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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53화 (53/100)

53화

“유리가 왔다고?”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던 이브는 집사가 가져온 소식에 깜짝 놀랐다. 루드비히 공작저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가 백작저에 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발레리안이랑 붙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중을 나갔다. 검은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인이 황실 제복을 입은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유리와 발레리안이었다. 검은 머리의 성녀와 금발 머리의 잘생긴 기사님이라.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역시, 발레리안도 함께 온 거였구나.’

유리의 호위 기사인 발레리안이 같이 올 거란 생각을 잊어버렸다니.

이브는 제가 떠올린 생각의 허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내심 그들이 떨어지길 바란 사람처럼 생각한 것 같지 않나.

정말 누가 봐도 제 모습은 구질구질해 보였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어서 와.”

이브가 유리를 향해 웃으며 반겼다. 괜히 그런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은 아집에서 우러난 환영이었다. 옆에 발레리안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자존심이었다.

‘내 정체를 알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니까.’

만일 그 순간이 오면 그녀를 악마를 보듯이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터였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은 그런 그의 모습에 상처를 덜 받기 위한 자기 보호로 무장한 것일 수도 있었다.

발레리안의 시선이 이브에게 향했다. 왠지 모르게 촘촘하게 훑는 듯한 시선에 이브는 무의식적으로 긴장했다.

“어, 어서 와요.”

성녀가 왔다는 소식에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백작 부부가 깜짝 놀라 정문으로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백작 부인.”

유리가 다소곳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성녀를 본 백작 부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서 오세요, 성녀님.”

“바, 반갑소.”

그들의 어색한 모습에 이브는 절로 흘러나오는 탄식을 꾹 참았다.

‘이러니까 완전히 죄지은 사람 같잖아.’

발레리안도 그게 이상했는지 의아한 시선으로 백작 부부를 보고 있었다. 이브는 차라리 부모님을 내보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손님 응대는 제가 할 테니까 두 분은 쉬고 계세요. 괜찮지, 유리?”

“응, 당연하지. 이브 언니.”

유리가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해괴한 표정으로 보던 백작 부부는 이브가 등을 떠밀자 못 이기는 척 결국 정원으로 돌아갔다.

이브는 다과실로 유리를 데려왔다.

미리 하녀를 시켜 다과실에 디저트를 준비하도록 했다. 원작에서 유리가 군것질을 좋아한다는 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유리는 디저트류의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와! 이게 다 뭐야?”

유리는 다과실에 펼쳐진 디저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다 먹어도 되는 거야?”

“응, 마음대로 먹어.”

이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는 뺨을 붉히며 좋아했다. 그러더니 돌연 표정을 굳혔다. 이브는 무엇이 잘못되었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을 하는 유리의 시선이 발레리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이브가 그에게 말했다.

“유리가 나랑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나가 주겠어?”

사실 그와 같이 있으면 이브의 불편함이 더 컸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온 신경이 발레리안에게 쏠렸다. 아까부터 송곳으로 찌르는 듯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도 신경 쓰였다.

“……괜찮겠어? 유리.”

“응, 난 괜찮아!”

당연히 유리의 의사만 중요하다는 듯 묻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이브는 입 안이 쌉싸름해졌다. 애초에 좋은 감정으로 남을 수 없는 관계인데, 뭘 기대하고 있단 말인가. 이브는 저 자신의 모순점에 황당해졌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차분함을 찾았다.

발레리안이 나가고 이브와 단둘이 남은 유리가 배시시 웃었다.

“언니, 이 옷 나한테 어울려?”

그녀의 질문에 루비색 눈동자가 유리의 드레스로 향했다. 얇은 몸 선을 적당히 부각시키는 화려한 장밋빛 드레스는 좋은 맵시를 선보였다.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있는 그대로 잘 어울린다 대답해 주었다.

“다행이야. 리안이 처음 골라 준 옷이라서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유리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브는 대답 없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천연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왜 그렇게 쳐다봐?”

“유리.”

이브가 여트막한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나한테 그런 식으로 질투심을 유도하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유리는 뜨끔했지만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브를 마주 보았다. 이브는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말해 줘야 할지 신중히 고르는 눈치였다. 유리는 부러 당황한 척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정말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다니 당황스러워.”

정말 당황스럽다는 듯 유리는 검은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발레리안은 나와 아무 사이가 아니야. 아니, 모르는 사람만 못하지. 발레리안은 날 싫어하고 있으니까.”

“……리안이 언니를 싫어한다고?”

유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이브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얼핏 보이는 의심과 혼란을 마주한 이브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 문이 열렸을 때.’

발레리안이 그녀가 나딘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린 날.

유리가 자신과 발레리안 사이에 벌어진 일을 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더욱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오해한다고 이런 식으로 견제하는 건 별로 달갑진 않지만.’

유리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브는 원작의 여주와 척을 지는 쪽은 현명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분명히 귀찮은 일이 생길 거야.’

그렇기에 이브는 더욱 이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었다.

“그때 문 사이로 본 거지?”

이브가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동요하는 유리의 모습에 이브는 더욱 확신했다. 그 모습을 정말 본 것이다.

“발레리안이 내 방에 있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말해 줄게.”

이브의 말에 유리가 당황했다. 그 일을 단도직입적으로 꺼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브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발레리안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신의와 믿음이야. 그걸 깨트리고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도망친 나를 지적하고 추궁한 적이 있어. 그리고 이번에도 도망치려고 짐을 싸 뒀는데, 그걸 들켰거든.”

“……그래서?”

“그런 식으로 도망치면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냐고 비난당했지, 뭐.”

이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녀에게 말을 들을수록 유리의 시선이 더 세차게 흔들렸다.

자신이 그간 보아 온 광경이 모두 오해였다고?

“마차에서 아론이 내 편을 들었을 때, 아마 발레리안은 꽤 유감스러웠을 거야. 만인이 날 비난하길 바라고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에 유리는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상한 오해를 해서 이브에게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했다니.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 미안해. 내가 오해를 했었어…….”

유리가 솔직히 실토하며 사과했다. 이브는 피식 웃으며 괜찮다 말했다. 오히려 그런 오해를 인정하고 사과해 주는 유리가 고마웠다.

“그러니까 우리는 얼굴 붉힐 일이 없다는 거야.”

“으, 응.”

유리는 제가 옹졸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한편으론 이브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니가 일부러 떠난 것도 아닌데, 너무 억울한 일인 것 같아.”

“어찌하겠어. 이것도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이브는 기운 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그런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언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말해 줘.”

“말만으로 고마워.”

이브는 싱긋 웃으며 차를 마셨다. 유리는 새삼 그녀의 외모에 감탄했다. 이곳에 요정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미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휴.’

이브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제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자칫하면 미움을 살 뻔했다. 유리의 오해를 완전히 푼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 * *

-퍼벙!

밖에선 여름제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황궁의 중앙 연회장에선 녹음을 담은 듯한 초록빛의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저마다 담소를 나누며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단연코 수도에 올라온 ‘성녀’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정작 이목이 흩어질 때마다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주제는 성녀와 같이 수도에 올라온 ‘이브 에스텔라’였다.

귀족들은 한 번에 두 남자를 유혹한 이브를 천박하다며 겉으론 욕했지만, 속으론 제국에서 인기 가도를 달리는 두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브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리 유혹한 것이냐고.

“이번에 에스텔라 영애는 참석하지 않는 걸까요?”

귀족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설마요. 그렇게 분탕을 쳐 놓고 도망갔었는데 다시 연회에 돌아올까요.”

“흐음, 다시 수도에 올라온 뻔뻔함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말을 하는 귀족 부인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성녀의 데뷔탕트도 충분히 흥미로운 화제긴 했으나, 역시 재밌는 쪽은 에스텔라 영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영애가 부채를 착 접으며 말했다.

“저는 그쪽보단 성녀가 궁금한데요?”

그녀의 목소리에 귀족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바로 황태자의 사촌 누이인 오필리아 글렌이었다.

제 쟁쟁한 형제들을 압도적인 두뇌로 찍어 누르고, 당당히 글렌 공작가의 후계자의 자리를 꿰찬 인재이기도 했다.

중앙의 실세인 글렌 공작 가문이었기에 자연히 그녀에게 이목이 몰렸다.

“제국의 명운을 손에 쥐었다고 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녀의 입가가 고혹적인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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