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때 뒷정리를 마친 이브는 비교적 빠르게 방에 들어왔다.
설거지는 제가 잘한다면서 유리가 설거지 담당을 자처하는 바람에 이브가 할 일이 사라진 것이다.
‘생각보다 되게 싹싹하네.’
막연하게 피해야 할 존재로 생각했던 유리의 이미지가 이브의 안에서 조금 더 친숙하게 자리매김했다. 전생에도 지금도 동생이 없지만, 동생이 있다면 딱 저런 느낌이 아닐까?
자연스레 제 방의 문을 닫은 이브는 곧 멈칫했다.
지금은 저녁을 넘긴 한밤중.
불조차 켜지 않은 방은 캄캄했다. 그래서 방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있는 듯한 직감이 들었다.
‘누구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눈을 감고 집중하니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절대 그녀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이브는 일순 잊고 있던 마법 주문들을 빠르게 상기하며, 조심스레 협탁에 있던 양초에 불을 붙였다.
삽시간에 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발레리안, 네가 왜 내 방에 있어?”
이브는 제 방에 있는 발레리안을 보고 당황했다. 저녁 식사를 끝낸 뒤 그의 행방이 묘연해 의아했는데, 여기 있을 줄은 예상도 못 했다.
‘그럼 그 힘이 발레리안의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마력을 집중해서 그의 힘을 직접 가늠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발레리안을 이기는 건 절대로 불가능해.’
이브는 정말 정체가 밝혀지면 꼼짝없이 발레리안한테 죽을 거란 걸 확신했다. 그녀는 대답이 없는 발레리안을 재차 불렀다.
“…….”
그러나 역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왠지 불안함이 엄습했다. 이브는 망부석처럼 굳은 채 서 있는 발레리안에게 다가갔다. 그가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그가 보고 있는 게 뭔지 제 눈으로 확인했다.
“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바로 새벽에 자신이 꾸린 짐들과 지도였다.
지도엔 그녀가 도망갈 장소와 도착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
이브는 빠르게 그의 손에 들린 지도를 빼앗았다.
“왜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오는 거야?”
그녀는 발레리안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행동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더욱 불안했다. 이브는 그가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브.”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두운 방 안의 작은 불빛에 푸른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이브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브는 눈앞에 벌어진 일을 신경 쓰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이브의 팔을 붙잡은 발레리안의 얼굴에 비소가 떠올랐다. 마치 그가 그녀에게 비겁자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브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녀를 뭉근히 지켜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잖아. 어떤 식으로든 루드비히는 널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루드비히 가문에서 못 할 일은 없었다. 이브는 그의 딴에는 인내심을 발휘한 거란 걸 인정했다.
“조금만 더 나한테 아량을 베풀어 줄 생각은 없는 거야?”
“그 아량이 이걸 모른 척하는 거라면.”
발레리안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웃고 있었지만 푸른 동공은 선득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죽어도 안 돼.”
“…….”
이브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브의 등 뒤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이브는 고개를 돌렸다. 문이 어느새 열려 있었다.
‘내가 문을 닫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브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수습하느라 열린 문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다시 발레리안에게 시선을 돌린 이브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그럴 일은 없어.”
“……?”
발레리안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서렸다. 그런 그를 향해 이브가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거든.”
일단 당분간은.
유리가 진실을 폭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그에 대한 믿음을 주겠답시고 곁에 머무르고 있는 거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다.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셈이 뭔지 이브도 알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유리 옆에서 알아낸 건 딱 하나의 사실뿐이었다.
‘발레리안을 좋아하고 있어.’
발레리안을 보는 유리의 눈빛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완전히 첫눈에 빠진 소녀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면 단순한 질투심 때문에 머무르는 걸 수도.’
이브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유리의 마음이 발레리안에게 있다면 그냥 둘이 손잡고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정말 쓸데없고…… 부질없는 짓을 하는구나, 발레리안.”
이브가 힘없이 말했다. 발레리안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의 말은 맞았다. 그런데 그 말을 코앞에서 들으니 심사가 어느 때보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이브의 팔을 잡은 발레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맞아, 내가 제일 잘하는 짓이지.”
그녀의 비아냥거림을 맞받아치는 그를 눈앞에 둔 이브는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일이 단단히 꼬인 것 같았다.
* * *
한편 급하게 집 밖으로 나온 유리는 집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서 숨을 골랐다. 크게 널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빠르게 뛰는 가슴과 달리 머리는 차갑게 식어만 갔다.
‘방금 그 광경은…… 꿈이겠지?’
아까 그 모습은 전혀 믿기지 않았다. 이상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
유리는 제 뺨을 꼬집어 봤지만 이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만 재차 깨달았다.
‘정말 리안이 이브 에스텔라 방에 들어갔다고……?’
이브 에스텔라가 발레리안한테 매달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 반대의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이브의 팔을 잡던 장면을 떠올린 유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상황이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아니야……. 발레리안은 나만 봐야 하는데?’
유리는 혼란스러웠다.
이 세상이 제가 알던 바와 잘못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성국에 있을 땐, 신도들이 언제나 발레리안이 그녀의 곁에 있어 줄 거라 그랬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눈앞에서 확인한 기분이었다.
정처 없이 마을을 돌아다니던 유리가 누군가와 부딪쳐 넘어졌다.
“앗! 괜찮으세요?”
유리는 순간 어두운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겁을 먹었지만, 곧 친절하게 내밀어진 손에 안심했다.
“하하, 여기서 성녀님을 뵙다니 완전히 횡재네요! 전 아론이라고 해요!”
“아아…….”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한밤중에 이렇게 급하게 뛰어다니시고, 여기 길이 조금 험해서 자칫하면 넘어지거든요.”
“아무, 아무 일도 아니에요.”
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이 없다고 얼버무렸다.
“아, 혹시 엘라 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나?”
“어떻게 알았어요? 헙.”
유리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에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론이 웃었다. 일순 달빛 아래 그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빛났지만,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유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혹시 짝사랑?”
“짝사랑 아니거든요! 아마도…….”
유리의 말이 점차 힘을 잃어 가자 아론이 흥미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엘라 님의 마음에 확신이 없는 거라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어떻게요?”
“누군가의 마음을 확인하기엔 상대를 자극하는 방법이 최고죠.”
아론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가령 질투를 유도한다든가?”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유리의 눈에 반짝 이채가 도는 걸 눈치챈 아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
“다 성녀님의 재량이죠. 지금 배가 고프신 건 성녀님이니까.”
아론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리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내내 이브와 발레리안의 거대한 마력에 눈이 가려져서 몰랐던 점이었다.
“근데 왜…… 당신한테서 마력이 느껴지죠? 당신도 마법사인가요?”
“아니요, 저는 마법사는 아닙니다. 성력을 조금 타고났을 뿐이죠.”
성력……?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간 검은 색으로 보였던 마력이 지금은 하얗게 보였다. 일반인이 성력을 타고나는 경우는 드물지만 없는 일도 아니라고 했다.
“좋아요.”
아론의 말을 믿은 유리는 아론의 손을 잡았다. 아론의 눈빛에 섬찟한 환희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