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발레리안, 괜찮아?”
왠지 발레리안의 얼굴이 창백해 보이자 이브가 당황했다.
갑자기 어디가 안 좋은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니, 내가 왜 걱정하는 거람.’
이브는 제가 발레리안을 걱정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창백해진 얼굴로 미동 없이 입을 굳게 다문 발레리안의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으레 괜찮다는 말 한마디도 없는 걸 보면 상태가 안 좋은 게 분명했다.
“의원한테 한번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겠어.”
이브가 발레리안의 팔을 잡고 의원 댁으로 이끌었다.
의원 댁에 도착하자마자 이브는 의원에게 발레리안을 진찰해 달라 했다. 발레리안의 몸에 청진기를 대며 요리조리 진찰하던 의원 댁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심장에 열이 많이 몰린 것 같고만. 스트레스가 아주 심한 모양이야.”
청진기를 벗은 의원이 덤덤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눈이 침침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엘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감?”
“고민이 조금 많긴 했습니다.”
발레리안은 단조로운 말투로 대꾸했다. 옆에 있던 이브는 괜히 뜨끔해서 꿍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고민이 많았다고?
마치 그녀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이야기처럼 들려서 영 기분이 찜찜했다. 이브는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하물며 나보다 고민이 많을까!’
괜히 발레리안에게 그리 쏘아붙여 주고 싶은 걸 이브는 참고 있었다.
“아론은요?”
“아마 지금쯤 자고 있을 것이야.”
의원이 대답했다.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원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번뜩였다.
이브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켜 놓고 본인은 한가롭게 낮잠이나 처자고 있다는 것이 심히 거슬렸다.
그리고 순순히 아론의 심부름을 하는 이브를 향해서도 질척한 질투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 아론이란 녀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면상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아론?”
한편 입원실로 들어온 이브는 안에 아무도 없어 당황했다.
“설마 그새를 못 참고……!”
그녀는 급하게 의원에게 물었다.
“아론이 사라졌어요! 어디로 갔는지 보셨어요?”
“아차차. 아까 잠깐 볼일이 있대서 나간다고 했었지, 참. 내도 늙었는지 기억이 이상하구만. 홀홀홀.”
의원이 홀홀 웃으며 여상히 대꾸했지만, 이브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 다친 환자를 내보내는 의사가 이 세상에 어딨단 말인가!
의원 댁을 나온 이브가 옆에 있는 발레리안에게 말했다.
“발레리안……. 아무래도 널 찾으러 간 것 같아.”
“나를?”
발레리안이 다소 어이없다는 눈빛을 했다. 이브는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뇌진탕 환자가 갑자기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고 버선발로 뛰쳐나가는 게 상식적이진 않지.’
이브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 산으로 간 것 같은데 같이 찾아봐야 할 것 같아.”
“……내가 왜?”
당연히 같이 찾으러 갈 거라 생각했던 예측이 보란 듯이 빗나갔다.
몹시 당황한 이브는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생각했다.
“그야…… 환자니까.”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을 우리가 돌봐 줘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발레리안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쩌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는데, 자신이 찾으러 가야 한다고?
그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아론이 사라지자 전전긍긍하는 이브의 태도가 그 생각에 더욱 불을 지폈다.
“무지라고……?”
이브는 그의 말에 당황하여 되물었다. 그녀가 알던 그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바로 찾으러 갈 터였다. 이런 식으로 비꼬는 것이 아니라.
“널 보고 싶어서 뛰쳐나간 애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발레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진심으로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천연덕스러운 행동과 그의 말간 얼굴이 지독히 잘 어울렸다. 그런 그를 할 말 잃은 얼굴로 보던 이브는 고개를 휙 돌렸다.
“싫으면 하지 마. 나 혼자라도 찾으러 갈 거니까.”
그러자 발레리안이 곧바로 이브의 팔을 붙잡았다.
“어딜?”
“그 산이지. 우리가 ‘우연히’ 만났던 그 산.”
발레리안은 ‘우연히’를 강조하는 그녀를 빤히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거긴 위험해.”
“그러니까 가야 하는 거야. 위험한 산에 혼자 갔잖아! 발레리안, 넌 제국 사람을 지킬 의무가 있어.”
그녀가 발레리안에게 말했다. 늘 그토록 의무와 사명감을 중요하게 여기던 그가 이러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발레리안은 속내를 말하고 싶은 걸 억눌렀다.
그 의무와 책임 따위 네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네가 내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그랬다는 걸.
“……그렇지.”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정말로 그녀의 마음에서 제 자리는 사라질 테니까.
이브와 발레리안은 아론을 찾기 위해 산으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황궁에서 돌아온 이유리가 성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두 달 뒤에 데뷔탕트를 치르시는 거예요? 정말 좋으시겠어요! 성녀님!”
유리는 제 시중을 드는 사제에게 황궁에서 나눈 대화의 일부를 말해 주었다.
“조금 긴장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요. 호위는 누가 같이 가 줄까요?”
유리의 물음에 사제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루드비히 경이겠지요. 그런 먼 길을 어떻게 엘라 님 없이 가시나요!”
사제가 지체 없이 대꾸하자 유리는 묘하게 안심됐다. 그러나 유리는 속내와 다르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리안도 엘라로서 바쁘지 않아요? 저한테만 신경 쓰긴 힘들 것 같아요. 괜히 제가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고요.”
늘 활발하고 명랑했던 성녀가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말하자, 사제는 당황했다.
“성녀님이 걸림돌이라니요! 감히 누가 그리 생각한답니까!”
“그냥…… 그간 옆에 있느라 출장을 못 갔던 건 아닌가 싶었어요.”
유리는 시무룩한 얼굴로 대꾸했다. 사제는 단박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래도 그렇게 길게 출장을 가시던 분은 아니었어요. 이번 일이 이례적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성녀님.”
“이례적인 거라고요?”
“네, 적어도 제가 사제로 있던 동안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지금 앞에 있는 사제는 어릴 적부터 신전에 들어와 사제가 된 지 거의 7년이 되었다고 했다.
유리는 그녀의 말에 안심하기는커녕 기분이 더 찝찝해졌다.
‘그럼 나딘 마을에 갔다고 했을 때, 자비에의 반응이 왜 그랬을까…….’
유리는 그 당시에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하며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굳이 자비에의 반응을 해석하자면 기어코 거길 간 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리안이 위험한 곳에라도 간 건가?’
유리는 괜히 걱정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이브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론은 산 아래쪽에서 잠들어 있었다.
처음에 그를 발견했을 땐 죽은 줄 알고 질겁했다.
그러나 이내 그가 산행으로 지친 나머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이런 곳에서도 잘 자는 녀석이긴 했어.”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발레리안을 향해 이브는 머쓱히 얼굴을 긁적였다.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이브는 곧장 풀 위에 누워 있는 아론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일어나!”
“헉! 뭐, 뭐야!”
“뭐긴 뭐야,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마지않던 엘라 님이지.”
“헉! 에, 엘라 님.”
만나면 악수도 하고 사인도 받겠다며 열정을 불태우던 아론은 막상 발레리안을 마주하자 감격해 말을 잇지 못했다. 발레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몸은 괜찮습니까?”
발레리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마,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뒤늦게 헐레벌떡 일어난 아론은 동경하던 이를 마주하여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었다. 이브는 그 모습을 짜게 식은 시선으로 보았다.
‘정말이지, 오버는…….’
겉으론 친절한 미소를 짓는 발레리안의 시선은 아론을 날카롭게 훑고 있었다.
갈색 머리에 헤이즐넛 눈동자 색을 가진 순박한 인상. 어릴 적부터 농사일로 단련하여 골격이 크고 몸이 탄탄한 것을 빼면 전체적으로 평범한 외양이었다.
그는 판단을 내렸다. 딱히 이브가 좋아하는 용모는 아니다.
그녀가 그에게 반할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마을에서 젊은 남자가 제 앞에 있는 사람밖에 없다는 점이 거슬렸다.
생각보다 더 많이.
“그, 그게…….”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아론이 안절부절못하자 이브가 한숨을 내쉬며 발레리안을 향해 말했다.
“얘가 팬이라고 사인이랑 악수 좀 해 달래요.”
“아, 아닙니다! 바쁘신 엘라 님을 붙잡고 제가 어떻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빛은 사인을 받고 악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이브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이브의 반응을 살핀 발레리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잠깐이니 전 괜찮습니다.”
아론이 얼굴이 붉어진 채 소리쳤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난 옆에 있을게…….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조금이라도 빠르게 이브는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왜 지켜보는 내가 더 부끄러운 걸까.’
아론의 꼴을 보노라니 공감성 수치가 느껴졌다. 이브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대며 옆에 있는 개울가로 향했다. 뒤에서 시선이 따라붙는 느낌이었지만 꿋꿋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던 발레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짧은 시간 내에 이브가 아론에게 이성적인 호감은 없다는 걸 파악한 발레리안은 완전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