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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47화 (47/100)

47화

“유리!”

예상대로 집에 들어온 발레리안은 한달음에 유리 앞에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이브는 말없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유리가 비웃듯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그 미소를 발견한 이는 없었다.

“빨리 성국으로 돌아가자.”

발레리안이 다급히 말했다. 신전 밖에서 유리가 잘못된다면 정말로 신의 분노를 크게 사게 될 것이다. 성녀를 보호하지 못한 성국에 진노가 내려진다면 악마와 마수들은 더 활개를 치게 될 터.

그럼 제국의 평화도 끝이다. 그 점을 알고 있기에 아리엘은 유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난리가 났다.

“안 돼! 난 여기 있을 거야.”

유리가 곧바로 이브의 곁에 찰싹 붙었다. 발레리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유리 옆에 네가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노골적인 거부감에 이브는 당장이라도 둘이 손잡고 나란히 꺼지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리가 이곳에 머무르길 원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이었다. 이브는 눈썹을 팔랑이며 싱긋 웃었다.

“맞아. 유리는 여기 있을 거야. 미안하게 되었어, 발레리안.”

뜻대로 굴러가지 않아서 유감이네. 그녀는 속으로 작게 빈정거렸다. 그런 그들을 본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묘하게 짙어졌다.

“……이브. 유리가 여기에 왜 있는 거지?”

그 질문을 제가 받을 줄은 몰랐기에 이브는 당황했다. 딱히 떠오르는 핑계가 없었다. 그러자 유리가 덥석 질문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브가 내 열렬한 팬이거든!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보내와서 얼굴이 궁금해서 내가 직접 와 본 거야.”

발레리안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가 곧 의심으로 물들었다. 그의 시선이 이브에게 꽂혔다. 그 말이 사실이냐는 무언의 눈빛에 이브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성녀님의 열렬한 팬이야.”

이렇게 된 거, 괜한 의심을 살 바에야 완전히 속이는 게 나았다.

이브는 바로 곁에 있는 유리의 팔을 잡고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발레리안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유리, 나는 성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으응? 그렇지! 리안은 내 기사니까.”

유리는 배시시 웃었다. 그에 대한 완벽한 신뢰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이브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유리를 처음 목도했을 때보다, 발레리안이 나타난 지금이 더 마음이 불편했다.

‘보호할 의무…….’

이브는 이상하게 몰려오는 불길함에 발레리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부디 제가 생각하는 그런 전개는 아니길 바랐다.

“여기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면 나도 여기 있겠어.”

“……뭐?!”

이브는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미쳤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제 옆에 머무르겠다니,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 왔다.

“리안! 여긴 괜찮아! 헬리엇도 있고, 다른 기사님들도 있는걸?”

유리는 마음이 급해졌다. 기껏 이브와 발레리안의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 했는데, 이런 식으로 접점이 생기면 곤란했다.

그러나 이브의 낭패 어린 낯빛을 본 유리는 그 순간 생각을 바꿔 먹었다.

‘아니야. 이건 기회일 수도.’

자신과 발레리안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면 이브 에스텔라를 금방 단념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면 발레리안의 마음을 흔드는 일도 더는 생기지 않겠지!

“집 앞에 있는 기사들의 실력도 나쁘진 않지만, 내가 직접 유리를 지켜야 안심할 수 있어.”

발레리안이 말했다. 유리는 그 말에 설득당한 척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련의 상황에 이브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게 정말 실화야?’

성녀 이유리와 같이 살게 된 것도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발레리안까지 합세한다니. 이브는 신이 정녕 자신을 버린 게 아닌가 의심했다.

‘신은 나 따위는 진작에 버리긴 했지.’

모두에게 배척받는 마법사로 태어난 것 자체로 이미 신에게 버려졌다는 건 확정이긴 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성녀님이 우리 마을에 머무르신다고?!”

“어머! 하루아침에 이게 웬 경사야!”

아닌 밤중에 갑자기 성녀가 와서 자연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고 선택한 마을이 바로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니 기쁠 만도 했다.

“이제 성녀님이 머무르던 마을이라고 입소문이 나면 우리 마을의 과일들은 불티나게 팔리겠구나!”

그리고 그 기쁨의 원천은 ‘돈’에 있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돈에 관심 없으리란 고정관념은 버려라.

이쪽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이 마을에 젊은이들이 없는 이유는 마을 주민들의 자녀들이 전부 제도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 자녀들은 각자 제도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거나, 가게를 차려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숨은 부자들이지.’

이제 말년이라고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 지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그해 농사가 망해도 크게 위태롭지 않았다. 그저 작물에 대한 애정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었다. 애정으로 지은 농사가 돈까지 가져다주면 애정은 배가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유리는 악수해 달라는 나딘 마을 사람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들 흔쾌히 제 악수를 받아 주는 성녀의 모습에 감동했는지 기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하이고, 내 인생에 엘라 님과 성녀님을 동시에 뵐 날이 올 줄이야!”

“서, 성녀님…….”

아론은 이미 넋이 나간 얼굴로 이유리를 보고 있었다. 성녀를 보는 눈빛이 기이할 만치 황홀해 보였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첫눈에 반한 청년이었다. 그 모습에 이브도 유리를 흘긋 보았다.

‘……반할 만도 해.’

유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구비와 달랐다.

오묘하면서 깊고 어두운 머리 색과 눈동자. 다른 세계에서 온 듯, 제국민에겐 볼 수 없는 오밀조밀하면서 작은 이목구비가 한데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성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그녀가 성녀라는 걸 눈치챌 만큼, 그녀의 존재감은 두드러졌다.

이브는 문득 그 옆에 서 있는 발레리안을 보았다. 유리가 밤의 여신을 형상화한 것 같다면, 발레리안은 찬란한 태양을 남자로 빚어 놓은 것 같았다.

그 둘의 분위기가 상극이었지만, 그 점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멍하니 그 둘을 보고 있는데, 발레리안의 시선이 이브에게 향했다. 시선이 마주친 이브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내가 왜 시선을 피하는 거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브는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 눈앞에서 저 둘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발레리안의 시선이 그런 이브의 뒷모습에서 진득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스쳤다. 이브의 동요를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그 동요가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눈치챈 발레리안은 일면 기쁘기도 했다. 이브의 마음속에 아직 자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이브에게 달려가서 말해 주고 싶었다.

‘나한테는 오직 이브밖에 없어.’

-라고.

유리와 제 사이를 보고 오해하며 질투하는 이브에게 제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방식으로라도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는 저급한 생각도 들었다.

충돌하는 양가감정 사이에 갈등하던 발레리안의 마음은 조금 더 비겁한 쪽으로 기울었다. 그간 그녀가 그에게 상처 주었던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리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런 그를 보던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유리는 그 시선을 쫓아 따라갔다.

이브 에스텔라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이브 에스텔라를 보고 있던 거야?’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드는 질투심에 휩싸여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흠칫 놀랐다. 그런 사소한 거로 감정이 상하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오 년 동안 매일 보아 왔던 약혼녀인데 어떻게 깔끔하게 잊어버릴 수 있겠어.’

유리는 그리 합리화하며 제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맑게 웃어 보였다.

* * *

그날 저녁.

이브의 집으로 돌아온 유리는 맛있는 음식 냄새에 군침을 삼켰다.

“우와, 이게 무슨 냄새예요?”

“내가 별로 요리를 못해서 그냥 간단하게 만들어 보았어요. 식기 전에 어서 들어요.”

이브의 시선이 유리의 뒤에 있는 발레리안에게 향했다.

‘너도 거기 서 있지 말고 먹어.’

그녀의 눈빛을 읽은 발레리안은 유리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배고팠던 유리는 허겁지겁 이브가 만든 음식을 먹었다.

“와, 너무 맛있어요!”

유리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동안 신전에서 먹은 음식들은 느끼하거나 간이 약했다. 그러나 이브가 만든 음식은 적당히 매콤하고 간도 딱 맞았다. 완전히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나도 느끼한 건 잘 못 먹거든요.”

이브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저리 복스럽고 맛있게 먹어 주는 사람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맵다고 얼마 손도 안 댔지.’

마을 사람들은 이브의 음식을 한번 맛보고는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이 끝났다. 이브가 그릇들을 정리하자 유리가 급히 일어났다.

“앗! 뒷정리는 같이 해요!”

발레리안은 이브를 따라 도우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곧바로 그는 시선이 닿지 않는 틈을 타 이브의 방에 들어간다. 혹시나 그녀가 그에게 숨기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탁!

빠르게 이브의 방을 수색하던 그는 침대 밑에 무언가 있다는 걸 깨닫고 밖으로 끄집어 꺼내었다.

겉보기엔 여행 짐이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 가져온 짐인가 생각했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드르륵.

여행 가방의 지퍼를 연 발레리안은 그 안에 꾸려진 짐을 보고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이건 분명히 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짐들이었다.

그는 그 옆에 있는 지도를 보았다.

도착 예정일까지 적힌 지도. 진실을 빠르게 눈치챈 그의 눈빛이 서늘히 빛났다.

이브가 그 몰래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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