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글렌 공작 가문의 장녀인 오필리아는 데뷔탕트 때부터 만인의 이목을 이끌었다.
만일 루드비히 소공작이 에스텔라 백작 영애와 약혼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약혼녀 자리는 오필리아 글렌 공녀가 되었을 거라는 중론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필리아 글렌이 글렌 가문의 후계자가 되면서 그 의견은 완전히 불식되었다.
그때 연회장에 시종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성녀 이유리 님과 발레리안 루드비히 소공작이 드십니다!”
연회장 내에 있던 모든 사람의 이목이 성녀와 엘라에게 쏠렸다.
글렌 공녀는 다시 펼친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그들을 관망했다.
“허어…… 루드비히 소공작의 미모는 여전하군요!”
저마다 탄성을 터트리며 발레리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세간의 화제였던 성녀가 궁금하다고 밀담을 나누던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글렌 공녀도 예외는 없었다. 성녀가 궁금했던 그녀도 일순 루드비히 소공작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사람을 단번에 홀리는 미모였다.
한참 소공작을 보며 외모를 예찬하던 그들은 조금 뒤늦게 성녀를 발견하고 속닥였다.
“다른 세계 사람처럼 생겼는데…… 꽤 예쁘장한 미모네요.”
“계속 보고 있으면 까만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요.”
유리는 저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 관심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서 어깨가 으쓱했다.
마치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
“악마가 널 노릴지도 몰라.”
그 순간, 유리는 이브가 저에게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현대인으로서의 관념이 뿌리 깊게 박힌 그녀에겐 악마의 존재는 낭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론에게 물었다. 그는 유쾌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악마가 왜 그런 곳에 나타나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엘라 님도 있잖아!”
그 말에 유리는 완전히 안심했다. 하긴 나한테는 리안이 있으니까…….
그러나 완전히 불안감을 떨치진 못했다. 제국에서 가장 악마를 많이 보아 온 발레리안에게 사실 진위를 묻는 것이 확실하겠지만, 일부러 묻지 않았다. 행여 데뷔탕트에 참여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두려웠다.
‘리안이랑 파트너로 참여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유리는 주먹을 꽉 쥐며 결연한 눈빛을 지었다. 한 달 전부터 사제들이 발레리안과 가장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이 데뷔탕트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 왔다. 그걸 놓쳐선 안 된다고 그녀에게 재차 강조했다.
“성녀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성녀에게 가까이 모여들었다. 너도나도 인사를 건네며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 막시모 필리우스입니다.”
“저는 하인트 백작의 외조카인 셀로 리처드…….”
“패트릭 백작입니다.”
유리는 갑작스러운 귀족들의 인사에 머리가 핑핑 도는 듯했다. 발레리안이 유리의 앞에 서며 말했다.
“성녀께선 이제 막 데뷔식을 치러 적응 시간이 필요하니 소상히 하실 말씀이 있다면 잠시 후에 오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일면 단호했다. 서로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슬슬 물러났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성녀님.”
유리는 한 치도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뺨을 붉혔다.
‘정말 멋지다!’
유치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동화책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가 있다면 딱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약자에겐 따사롭고 강자에겐 굽히지 않는 점마저 딱 그녀가 그리던 기사님이었다.
“리안은 내 옆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유리가 시무룩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발레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난 놀러 온 게 아니라 유리의 호위를 위해 참석한 거니까.”
그 순간, 그는 이브가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연회장에서 유리의 곁에서 한 치도 떨어지지 말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
발레리안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저는 자비에와 이브가 같이 나란히 붙어 있는 광경만으로 엘라의 힘을 조절할 수가 없었는데. 그녀는 자신과 유리가 붙어 있는 걸 종용하고 있었다.
발레리안은 도저히 이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쪽에 가까웠다.
“고마워. 리안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야.”
유리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활짝 웃었다.
* * *
그날 밤이었다. 연회장에서 돌아온 유리는 피곤한 상태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잠들지 못하고 한참 뒤척이던 유리는 눈을 떴다.
또 그 두통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으…….”
그래도 이 시간에 발레리안에게 엘라의 힘으로 성력을 억눌러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누워 있는 것보단 찬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나을 듯하여 그대로 공작 성의 정원으로 향했다.
“후…….”
유리는 풀 내음을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이켰다.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어떤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바보!’
이런 어둡고 깊은 밤에 혼자서 정원을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이 두통을 꺼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서.
유리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이대로 뒤를 돌아봐? 아니면 그대로 도망가?’
괜히 도망갔다간 다가오는 사람을 자극할 수도 있었으며,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면 얼굴을 봤다고 해코지를 당할 수 있었다.
유리의 머릿속에 공포 영화 몇 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유리, 괜찮은 거야?”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 뒤에서 들려왔다. 누군지 알아차린 유리는 완전히 몸의 긴장을 풀었다.
“하…… 아론.”
헤이즐넛 머리 색의 또래 남자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순박하고 착한 인상엔 티끌만 한 악의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야?”
아론이 묻자, 괜히 머쓱해진 유리가 뾰로통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내가 물을 소리야. 아론은 이 시간에 무슨 일인데?”
“아, 이걸 엘라 님한테 가져다드리려고.”
아론의 손에 종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유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깟 종이 한 장 때문에 이 새벽에 정원에 나와 있다는 거야?”
“이거 편지야.”
“편지?”
그제야 유리는 조금 관심 어린 눈빛으로 아론이 든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아론이 말했다.
“이브가 엘라 님한테 보낸 편지더라고.”
“뭐? 무슨 내용이었는데?”
“아무래도 남의 편지를 함부로 보여 주기는 좀 그렇지.”
아론이 난감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유리는 이 편지의 내용을 어떻게서든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이브가 리안한테 편지를 보냈다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유리가 마른침을 삼키곤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보여 줘.”
그녀의 재촉에 아론은 더욱 난감하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하……. 안 되는데. 난 엘라 님한테 신뢰를 잃으면 죽고 싶어질 거란 말이야.”
“리안한테는 더욱 말하지 않을게.”
“진짜지?”
유리는 걱정하는 아론에게 재차 비밀을 약속했다.
결국 아론은 흘긋 종이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유리에게 건넸다.
“친구니까 특별히 보여 주는 거야.”
“……고마워.”
편지를 받아 든 유리는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구겨진 편지를 펼쳤다.
심장이 이토록 방망이질하는 건, 이브와 발레리안이 한방에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건…….’
발레리안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 이브의 편지였다.
유리가 아닌 날 선택하겠다면, 부디 나에게 와 줘. 발레리안.
편지의 마지막 문단을 본 유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발신인에 ‘이브 에스텔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의 분노 어린 눈빛을 본 아론이 몰래 샐쭉하니 웃어 보였다. 유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런 편지를 보낸다고?
유리는 처음 느끼는 통렬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모든 것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아론은 이 편지를 읽었지?”
“응, 연무장에서 주운 종이라 버리려고 했는데 혹시 몰라서.”
사실 그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연무장에서 편지를 받은 엘라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아론은 엘라가 자리를 비운 틈에 엘라의 방에 잠입했다.
‘편지를 조작한 보람이 있네.’
그렇게 편지를 훔치는 데 성공한 아론은 제 앞에서 부들거리는 성녀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숨겼다.
유리는 편지를 우그러트릴 듯 꽉 움켜쥐었다.
“아론은…… 어떻게 생각해?”
“뭐…… 아직 이브가 발레리안한테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
천연스레 대꾸한 아론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삼자의 눈에도 그리 보인다는 뜻이었다. 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 하.”
며칠 전만 해도 발레리안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이브가 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완전히 사람을 갖고 논 것이다.
‘재밌어? 이브 언니?’
편지를 쥔 유리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브 에스텔라.
그녀가 자신을 기만한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