어떤 남자인지 묻고 있던 것이다.

“자비에라면…… 글쎄, 아닐 것 같은데…….”

역시나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대답이 나왔다.

“그럼 대체 누구지…….”

이브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그럼 이제 나가.”

“사람을 아주 짐짝처럼 끌고 왔다가 버렸다가 난리도 아니네.”

노아는 구시렁거리면서 그녀의 말에 따라 충실히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 집사장이 서 있었다. 노크하려 했는지 집사는 어색하게 든 손을 갈무리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이브의 물음에 집사가 대답했다.

“오필리아 글렌 공작 영애입니다.”

“아…… 맞아. 오늘 오후 중으로 방문한다고 했었지.”

이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자기 여름제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렌 공작가에서 하나의 연통이 도착했다.

오필리아 글렌이 그녀를 만나러 조만간 방문하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오필리아 글렌이라면…… 글렌 공작가의 장녀?”

노아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깜짝 놀라 이브를 보았다.

“너 어디서 사고라도 치고 온 거야?”

“여기 틀어박혀서 일만 하는데 사고 칠 새가 어딨어.”

황당한 추측을 하는 노아를 지나친 이브가 집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글렌 공녀는 어디 계시지?”

“응접실에 있습니다.”

이미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브는 집무실에 나와 재빨리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슨 일로 온 걸까.’

일면식도 없는 그들 사이에서 공통점이라곤 황태자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사촌 누이인 오필리아 글렌은 이미 유명했기에 이브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잘된 일인지도 몰라.’

그 신문에 관해 물어볼 기회였다. 평소 자비에와 친밀한 오필리아라면 그 신문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었다.

응접실에 노크하고 들어온 이브는 우아하게 앉아 있는 오필리아를 보며 눈을 멍하니 끔뻑였다.

‘완전히 자비에랑 판박이잖아!’

사촌이 아니라, 남매라고 해도 믿을 만한 비주얼이었다.

검은 머리의 자비에와 다르게 은색 머리칼이었지만 여름의 신록을 품은 듯한 녹색 눈동자, 그리고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을 풍기는 우아한 분위기가 특히 그와 흡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브 에스텔라라고 해요.”

“전 오필리아 글렌, 만나서 반가워요.”

이브는 슬쩍 눈인사를 건네며 오필리아 글렌 앞에 앉았다. 무릇 처음 만나는 영애끼리 나누는 인사라고 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비에랑 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오필리아 글렌이 함께 있으니 은근한 긴장감에 목이 말랐다. 과연 제 형제를 제치고 공작가의 차기 가주로 주목받는 자라 그런 걸까.

은은한 카리스마가 오필리아의 주변을 자연스레 맴돌고 있었다.

“차 맛은 입에 맞으신가요?”

이브는 슬쩍 찻잔에 시선을 옮겼다. 자비에와 오필리아. 사촌지간이지만 친남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취향까지 겹쳤다. 그중엔 차를 좋아하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꽤 괜찮았어요.”

특히 차 한정으로 까다로운 입맛. 이 점이 그 둘이 가장 남매처럼 보이는 요인이었다. 그 입맛을 만족시킨 게 의외였는지 오필리아는 눈썹을 슬쩍 올렸다.

“어디서 구매한 차인가요?”

“제가 나딘 마을에 있을 때 재배한 찻잎이에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돌아가실 때, 제가 가진 나머지도 다 챙겨 드리도록 할게요.”

어차피 이 집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냥 텃밭에서 키운 찻잎들이 아까워서 가져온 거였는데, 글렌 공녀의 입맛을 사로잡을 줄…….

‘알고 있었지.’

이브는 슬쩍 미소를 삼켰다.

마법으로 습도를 조절하며 섬세하게 키운 작물이었기에 입맛에 안 맞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영애는 차를 안 마시나요?”

“네, 저는 별로 차를 안 좋아해서요.”

이브는 솔직히 대답했다. 저쪽이 차를 좋아한다고 구태여 제 취향을 바꾸어서 대답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대답이 외려 마음에 들었는지 오필리아 글렌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오필리아는 이브를 보며 생각했다.

‘에스텔라 영애가 두문불출한다고 들었는데.’

왠지 세간의 시선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게 아니란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지금 사교계에서 영애에 대해 도는 소문을 알고 있나요?”

공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알고는 있어요.”

“뭐라고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이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 입으로 자신에게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말하라고?

“황태자와 루드비히 소공작을 저울질한 희대의 악녀요.”

“없는 소문은 아니지만, 아직 영애에 관한 다른 소문은 듣지 못한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공공연히 퍼진 소문은 아니니.”

글렌 공녀가 말했다. 이브는 무언가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항간엔 영애께서 루드비히 소공작과 약혼한 이유가 악마의 끄나풀이라서 그렇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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