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집사장은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소공작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충 편지 속 내용을 예상했다. 또 에스텔라 영애에게 소박을 당하거나, 그 비스름한 내용이 적힌 모양이었다. 집사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발레리안 루드비히에게.
이번 신문 보도로 유리가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커졌어.
너는 유리의 호위 기사니까 그 애의 보호에 각별히 신경 써 줬으면 해.
연회에서 한순간도 유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더 좋고.
그럼 부탁할게.
발신인이 적히진 않았지만,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불 보듯 뻔했다. 깔끔하고 담백한 필체는 분명 이브의 것이었다.
그 편지를 뚫어질 듯 노려보던 발레리안은 이내 이를 바득 갈았다.
‘나한테 성녀의 안전을 더 신경 써 달라고.’
성국에서 보낸 편지와 뒤바뀌었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내용이었다. 차라리 발레리안은 이 편지와 성국의 편지가 바뀐 것이길 바랐다.
자신은 단순히 아론이 이브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속이 뒤틀리는데, 이브는 성녀와 그가 연회에서 붙어 있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의도가 어떻든 그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그렇게 원한다면 그리해 주는 게 맞겠지.’
완전히 기분을 망친 발레리안은 편지를 움켜쥐곤 성큼성큼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소공작의 모습을 발견한 공작가의 기사들이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워낙 험악한 얼굴로 걷는 터라 말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그런가 본데? 또, 에스텔라 영애인가 보네.”
기사들은 당연하게도 이브 에스텔라와 관련된 일이라고 추측했다.
에스텔라 영애에 대한 소공작의 관심은 공작 성의 가솔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었다.
“어, 리안!”
루드비히 공작 성의 정원에서 꽃을 구경하던 유리가 발레리안을 발견하고 팔을 흔들었다. 현재 수도에 올라온 유리는 루드비히 공작 성에 귀빈 자격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 있는 황궁 기사를 발견한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발레리안이 그 기사에게 물었다. 황궁 기사복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 성녀님을 궁으로 부르셨습니다.”
“맞아. 그래서 리안을 기다리고 있었어.”
유리가 멋쩍은 미소를 달며 말했다.
“외부 외출은 리안 없이 아직 불안해서…….”
이브의 편지로 뒤틀린 속내를 숨긴 발레리안은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 외출이 있다면 말해 줘.”
“아니야! 나야말로 귀찮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이게 내 역할인걸.”
그의 온유한 미소에 유리는 완전히 안심한 얼굴로 마주 웃었다.
* * *
황태자 궁에 도착한 그들은 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그들이 걷는 복도 주위엔 녹음이 무성하여 여름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 녹음을 보며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황태자의 녹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들이 응접실에 들어서자 자비에가 먼저 성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이유리 양.”
“안녕하세요, 황태자 전하.”
그녀가 깍듯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자비에는 그런 딱딱한 인사는 괜찮다며 자리에 앉을 걸 권유했다.
“발레리안, 오랜만에 보는데 꽤 얼굴이 좋아…… 별로 좋아 보이진 않는군.”
자비에는 성녀 옆에 앉은 발레리안의 얼굴을 보고 말을 바꾸었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던 건가?”
하루 이틀 본 얼굴이 아니었다. 10년 넘게 보아 왔던 친구의 기분 상태 정도는 얼굴만 봐도 알았다.
“그럴 리가, 난 지금 지극히 기분이 좋은 상태인데.”
발레리안이 부드러이 웃으며 대꾸했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기분이 나빠 보인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가 이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자비에가 찻잔을 들었다.
“이유리 양, 차 맛이 입에 맞을진 모르겠군요.”
그의 말에 따라 유리가 찻잔을 들며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너무 맛있어요……!”
그간 신전에서 마셨던 차와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꽃 향의 농도 자체가 달랐다. 보관을 잘했는지 습한 맛도 없고 뒷맛이 깔끔했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번엔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차를 마실 시간이 없었지요. 오늘은 비교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즐기고 가십시오.”
자비에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유리는 살짝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흘긋 발레리안을 보았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고?’
막 수련을 끝내고 왔는지라 살짝 지쳐 보이긴 했지만, 평소와 큰 차이점은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은 빛이 났다.
그런데 황태자가 그리 말하니 신경이 쓰였다. 유리를 보던 자비에가 찻잔을 내려놓고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첫 데뷔탕트를 준비하느라 신경이 쓰이는 게 많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주위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저는 그냥 편하게 있어요. 이래도 되는지 싶을 만큼…….”
유리는 머쓱히 웃음을 흘렸다. 자비에의 눈썹이 흥미롭게 올라갔다.
생각보다 솔직한 발언이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주위 사람의 도움만 받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텐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 쪽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도울 터이니.”
“와! 말씀만으로 감사한걸요? 아, 그렇다면…….”
고민하듯 말을 흐리던 유리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 파트너가 없다면 이브 언니의 파트너가 되어 주실 수 있을까요?”
“……?”
“유리.”
자비에는 당황한 시선으로 유리를 보았다. 먼저 그녀를 부른 발레리안의 시선이 여느 때보다 싸늘했다.
자비에는 그녀의 질문을 곱씹었다.
저보고 에스텔라 영애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혹시 그 이야기를 못 들은 건가.’
수도에서 루드비히 소공작과 황태자, 그리고 에스텔라 영애 간에 얽힌 이야기는 이미 유명했다. 그러나 이제 막 이 세계에 온 지 몇 달 되지 않고, 성국에만 있던 그녀라면 모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유리의 말에 자비에는 제 추측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이브 언니를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볼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요.”
지금 유리는 그 소문을 알고 있다고 제 입으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비에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그건 곤란할 것 같군요.”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 이상 에스텔라 영애와 추문이 생기는 건 그의 입장에서도 곤란했다.
‘완전히 닭 쫓던 개 신세로 소문이 나 버렸지.’
연회에 갈 때마다 자비에는 자신을 향한 동정 어린 은은한 시선이 여간 걸쩍지근한 게 아니었다.
진짜 성녀의 말대로 했다간 이브 에스텔라는 수많은 비난의 화살에 고슴도치 신세를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이유리 양이 에스텔라 백작 영애와 함께 올라왔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황실 사람들은 모르는 게 없구나, 살짝 감탄했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는 유리가 성국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등등,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로 흘러갔다.
“대화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즐거웠습니다.”
자비에가 싱긋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도 너무 즐거웠어요!”
유리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자비에의 시선이 발레리안에게 향했다. 응접실에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낯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러면 연회 때 보도록 하지, 발레리안.”
“그래.”
자비에의 인사에 발레리안은 다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탁.
문이 닫히고, 자비에가 홀로 남은 응접실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는 홀로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빠졌다.
오늘 자신에겐 이유리와 이브 에스텔라의 관계가 어떠한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 둘의 관계를 알게 되는 것이 결국 발레리안과 성녀의 관계를 알게 되는 것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일단 성녀와 에스텔라 영애는 나쁜 관계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같이 수도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유리와 발레리안의 관계에 진척이 없는 건가?’
성국에선 어떻게든 성녀와 엘라를 묶어 놓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터. 그게 성국의 입지를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둘의 관계에 아무런 진척이 없다는 것이 조금 의외라 놀라웠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성녀가 일방적으로 발레리안을 좋아하는 거군.’
자비에는 이유리와 대화를 나누자마자 알아차렸다. 저에게 과도한 미소를 짓는 이유리가 발레리안의 관심과 질투를 유도하고 있음을.
발레리안이 나딘 마을로 파견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느 쪽을 향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녀 쪽에서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성녀가 요구한 부탁은 의도가 조금 더 명확해진다.
‘어찌 되었든 예사로운 부탁은 아니지.’
사교계의 생태계를 몰라서 부탁한 거라기엔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지극히 이건 상식 문제였으니까. 어떤 생각을 하든 의도가 다분히 악의적이었다. 황태자인 저한테까지 이런 의도를 드러냈다면 연회에서 성녀의 행보도 예상이 되었다.
‘안타깝게 되었군.’
벌써 이브 에스텔라가 성녀에게 미움을 사고 있다는 게 유쾌한 사실은 아니었다.
이브 에스텔라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에 대한 경고를 미리 해 줄까 고민했지만, 자비에는 생각을 접었다.
‘괜한 오지랖이다.’
그는 괜히 그 편지를 받으면 에스텔라 영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되었다.
-왜 제 일에 신경 쓰세요? 저 좋아하세요, 전하?
이브 에스텔라의 목소리가 선연하게 들리는 듯했다. 도도한 미소를 머금으며 묻는 그녀의 얼굴까지 떠오르고 말았다.
“절대, 절대 안 되지.”
그런 오해를 받는 건 딱 질색이었다. 완전히 신경을 끊으려고 했던 자비에는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글렌 공작 가문의 후계자이자, 자비에의 사촌 누이인 오필리아 글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