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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46화 (46/100)

46화

한편 이브를 마주한 유리는 당황한 시선으로 이브를 보았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요동치는 마력을 보는 건 발레리안 이후로 처음이었다.

“당신, 설마…….”

마법사?

대주교 아리엘이 그녀에게 마력을 가진 사람은 마법사와 악마, 성력을 가진 일부 신도밖에 없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악마의 마력은 본디 보자마자 불쾌하며 선득한 느낌이 들어서 모를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제 앞에 있는 여자는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성국에 있던 신도들의 성력과는 전혀 다른 궤를 가지고 있었다.

유리가 멍한 얼굴로 입을 벌리는 사이, 이브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유리 뒤에 기사 몇몇이 있었다. 그중엔 헬리엇도 있었다. 이브와 시선이 마주친 헬리엇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헬리엇이 알려 준 거구나.’

이브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리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는 그런 그녀를 불안한 시선으로 보았지만, 유리가 말하지 않겠다며 수신호를 보낸 뒤에야 그녀의 입을 막았던 손을 풀었다.

“저 잠시, 안에 들어가 있을게요.”

유리가 성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당연하게도 성기사들은 혼자 들어가는 건 보안상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혼자는 위험합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런 그들을 향해 유리는 완강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이브가 말했다.

“저는 성녀님의 팬이에요. 절대로 성녀님을 해치거나 그러진 않을 거예요.”

이브는 곧바로 유리의 열렬한 팬인 척 눈을 반짝였다. 최대한 발레리안을 보던 아론을 흉내 내면서.

“정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그럼 잠깐만 있다가 나오셔야 합니다.”

“그럴게요.”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갔다. 집에 이브와 유리가 단둘이 남았다.

“제 이름은 이유리예요.”

“네, 알고 있어요. 성녀님이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이브는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없는 척하는 건데, 덫에 걸린 토끼의 기분이 이런 걸까.

이윽고 유리가 대답했다.

“음…… 강렬한 마력의 기운에 이끌려서 왔어요.”

“마력의 기운이요?”

이브는 당황했다. 자신의 마력이 성국까지 닿는다고?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원작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설정이 있다면 원작에서 내 등장이 뒤에 있을 리가 없는데.’

이브는 이유리가 지금 제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한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리안 때문에 왔다고 말할 수는 없어.’

눈앞에 있는 이브 에스텔라가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쉬이 속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묘하게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는데.’

이 앞에 있는 이브 에스텔라는 그녀가 성녀라는 사실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브 에스텔라는 마법사였다.

그렇다면 제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인데, 그녀 앞에서 비굴하게 굴지도 않았다.

‘그게 마음에 걸려.’

태생이 뻔뻔한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그 성격으로 발레리안을 붙잡는 거라면 마음이 약한 발레리안이 흔들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주제 파악을 시켜 줘야지.’

유리는 이브의 옆에 붙는 척하면서 그 둘 사이를 더욱 갈라놓을 작정이었다. 그러다 이브가 그를 포기한다면 마음을 넓게 쓸 아량은 있었다.

‘발레리안은 내 기사야.’

유리의 마음속에 기이한 소유욕이 스치듯 감돌았다.

그런 유리를 보며 이브가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들어온 거예요?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유리는 그녀의 말을 이해해 보려 애쓰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음……. 어차피 날 해치면 이브와 이브의 가족도 온전치 못할 테니까…… 절 해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브는 그녀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찰나의 시간 내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더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위험할 거라기보단…… 마법사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신기해서요!”

유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이브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어린 호기심을 읽어 낸 이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에 대한 편견은 없는 걸까?

‘하긴 이유리가 여기서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의심스럽다고 해도 이유리를 구슬려서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브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면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앗! 뭔데요?”

“제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비밀로 해 주세요. 절 포함해서 제 가족의 생사가 달린 일이에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이브는 허리까지 굽히며 유리에게 부탁했다. 유리는 그런 이브의 모습에 허둥지둥하며 당황했다.

“그리할 테니까 얼른 일어나세요……!”

유리는 그제야 이브가 왜 과거에 그런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설마 정체를 들킬까 봐…… 여기로 오신 거예요?”

유리는 이브를 놀란 시선으로 보았다. 허리를 세운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 때문에 여기로 도망친 건가?’

갑자기 유리는 마법사라는 사실 하나로 이렇게 도망자로 사는 이브가 불쌍해졌다.

하지만 이브가 발레리안을 붙잡는 이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마법사였다면 엘라는 더욱 거리를 두었을 텐데.

‘아직 리안한테 마음이 있는 건가?’

유리는 괜히 초조해졌다. 한편 이브는 그런 유리를 두고 고민했다.

‘사람의 약속만큼 얄팍한 게 없는데.’

지금 당장은 유리가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성국에 돌아간다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완전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제 품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보증이라도 받아 내고 싶다.’

그런데 유리가 보증으로 제시할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리도 없었다. 설사 가지고 있다 쳐도 그걸 주면서까지 비밀을 지켜 줄 리는 더욱 만무했고.

그때 유리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법사님이 제 약속을 믿기 힘들 테니까 믿음이 생길 때까지 여기 머무르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리는 정확히 이브의 마음이 어떠한 건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 의도를 꼭꼭 숨긴 채 천연스레 제안을 건넸다.

“……여기에 머무른다고요?”

이브는 그녀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마치 제 속마음을 읽은 듯한 제안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대로 바로 성국에 돌아가면 마법사님을 고발할까 봐 걱정하실 것 같아요.”

유리는 이브가 걱정하던 바를 제대로 짚고 있었다. 유리의 제안은 분명히 이브에게 나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아 불안감에 떠는 것보단 유리가 제 옆에 머무르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그러나 조금 이상했다.

‘이렇게 친절을 베푼다고?’

이브는 잠시 원작을 떠올렸다. 유리가 만인한테 착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긴 했다. 그 점에 발레리안이 점점 스며들어서 그녀에게 푹 빠졌으니까.

그래도 초면에 만난 사람의 곁에 있겠다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심지어 성녀가 여기에 온 연유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제안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이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배시시 웃으며 기뻐했다.

“아, 이런 시골 생활도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신전에 매일 갇혀 지내니까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이브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대주교님이 유리의 외출을 허락해 주셨어요?”

대주교 아리엘의 성격상 유리에게 이런 먼 곳까지 외출을 허가하지 않았을 텐데. 푸근하고 따뜻한 인상과 다르게 아리엘은 철저하게 성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분이라는 걸 상기했다.

“아뇨? 안 해 주셨는데요?”

유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문제냐며 멀뚱멀뚱 눈을 뜨는 그녀의 모습에 이브는 당황했다. 당연히 성기사들을 대동하고 왔길래 허락을 맡은 줄 알았다.

“가만 보니…….”

성녀의 옆을 지켜야 할 이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안 루드비히, 태양의 힘을 가진 엘라이자 성검의 주인.

“발레리안이 없네요.”

“리안은 일주일 동안 출장을 다녀온 상태라 피곤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고 왔어요.”

유리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이브는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리안…….”

벌써 그와 애칭으로 부르는 사이로 발전했단 말인가?

강림한 지 채 세 달도 되지 않은 시간이거늘, 관계 진척이 굉장히 빨랐다.

‘나랑 애칭을 튼 건 1년이 지나서였는데.’

진짜 인연을 만나니 애칭을 나누는 것도 빨라진 모양이었다. 이브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뇨, 아니…… 있어요. 그러면 발레리안 몰래 여기를 왔다는 뜻이잖아요.”

이브는 황급히 작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유리의 행동은 대책이 없었다. 그때 집에 누군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이브와 유리는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당황했다.

“발레리안.”

“리안!”

말을 급하게 몰고 왔는지 그의 모습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이브는 그를 보고 직감했다.

사라진 유리를 성국으로 다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라고.

그 모습을 보니 왜인지 마음 한쪽이 뻥 뚫린 것처럼 싸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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