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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51화 (51/100)

51화

수도에 올라온 지 며칠이 지났다. 이브는 계속 에스텔라 백작저에 머무르며 놀고먹고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삶을 충실히 실행했다.

‘흙 맛을 못 본다는 건 아쉽지만 역시 노는 게 최고지.’

오래간만에 맛보는 한가로움과 게으름이 이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이브는 나딘 마을에서 느낄 수 없었던 보드라운 이불과 한 몸이 되어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면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에 백작저의 일이 잘 굴러가고 있는 건지 걱정되어 한숨이 푹푹 나왔다.

‘얼마나 또 업무들이 쌓여 있을까…….’

그때 누군가 방문에 노크했다.

“…….”

귀찮았던 이브는 그대로 없는 척 입을 다물었지만, 성이 난 노아가 문을 쾅쾅 두들겼다.

“야! 너 여기 있는 거 알거든? 이브 에스텔라!”

“여기 아무도 없다니깐!”

이브가 대꾸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침대에서 늘어져 머리도 빗지 않은 채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을 노아가 징그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팔자가 아주 좋네.”

“시비 걸려고 왔으면 꺼지세요.”

그녀가 쳐다보지도 않고 욕을 하자 그가 철부지를 보는 듯 혀를 찼다.

“칼비노에서 네가 성녀랑 같이 수도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더니, 진짜였어?”

“대륙 바다 너머에 있는 칼비노에서 왔다고?”

이브는 깜짝 놀랐다. 칼비노는 제국에서 가장 큰 중앙 해역을 넘어야 해서 배를 타고 사흘은 걸리는 지역이었다.

이브가 집에 도착한 건 불과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그 소식을 접하고 바로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노아는 제 품에 있던 신문을 꺼내어 이브에게 내밀었다.

[이브 에스텔라, 드디어 수도로 귀환! 제국 사람들의 환영 물결이 이어져…….]

이브는 제가 신문을 제대로 읽은 건지 눈을 비비적거렸다.

‘엥? 이게 뭐람?’

그런데 다시 봐도 신문의 내용엔 변화가 없었다. 그럼 이게 지금 실제 신문이라고?

“이 신문은 어디서 산 거야?”

“그 유명한 제국신문이야.”

“이상하다……. 막 희대 악녀, 바람둥이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처음 한 일은 신문 구독부터 중단한 일이었다.

신문을 보면 기분을 망칠까 봐 일부러 눈에 보이지 않게 했다.

그녀의 말에 노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평판이 제국에서 그리 썩 좋지 못하다는 건 만인이 아는 사실이지.”

그걸 굳이 짚어 주다니 참 고마웠다.

“그런데 신문사들은 굉장히 우호적이야. 그래서 우리 가문이 신문사들을 매수한 거로 알더라.”

노아가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이브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제국신문이랑 다른 신문사들을 매수한담?”

심지어 제도에 있는 신문사들은 자신들의 손에 귀족들의 평판이 달렸다는 점 때문인지 오만한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까. 웬만한 자본으론 꿈쩍도 하지 않는 양반들인데.”

“그런데 이런 신문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긴 해.”

당사자인 저조차도 신문을 제대로 읽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신문에 대한 신뢰성이 훅 내려갔다. 신문사들이 그녀 하나를 변호하자고 신뢰성을 버리는 일을 하진 않을 터.

필시 외압이 있을 것이다. 대체 누가 압력을 행사한 거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가는 와중에 이브는 신문을 찬찬히 읽었다.

[성국의 성녀, 이유리가 제도에 도착하여 첫 데뷔탕트를 치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 번째 헤드라인에 적힌 문구를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데뷔탕트에 참가할 모양이네.’

황제가 초청한 연회이니 그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도 애매했다. 그래도 이렇게 신문에 보도가 나간다는 건, 이때 성녀를 공격하라고 악마들에게 미끼를 던져 주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성국에서 제지도 안 하나.’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었다. 교황청이 하는 일이 대체 뭐가 있는 거지.

하나의 문제로 끈질기게 고민하던 이브는 노아에게 손짓했다.

“온 김에 편지랑 펜 좀 가져와.”

“내가 네 하인이냐?”

“빨리, 빨리.”

그녀의 채근에 노아가 투덜거리며 편지지와 펜을 가져왔다.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연회장에서 유리가 크게 다치는 장면을 떠올린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편지를 작성한 후, 종을 흔들었다.

이어서 하녀 로즈가 들어왔다.

“이걸 루드비히 공작 가문에 보내 주겠어?”

“……? 네, 알겠습니다.”

연을 끊은 가문에 편지를 보내라는 의문스러운 명령이었다. 그러나 로즈는 제 의문을 표현하지 않고 편지를 든 채 방을 나섰다.

“뭔데, 발레리안이랑 정리한 거 아니었어?”

노아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이브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녀는 당연한 사실을 뭐 하러 묻냐는 얼굴로 마주 보았다.

“응, 맞아. 그런데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무릅쓰고 할 말이 있다고?”

노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심쩍은 눈으로 이브를 보았다. 그러다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를 보는 눈빛에 의심이 짙어졌다.

“뭔데? 말 좀 해 봐.”

자꾸 대답을 종용하는 그의 모습에 이브는 귀찮아졌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평소엔 나한테 관심도 없더니.’

그녀의 성인식 이후로 노아가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일이 많아졌다.

생각할수록 이브는 기분이 묘해졌다.

“이 신문 때문이야.”

이브가 신문을 내밀었다. 노아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의아한 시선으로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뭐가 이상한데?”

“성녀가 수도에 왔다는 사실이, 중앙 해역 너머에 있는 너한테까지 닿았잖아. 그게 이상하지 않아?”

“그야 성녀는 완전히 세간의 화제니까…….”

노아는 이상할 게 없다며 반박했다. 그러다 조금씩 어느 부분이 이상한지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맞아. 이건 대대적으로 보도할 일이 아니지. 오히려 알더라도 숨겨야만 하는 일이야. 성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여름제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는 말이야?”

여름과 겨울마다 한 번씩 황궁에서 큰 연회를 열었다. 이번에 유리가 데뷔탕트로 참석하는 건 여름제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그래서 발레리안한테 편지를 보낸 거야.”

“이유리를 지키라고……?”

“응.”

노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이브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멋쩍은 기분이 되었다.

“진짜 성녀는 너 아냐? 그게 아니고선 제 목숨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의 안전까지 걱정하는 게 말이 안 되는데?”

“그럼 너는 유리가 다칠 미래를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을 거란 뜻이야?”

이브는 한편으론 그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일에 누구보다 오지랖을 떨 게 분명한 그가 이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

오히려 이브가 편지를 보내지 않더라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런 관계를 생각해서 무엇 하냐고 나무랄 사람이 노아였다.

“……응. 어차피 남의 일이잖아.”

오히려 노아는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성녀의 안전보다는 제 동생인 이브의 목숨이 그에게 더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차마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겠다.

괜히 솔직하게 말을 했다가 ‘네가 그런 말을?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하는 반응이라도 돌아왔다간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속마음을 목구멍 안으로 삼킨 노아는 이브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설마, 그동안 성녀랑 살면서 정이라도 들었나?”

노아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브는 입을 꾹 다문 채 딴청을 부렸다.

지금 제가 한 일이 얼마나 오지랖이고 쓸데없는 걱정인지 알고 있었다.

‘다 가문의 내력 때문이지…….’

이브는 제 오지랖을 다 에스텔라 가문의 내력으로 돌렸다.

선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에스텔라 가문이 폭삭 망할 뻔한 일이 여럿 있었다.

그 이유가 대부분 보증이거나, 남을 도와주다가 반역에 말려든 것이었다. 사사로운 정으로 패가망신할 뻔한 일이 대마다 한 번씩 꼭 일어났다.

‘그렇지만…….’

이브는 괜히 마음에 찝찝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 * *

공작 성의 연무장에서 수련하던 발레리안은 제 앞에서 벅찬 숨을 고르며 누워 있는 아론을 보았다.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헉헉.”

아론이 공작 성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검을 배우고 싶다기에 발레리안이 흔쾌히 공작 성에 머무르는 걸 허락했기 때문이다.

아론은 기뻐하며 엘라의 친절을 감사히 여겼다.

하지만 발레리안의 의도는 실상 순수한 친절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곳에 머무른 이후, 아론은 훈련을 명목으로 이 드넓은 연무장을 30바퀴 넘게 돌기도 하고 얼차려를 받아야만 했다.

기실 발레리안은 아론에게 화풀이 가까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의 속은 풀리지 않았다.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에스텔라 백작저로 향해서 이브의 얼굴을 보는 것.

며칠째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 불안감이 엄습하고 초조했다.

심복인 칼렙을 시켜서 상태를 보고하도록 했지만, 역시 직접 안전을 확인하는 게 마음이 놓였다.

그때 집사장이 발레리안에게 다가왔다.

“소공작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급한 편지가 아니면 나중에 확인하겠습니다.”

수련 중 몰입이 끊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 발레리안은 딱딱히 말했다.

소공작을 어릴 때부터 보아 왔던 집사장도 그런 그의 성격을 알았기에 난감히 입술을 다물었다. 발레리안이 말했다.

“특히 성국에서 온 편지라면 저녁에 주십시오.”

성국에서 온 편지라면 아마 성녀에 대해 보고하라는 내용일 터였다. 지금 발레리안에겐 귀찮고 관심이 없는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귀찮다는 감정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이브가 떠나고 나서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일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에스텔라 백작저에서 온 편지입니다.”

집사장의 말에 발레리안은 제 손에 있던 검을 팽개치고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에스텔라에서?”

“예, 예.”

집사장은 소공작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자 어색하게 대답했다.

집사장에게 편지를 빠르게 받은 발레리안은 곧바로 편지를 뜯어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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