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유리와 발레리안이 마을에 온 지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이브와 유리는 부쩍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리는 이 세계에서 만난 유일한 고향 출신의 사람이었고, 전생을 기억한 이브에게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알게 모르게 친숙함과 친밀감을 느꼈다.
‘요새 유리랑 아론도 부쩍 친해졌지.’
아무래도 또래 친구가 이 마을에 많이 없다 보니 친해진 모양이었다.
가끔씩 유리가 발레리안이 나타날 때 쭈뼛거리며 아론에게 웃는 걸 보면 살짝 그 의도가 예상되기도 하지만.
아론을 이용해서 질투심을 자극할 생각을 하다니-.
‘발레리안을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러나 아직 애라 그런지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데 어색하고 미숙함이 보였다. 발레리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리의 행동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속으론 질투심에 난리 났을지도 모르는 거지.’
겉과 속이 같은 줄 알았던 발레리안이 이토록 제 속내를 능숙히 감추는 남자인 줄 누가 알았겠나. 이브도 속은 기분이었다.
“이브 언니, 나는 이제 곧 데뷔탕트를 치르러 수도에 올라가 봐야 해.”
발레리안이 텃밭에 줄 물을 뜨러 간 사이, 유리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브는 반가우면서도 조금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외로움을 타지 않는 사람이라도 함께 사는 사람이 있다가 없어지면 허전해지는 법이다.
“혹시 이브 언니, 나랑 같이 수도에 올라갈 생각은 없어?”
“수도에……?”
유리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이브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일자로 굳혔다.
“응! 이브 언니의 가족들도 다 수도에 있잖아. 나 때문에 가족이랑 떨어져서 살아야 할 이유도 없어졌으니까 수도에 있어도 상관없는 거 아니야?”
“……그건 조금 더 고민해 볼게.”
유리의 말은 맞았지만, 이브는 회의적이었다. 수도로 올라가는 건 아직도 심리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이제 겨우 제도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수도로 올라가라니…….
‘나라고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성과 가까운 곳에서 머무른다는 게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유리가 그녀의 비밀을 함구해 준다고 한 상태인데, 계속 도망자로 사는 것도 애매했다.
애초에 그녀가 제 비밀을 지켜 주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사는 것도 힘든 일이 되었을 터.
“수도로 돌아와.”
문득 발레리안이 수도로 올라가자고 말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이브는 그때 자신이 죽는 꼴을 보고 싶으면 데려가라고 협박했다.
그렇게 말한 입장에서 말을 바꾸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수도에 올라가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
이젠 수도에 올라가는 가장 큰 걸림돌이 유리가 아닌 발레리안이 되었다. 이브가 고민하는 기색을 눈치챈 유리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브 언니, 난 언니가 내 친구로서 꼭 수도에 와 줬으면 좋겠어.”
“왜?”
친구로서 수도에 와 달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이브 언니가 혹여 마법사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유리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브를 보았다.
“내가 이브 언니의 무고함을 증명해 주고 싶어. 그런데 언니가 이렇게 먼 곳에 살고 있어서 내가 미처 도와주기 전에 언니가 잘못되면 어떡해. 난 그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거야.”
이브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같이 수도로 가자, 응? 이브 언니.”
“……그렇지만.”
이브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성녀의 말 한마디면 그녀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브 언니가 만약 날 믿고 와 준다면 그 믿음에 꼭 보답할게.”
유리의 진심 어린 눈빛에 이브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나 유리를 보는 루비색 눈동자에는 티끌만 한 의심의 빛이 스쳤다.
‘만약 유리의 말이 진심이 아닌 거짓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 더 위험했다.
이유리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그 거리가 가까울수록 좋았다.
이브가 수도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굉장히 아쉬워했다.
“우리 복덩어리가 이렇게 가 버린다니…….”
“아이고, 내년 농사는 어떻게 한담.”
그 소식을 유리에게 뒤늦게 접한 발레리안은 묘한 시선으로 이브를 보았다.
“우리의 농사는 앞으로 누가 책임지나.”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샬럿 언니가 농사에 중요해요?”
“그럼요! 우리 마을은 샬럿이 왔던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맞아요! 샬럿이 얼마나 날씨를 잘 맞히는지 몰라요. 그리고 한동안 가뭄에 시달리나 싶으면 타이밍 좋게 비도 내리고…… 이게 전부 샬럿이 온 뒤에 일어난 일이라니까요? 우리 마을에 온 신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는데. 흑흑.”
성녀인 그녀보다 이브가 떠나는 게 더 아쉬운 듯 보였다.
유리는 살짝 심통이 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 봤자 마법을 쓴 거겠지.’
이브가 마법사라는 게 밝혀지면 저 마을 사람들은 곧바로 이브를 배척할 터였다. 일순 입이 근질거렸지만, 유리는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아무리 그래도 죄 없는 이브의 정체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밝힐 순 없는 노릇이다.
‘날씨를 잘 맞힌다고.’
발레리안은 이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간 그녀가 날씨를 맞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돌연 날씨를 잘 맞히게 되었다니 무언가 이상했다. 일전에도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 저도 따라갈래요!”
그때 아론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론의 부모인 로만 부부가 깜짝 놀랐다.
“아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예전부터 수도에 올라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농사가 적성에 맞는다며 버티던 아들이었다. 로만 부부는 아론의 발언에 당황했다.
“저도 엘라 님처럼 늠름한 기사가 되고 싶어졌어요!”
마치 열 살짜리 소년이 동경하던 꿈을 이루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런데 아론이 저런 말을 하니 위화감이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로만네, 한 번쯤 보내 줘도 괜찮지 않겠소?”
“그래, 평생 여기서 썩었는데 한 번쯤은 보내 줘도 괜찮지 않겠수.”
여기서 썩었다니……. 굉장히 직설적인 말이었다. 주변 사람의 설득에 결국 로만 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의 눈이 반짝 이채를 띠었다.
“멋진 기사가 되어서 돌아올게요!”
이브는 그의 포부 넘치는 인사에 웃음을 참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발레리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브는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한 입 갖고 두말한 사람이 되어 버렸네.’
그렇게 죽어도-죽어도 수도에 안 가겠다고 했는데, 따라간다고 하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이브는 부끄러워서 빠르게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곧바로 따라 들어온 사람을 보곤 깜짝 놀랐다.
“네, 네가 왜 들어와!”
발레리안이었다.
“……?”
그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곧이어 유리가 마차에 올랐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당황한 이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도 그 안에 있는 이브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앗, 이브 언니. 여기…… 내 마차야.”
아! 이브는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마차들이 전부 하얀색이라서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쩐지 쿠션감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성녀 전용 마차였던 모양이다.
“아, 미안해. 내가 착각한 모양이야. 빨리 나갈…….”
이브가 마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발레리안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왕 탄 김에 같이 타고 가.”
이브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유리와 발레리안 사이에서 마차를 타고 가라고? 심지어 발레리안을 향한 유리의 마음을 알고 있는 상태에선 더더욱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그래! 이브 언니, 같이 타고 가자!”
유리가 밝은 어조로 같이 타고 가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아론이 혼자 타면 심심할 텐데…….”
이브는 어떻게든 변명을 해서 발을 뺄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발레리안이 눈썹을 추켜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데…… 착각이겠지?
“그러면 아론도 같이 타면 되겠네.”
발레리안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브는 난감한 시선으로 유리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성녀의 전용 마차인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탑승하면 불편할 게 뻔했다.
그러나 유리는 개의치 않는 듯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 같이 타고 가자! 가는 동안 심심하지 않고 좋겠다!”
참으로 긍정적인 아이였다. 이브는 한숨을 쉬며 엉거주춤 떼었던 엉덩이를 의자에 다시 붙였다. 이어서 아론이 마차에 들어왔다.
“아! 여기 다 모여 있네? 헉, 엘라 님까지!”
아론은 영광스럽다는 듯 황홀한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보았다.
발레리안은 능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유했다.
“제 옆에 앉으시면 됩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아론은 아직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뺨을 잡아당겼다. 이브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선 그만 떨고 앉아.”
“옙.”
아론이 자리에 앉자,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던 이브는 저 자신이 수도로 향한다는 걸 실감했다.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떠났는데.’
세상일은 모른다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 참, 여기서도 계속 샬럿 언니라고 불러야 할까?”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론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어음…… 그게.”
유리가 난감한 듯 이브를 보았다. 이브는 아론을 잠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숨길 수 없으니까 그냥 내 이름으로 불러 줘.”
“으응, 그럴게. 이브 언니.”
“……이브? 설마 이브 에스텔라?”
아론의 당황한 시선이 이브에게 향했다. 이브는 자연스레 저에게 향할 비난의 눈초리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