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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42화 (42/100)

42화

맑고 푸른 아침 하늘.

오늘도 발레리안의 부재로 아침 산책을 나가지 못한 유리는 어제보다 더 토라진 상태였다. 완전히 찬밥 신세가 아닌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날 보러 오는 일도 힘들겠지.’

유리는 침울한 감정을 애써 덜어 내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 오후에 접한 소식에 깜짝 놀라 당황했다.

“앗, 리안이 일주일 동안 출장을 간다고요?”

“네, 그래서 당분간 최정예 기사들이 성녀님의 호위를 맡을 예정이랍니다.”

대주교 아리엘이 푸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리는 리안을 일주일 동안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잘 부탁드릴게요. 아리엘 대주교님.”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

아리엘은 이해심 넓은 유리가 진정으로 기특하다는 듯 진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유리는 그대로 성녀가 머무르는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방에 돌아오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리안을 일주일 동안 못 본다고…….”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기분에 휩싸였다.

“으…… 왜 또 머리가 아프지.”

이곳에 와서 기억을 잃은 뒤로 편두통이 생겼다. 자주 두통을 앓는 건 아니었지만 한번 두통이 올 때마다 밀려오는 고통이 강했다.

아리엘 대주교는 그걸 신병이라고 말했다.

‘진짜 신병이라는 게 있는 건가?’

조금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유리는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머리가 아픈 데다가 리안까지 못 보는구나.”

갑자기 우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문밖에선 갑옷이 철거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다른 기사들이 와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유리는 심드렁한 시선으로 잠시 문 쪽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기회가 된다면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일전에 발레리안과 에스텔라 영애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상기한 유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브 에스텔라.

그녀를 떠올리니 조금 화가 났다.

“완전 여우야, 여우!”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발레리안과 함께 있으니 황태자가 또 탐이 난 게 분명했다. 착한 약혼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그녀의 상식으론 절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뒤늦게 제가 한 짓이 부끄러워졌는지 황태자 약혼녀 자리에서도 뛰쳐나와 그대로 증발했다고 한다.

‘일말의 염치는 있는 모양이지.’

원래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 사는 법이었다.

-똑똑.

곧 들리는 소리에 유리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마 성녀로서 일정을 전하려고 온 사제인 듯했다.

‘성녀 노릇 하는 것도 귀찮네.’

사람의 마력을 볼 수 있다는 점 하나로 성녀로 떠받들어지는 게 우습기도 했다. 들어오라는 유리의 대답에 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엘 대주교 옆에서 사무 일을 돕는 젊은 사제였다.

그가 말했다.

“오늘 입궁을 위한 채비가 다 끝났습니다.”

아.

그제야 잊고 있던 일정이 떠오른 유리는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안 그래도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실에서 연락이 왔다. 황제가 그녀를 만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얀 엠파이어 드레스로 갈아입은 유리는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성국에서 황궁으로 향하는 길은 꽤 지루하고 길었다.

‘이 시대에 무슨 황제람.’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그녀로선 참 이해할 수 없는 문화였다.

“도착하였습니다, 성녀님.”

정중한 마부의 목소리에 하품하던 유리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떤 남자가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아, 감사해요.”

뒤늦게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유리는 헉, 숨을 삼켰다.

‘진짜 잘생겼다.’

그녀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었지만 그 농도가 전혀 달랐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머리와 여름의 녹음을 닮은 청량한 녹색 눈동자.

조각한 듯 반듯한 이목구비와 한데 얽힌 색채들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이유리 성녀.”

그가 단정한 인사를 건넸다. 잠시 멍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던 유리가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사님?”

“자비에 루 힐리오스라고 합니다.”

“아, 자비에.”

유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자비에 씨!”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본 자비에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에 제국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는 건 본디 황족밖에 없었다.

성녀가 성국에 온 지 한 달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제국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도 숙지하지 못한 상태인가?

잠시 뒤에 있을 성녀와 폐하의 대담을 걱정하던 자비에는 문득 주변을 살폈다. 가만 보니 당연히 보여야 할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안은 어디에 갔습니까?”

“아, 자비에 씨도 리안을 아세요?

리안?

그녀가 자연스레 발레리안의 애칭을 부르자 자비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두 사람이 벌써 그런 관계로 발전하다니 의외였다.

누구나 친절하고 다정한 발레리안에게 쉽사리 친밀감을 느끼곤 하지만, 그 겉모습과 달리 진정 그와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자비에가 아는 한, 그가 애칭을 나눈 사람은 이브 에스텔라가 유일했다. 눈앞에 있는 성녀 이유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녀의 호위를 전담으로 맡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사이에 정이라도 쌓은 건가?’

에스텔라 영애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더니, 아무래도 발레리안도 사람이라 변심을 한 모양이었다.

제 앞에서 성검을 발검했던 모습을 떠올린 자비에는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음, 사실 리안은 일주일 동안 악마를 소탕하려고 파견을 나간 상태예요.”

“어디로 말입니까?”

“어…… 어디였더라? 나딘 마을이랬나? 되게 작고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들었어요.”

“……정말 나딘 마을입니까?”

자비에가 당황한 눈빛으로 되묻자, 유리는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물었다.

“거기에 뭐가 있나요?”

“…….”

할 말을 잃은 자비에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냥 그런 먼 곳까지 간 게 신기해서.”

사실 뭐가 있긴 했다.

바로 발레리안, 그의 전 약혼녀 이브 에스텔라가 머무르는 곳이었으니.

자비에는 에스텔라 영애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전하, 발레리안이 제가 머무르는 곳을 모르게 해 주세요.”

떠나기 전, 에스텔라 영애는 한 번 더 자비에를 만나러 황궁에 왔었다. 형식상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고 온 줄 알았지만, 발레리안이 제 거처를 찾아낼까 봐 걱정해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어디로 떠납니까?”

자비에의 물음에 이브가 말했다.

“나딘 마을이요. 그러니까 이 근처로 절대 발레리안은 보내지 말아 주세요.”

그녀의 결연한 눈빛에 떠밀리듯 자비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기실 목적을 달성해서 이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안이거늘.

‘그런데 발레리안이 나딘 마을에 있다고?’

자비에는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강렬하게 떠오르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발레리안이 이브 에스텔라를 보려고 거길 간 건가?’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발상이긴 했다.

그러나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발레리안이 타 지역으로 일주일씩이나 파견을 요청하지 않았을 터.

심지어 예전에 그는 이브를 만날 시간이 적어진다는 이유로 파견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하나 이 추측이 맞는다면 영애에게 미쳐서 돌아 버린 놈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발레리안이 성검을 뽑으며 난리를 치던 광경을 떠올리자, 그 추측에 신빙성이 실렸다. 벌써 골치가 아픈 상황이 머릿속에 덧그려졌다.

자비에는 차분한 말씨로 입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황제 궁의 응접실에 도착했단 말에 유리가 자비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자비에가 먼저 노크했다.

“폐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안에서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자비에는 문을 열었다. 그러곤 옅게 웃으며 그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유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자비에를 향해 황제가 웃었다.

“허허, 이런 일이 아니고서야 아들 얼굴 보기가 힘들구나.”

“죄송합니다, 조금 더 얼굴을 비치도록 하겠습니다.”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황궁에서 일하는 직원 정도로 생각했는데 황제의 아들이라고?

방금 ‘자비에 씨’라고 말했던 걸 떠올린 그녀는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자비에는 저도 모르게 비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에스텔라 영애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뻔뻔하게 ‘아, 그쪽이 황태자 전하셨어요? 그럼 진작 말씀하시죠. 고귀한 분을 몰라뵈어서 죄송하네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브 에스텔라의 도도한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심결에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던 자비에가 황제에게 성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성녀 이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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