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발레리안은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거지?’
아직 의원의 집에 있는 입원실에 누워 있는 아론을 보던 이브는 내내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슨 고민 있는 얼굴인데?”
다행히 가벼운 뇌진탕 진단을 받은 아론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이브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머리는 괜찮아?”
“어어. 마물의 먹이가 되진 않아서 천만다행이지. 그때 마침 엘라 님이 산을 지나고 있을 줄이야! 감사 인사 좀 드리고 싶은데 이미 가 버리셨겠지?”
아론은 아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심지어 그는 엘라의 열렬한 팬이었다. 악마와의 전투. 그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는 발레리안이 멋있다나.
꽤 아쉬움이 컸는지 늘 쾌활한 그답지 않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눈가까지 촉촉해진 걸 보니 어지간히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마음이 약해진 이브는 그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달싹였다.
“사실, 오늘 엘라가 다시 왔어.”
“……? 그게 진짜야?!”
아론이 흥분한 얼굴로 몸을 들썩였다.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그녀가 급하게 말렸다.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그래?”
“엘라 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러 가야지!”
아론이 무얼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이브를 보았다. 그의 눈빛에 환희와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난감한 얼굴로 그를 붙잡았다. 절대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원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샬럿! 이러다가 또 못 보면 어떡하려고! 내 죽기 전 소원이 엘라 님의 실물을 한번 보는 거였어!”
하지만 아론의 반발이 꽤 거셌다. 이브는 그를 보며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내가 데려올 테니까 얌전히 좀 있어!”
저 몸으로 설치다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 같았다.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원 댁을 빠져나왔다.
‘괜히 말했네.’
그냥 발레리안이 왔다는 걸 아예 말하지 말걸!
잠시 아론의 간절함에 마음이 약해져서 입을 열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진짜로 발레리안을 데려오지 않는다면 난리를 치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리안을 피해서 기껏 도망 왔더니.’
다시 발레리안을 찾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게 아이러니했다. 이브는 다시 복숭아 농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엔 발레리안이 보이지 않았다. 헬리엇만 덩그러니 남은 채 잔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혹시 여기 있던 기사님은 어디 갔어요?”
이브는 옆에서 빈 박스를 치우던 벤리에게 물었다.
“아아, 그 엘라 님? 아까 일 끝내고 나가시던데, 무슨 일이 있느냐?”
“아, 아뇨.”
이브는 고개를 저으며 고민했다. 여기서 더 발레리안을 찾아야 할까?
‘어휴, 모르겠다.’
그녀는 더 이상 발레리안을 찾는 걸 포기했다. 아론의 순정을 그녀가 지켜 줘야 할 의무는 없지 않나. 저러다가 상처가 덧나면 본인 책임이지!
“아까 그 엘라 님은 산 쪽으로 가시는 것 같던데, 한번 가 보는 게 어떻겠니?”
주위에서 이야기를 주워듣던 마거릿이 이브에게 알려 주었다.
“아…… 감사해요.”
이브는 과하게 친절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더 도울 일은 없나요?”
“아니야. 이미 다 끝났단다.”
마거릿과 주위에 있던 일꾼들은 손사래를 치며 어서 가 보라고 말했다.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안 끝난 것 같은 일감이 한가득 보이는데?
“하지만 저기에 남은 복숭아들이…….”
“이건 우리가 할 거야.”
“그럼 같이 해요.”
이브가 말하자, 일꾼들이 빠르게 말했다.
“우리가 할 거라니까? 어차피 여기 기사님도 계시잖아. 샬럿은 얼른 가 봐. 엘라 님을 찾아야지.”
주변에 앉아 있던 헬리엇은 황당한 시선으로 그 말을 한 일꾼을 보았다. 흡사 봉변이라도 당한 듯한 얼굴이었다.
“급한 일은 아니라 나중에 찾아도 되는데요?”
“여기는 괜찮다니까 그러네.”
마거릿까지 합세해서 이브의 등을 떠미는 바람에 그녀는 일에서 강제로 빠지게 되었다.
얼떨결에 농장을 나온 이브는 황망한 시선으로 농장을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어서 가 보라며 팔을 흔들고 있었다.
결국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며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에 멧돼지를 소탕하려고 갔던 산이었다.
‘그 얼굴을 어떻게 봐.’
막상 발레리안을 찾아보려고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애초에 왜 그가 여기에 다시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남아 있는 악마를 토벌하려고 왔다는 건 구실이 부족했다.
‘나라면 다른 기사들을 보낼 텐데.’
그녀라면 그런 식으로 헤어짐을 강요했던 연인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이제 그녀를 만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서 그런 건가?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았다면 수도에 올라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일부러 날 괴롭히려고?’
남은 추측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의도였다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니까. 그녀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면 죽음을 열 번은 면피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냥 이유리랑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이유리?”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들렸다. 길을 걷던 이브의 몸이 뻣뻣하게 멈추었다. 그러자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깝게 들렸다.
혼잣말을 들킬 줄은 몰랐던 이브는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발레리안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녀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성녀를 말하는 건가.”
이브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의 생각이 길게 이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발레리안, 잠깐 나랑 어디 좀 가 줄래?”
그 말에 발레리안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의문을 담은 눈빛에 이브는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저번에 나랑 같이 있던 남자애 있지. 아론이라고.”
발레리안은 단박에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방금 이브가 언급했던 남자의 이름이었다.
“아론이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 그런데 환자를 움직이게 할 수는 없잖아.”
그 아론이란 남자가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이렇게까지 신경 쓴단 말인가. 발레리안의 눈빛에 짙은 질투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의 얼굴 위로 점잖은 미소가 덧그려져 그 감정은 빠르게 가려졌다.
“그래.”
이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으레 귀한 집 아들이었다면 이런 부탁에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을 법하거늘. 발레리안은 아주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당연히 제가 가야 한다며 그가 솔선수범을 보이면 주변인들도 그의 행동에 자연스레 따르게 된다. 좋은 영향력의 모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까 전에도 농장 일을 도와주었지.’
아주 옛날, 첫 만남.
그의 외모에만 홀렸던 이브는 그와 같이 있을수록 그러한 면모를 발견하고는 진심으로 푹 빠지게 되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좋아했던 발레리안의 모습을 다시 보니 특히 더 그랬다.
한편 발레리안은 이브를 움직이게 만든 남자를 직접 만나 볼 생각에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손을 봐 주는 것이 좋을까.’
그는 이브의 곁에서 그놈을 떼어 놓을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수도에 데려가서 자연스럽게 둘 사이를 떼어 놓는 것이었다.
그녀를 따라 수도까지 오진 않을 테니까.
‘만약 따라오겠다고 한다면.’
그녀를 따라가지 못할 상태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엔 큰 문제가 있었다. 이브가 그를 따라 수도로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
‘대체 왜 수도에 가지 않는 건가.’
발레리안은 새삼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가 그간 지켜본 이브는 세간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연회도 그리 즐기지 않았고, 누군가 면전에서 욕을 해도 그냥 흘려들으며 무시했다.
“내 행복을 깨고 싶다면, 그래. 원하는 대로 끌고 가, 발레리안.”
“…….”
“정말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면.”
그녀가 허투루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만약 그가 정말 수도로 끌고 간다면…….
발레리안은 차가운 주검이 된 이브의 모습을 상상하곤 얼어붙었다. 온몸의 피가 다 빨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