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50화 (50/100)

50화

“우와! 그 소문의 이브 에스텔라라고?”

그러나 아론의 반응은 이브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그래서 이브는 더욱 당황해 눈만 끔뻑거렸다.

“어쩐지 외모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론은 그저 화제의 인물을 목격한 것처럼 순수하게 눈을 반짝 빛내고 있었다. 이브는 어색하게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이런 식의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싫어하지 않아서 안심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그 모습을 보던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의외네. 아론이라면 이브를 싫어할 줄 알았거든.”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한 말을 한 건, 이브가 아니었다.

‘발레리안.’

그였다. 이브는 저도 모르게 발레리안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상히 말을 꺼내었지만, 그는 왠지 그 점이 못마땅한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뭐지?’

이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발레리안은 아론이 그녀를 싫어하길 바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이브는 그런 그를 흘겨보았다.

‘수도에 가자고 한 이유가 이건가?’

만인 앞에서 비난거리가 되라고? 이브는 묘한 오기가 치밀었다.

‘내가 그깟 비난에 끄덕하나 봐라.’

이브는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남녀 간에 만나기도 헤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내가 그런 거로 이브를 싫어하겠어? 우리는 친한 친구인데.”

아론은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브를 보고 있었다.

이브는 아론의 말에 일순 감동하여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라의 광팬인 아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더욱 몰랐기 때문이다.

어디서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브는 당황하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이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발레리안은 이상하게 속이 뜨겁고 심사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아론은 이브의 환심을 사기 위한 간악한 뱀처럼 보였다. 차라리 아론이 이브를 싫어하길 바랐다. 그 증오를 노골적으로 비출수록 좋았다.

그러면 이브가 상처는 받겠지만, 발레리안은 이브와 아론이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더욱 싫었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소유욕이었다.

‘이런 내 속마음을 이브가 알게 된다면.’

아마 이브는 그런 자신을 경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옛날엔 그걸 두려워해서 만인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몹시 달라졌다.

이브가 다른 남자랑 시시덕거리는 광경을 상상하면 속이 뒤집히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그 남자를 죽이고 싶어졌다.

자비에와 이브가 연회에서 약혼 발표를 할 때부터, 발레리안은 스스로를 자제하고 절제할 수가 없어졌다.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챈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유리와 아론이었다.

아론은 미묘한 웃음기가 있는 눈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고 유리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리안이 이브한테 질투하고 있어.’

마을에서 백날 아론이랑 친하게 지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발레리안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대화 하나로 질투심을 숨기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목격하니 열패감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말의 휴식을 위해 숲길에 잠시 마차를 정차했다.

발레리안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주변을 잠시 살피러 나갔고, 아론은 마차 안에만 있으니 몸이 찌뿌둥하다며 마차를 나갔다.

“이브 언니, 데뷔탕트 준비는 어떻게 할 거야?”

유리가 천연스럽게 물었다. 이브는 그녀의 물음에 당황했다.

“데뷔탕트……?”

“응, 이브 언니도 당연히 나랑 같이 참여하는 거 아니었어?”

“난 그런 자리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

뭐 좋을 게 있다고 그런 곳에 가나. 가십거리 삼아서 그녀를 껌처럼 열심히 씹어 댈 게 분명했다.

“언니, 언제까지 숨어서 살 수는 없잖아. 나와 함께 가면 그래도 언니를 나무랄 사람은 없을 거야.”

유리는 걱정하는 듯 이브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전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잠시 원작을 되짚던 이브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성녀의 첫 데뷔탕트.’

거기서도 사건이 터졌다. 성국의 철저한 보호 아래 있던 유리가 제도에 올라오면서 그곳에 있던 악마들이 그녀를 죽이려고 한 사건이었다.

잠시 발레리안이 유리의 곁을 벗어난 사이, 귀족으로 위장한 악마들이 유리를 습격한다. 원작의 초입에 가까운 내용이라 비교적 뚜렷하게 잘 기억이 떠올랐다. 이브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리도 이번 데뷔탕트는 가지 않는 게 낫지 않아? 위험하기도 하고…….”

“리안이 있는데 뭐가 위험해?”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브는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란 건 방심하다가 일어나는 거니까.”

“악마라도 숨어 있다가 나타날 거란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데뷔탕트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은 악마들이 쉽게 숨을 수 있어서 유리를 노리기에 최적의 장소이기도 해.”

유리는 움찔했다. 이브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악마는 무서운데.’

유리는 고민했다. 하지만 발레리안과 나란히 참석하는 첫 연회였다.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유리의 시선이 마차 밖에 있는 발레리안에게 향했다.

그 순간, 유리는 깨질 듯한 두통에 고개를 숙였다.

“으윽!”

“유리야, 괜찮아?!”

이브는 깜짝 놀라 유리를 살폈다. 한 달간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유리는 이따금 두통을 앓았다. 여기 올 때 기억을 몽땅 잃어버리면서 시작된 두통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마음이 쓰였다.

‘기억도 없어서 얼마나 무서울까.’

이브는 그래도 가족이 있었지만, 유리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유리가 발레리안에게 의존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신전 사람들은 잘 보살펴 주지 않는 건가?’

혹시 몰라서 물었더니 유리는 그저 신전 사람들이 잘 대해 준다고만 말했다. 이브는 그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딘 마을에 있는 걸 왜 제지를 안 하지?’

으레 신전 사람들이 성녀를 걱정한다면 바로 성국에 데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발레리안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심하고 마을에 장시간 머무르도록 내버려 둔다는 게…….

‘마치 성국이 유리가 발레리안한테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원작을 읽을 때는 크게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유리의 입장에서만 작품을 읽어 왔던 탓이다. 한데 제삼자의 입장에서 유리의 주변 상황을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가 여전히 두통으로 고통스러워하자, 이브는 재빨리 발레리안을 불렀다.

“유리가 아파!”

그러자 그가 빠르게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유리의 손을 잡고 엘라의 힘을 흘려 보냈다. 유리가 두통을 앓을 땐, 엘라의 힘이 필요했다.

“무슨 신병이 이렇게…….”

이브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책에서 읽었던 거랑은 다르게 너무 리얼해서 차마 말이 안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리의 두통 빈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 * *

에스텔라 백작저로 돌아오자, 에스텔라 백작 부부는 이브를 귀신인 양 바라보았다.

백작 부부는 정원에서 나란히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 흔적을 보던 이브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좋은 시간을 보내고 계셨네요.”

여전히 정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백작 부부는 당혹스러운 시선을 주고받다가 이브에게 곧장 다가왔다. 행여 귀한 딸이 다치기라도 했을까 노심초사한 눈치였다.

“이, 이브! 이게 꿈이 아니란 말이니?”

“여기는 어쩐 일이더냐! 혹시 사람들이 널 괴롭히기라도 했느냐?”

백작 부부는 딸의 귀환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린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걱정이 흐르는 눈빛에 이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녀는 정원을 보다가 티 테이블에 자연스레 앉았다.

“성녀와 같이 올라왔다던데……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 것이냐?”

아버지가 덜덜 떨리는 얼굴로 이브를 보았다. 어머니보다 더욱 새가슴인 아버지는 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말에 긍정하는 것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성녀 이유리가 제 비밀을 함구해 주기로 했어요.”

“……그 말을 믿는다는 말이냐?”

“믿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아버지의 의심 어린 눈빛에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작은 잠시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브는 왠지 그 침묵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구태여 수도에 올라왔다는 뜻은…….”

그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우리의 복수를 할 마음이 생긴 게로구나!”

“그런 마음 쥐뿔도 없거든요!”

이브는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아버지의 발언을 딱 잘라 부정했다. 아직도 저런 생각을 하다니!

‘이래서 우리가 원작에서 조연을 못 벗어나지!’

이런 식으로 조연들이 주인공들의 힘을 과소평가하다가 장렬하게 퇴장당하는 건 흔한 레퍼토리였다. 지금 그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거나 다름이 없어서 속이 터졌다.

‘우리 가족들이 악역 조연이라니…….’

묘하게 어울려서 더 열받았다. 이런 대책 없는 면까지 그랬다.

차라리 최종 보스라면 면이라도 설 텐데. 이브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