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사이 버나드가 먼저 그녀에게 알은체를 했다.
“샬럿! 좋은 아침이구나.”
“아, 버나드 아저씨. 휴, 좋은 아침이에요.”
커다란 도끼로 열심히 장작을 패던 이브가 땀을 닦으며 허리를 세웠다.
“무슨 작업을 그리 열심히 하고 있는 게냐?”
“덫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요리할 때 쓸 장작이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아이고, 또 너구리 녀석이야?”
“이맘때쯤이면 늘 말썽이죠.”
그리 말하며 씩 웃는 이브는 짐짓 10년 이상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던 헬리엇은 정신을 차리고 상관을 보았다.
푸른 눈동자는 그녀에게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안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헬리엇은 그 눈빛을 보고 주춤했다.
‘엇……?’
아직도 단장님이 에스텔라 영애에게 미련이 있는 건가?
헬리엇은 일순 찾아든 생각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삼켰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만한 일을 겪고서도 에스텔라 영애를 좋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발레리안이 아무리 친절하고 다정하다지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사람 간의 신의와 믿음이었다.
‘단장님이 사랑에 미친 놈도 아니고.’
헬리엇은 제가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고 자책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이런 가정 자체가 상관에게 큰 무례를 저지르는 듯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사님! 여기 와서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농장 안에 있던 버나드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발치에 떨어진 장작을 집어 들고 있던 헬리엇은 거절하려 했지만, 곧 벌어진 일에 당황하여 입을 헤벌렸다. 단장님의 발이 훨씬 더 빨랐던 탓이다.
“단장님……!”
얼떨결에 그를 따라간 헬리엇은 이내 에스텔라 영애와 눈이 마주치자 난감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찬가지로 그를 발견한 이브는 웃지도 못하고 꽁꽁 얼어붙었다.
‘어…… 헬리엇이 왜 여기에?’
여기서 또 아는 사람을 만나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이브의 당황한 눈길이 무심결에 발레리안을 향했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여상했다.
‘순찰 중이라 같이 온 건가……?’
하긴 단장의 직함을 가지고 개인 활동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외려 헬리엇 하나만 데리고 온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난감하네.’
여기서 오랜만에 만난 헬리엇에게 대놓고 알은척할 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샬럿이라고 해요.”
이브는 괜히 두건을 눌러쓴 뒤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인사에 분위기를 읽은 헬리엇은 덩달아 어색하게 마주 인사했다.
“헤, 헬리엇 베르너…… 입니다.”
그러곤 아까 이브가 패던 장작을 건네주었다. 이브는 떨떠름한 낯으로 고맙다며 인사했다.
“하하, 이렇게 흔쾌히 도와주려고 오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버나드가 호쾌하게 웃으며 거듭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옆에 있던 농장주도 감동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걱정스럽다는 듯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괜히 저희가 기사님을 귀찮게 만드는 건 아닌지…….”
발레리안은 친절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차피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무슨 일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잘생긴 얼굴에 반듯한 미소가 걸리자, 주변에 있던 일꾼들이 넋을 빼고 보았다.
“아! 지금 이 뒤에 있는 수확물을 같이 솎아 내고 포장해 주시면 됩니다!”
발레리안과 헬리엇은 자연스레 농장주가 가리킨 쪽을 보았다.
그곳엔 복숭아가 가득 담긴 상자들이 몇십 박스가 있었다. 이브가 눈매를 세모꼴로 접으며 버나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님한테 과일 분류를 하라는 건 조금 그렇지 않아요?”
사실 기사의 품위가 손상되는 일보단, 그녀는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특히 발레리안. 그가 그녀 옆에 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불편했다.
“혹시 다른 일은 없어요?”
이브가 물었다. 다른 일을 하면 적어도 발레리안과 나란히 앉아서 일하진 않아도 되었으니까.
“아아. 어제 우리가 다 끝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마. 샬럿이 다쳤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다 미리 도와주러 왔어.”
농장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브는 그들의 배려심에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면 남은 일감은 이 복숭아 감별 작업이라는 건데.
‘차라리 빨리 일을 끝내 버리자.’
이 자리를 피하기 위해선 이브는 그쪽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상처가 있는 복숭아와 상태가 양호한 복숭아를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이 정도 상처는 괜찮습니까?”
발레리안이 살피던 복숭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겉보기엔 상처가 별로 없어 보였다. 꼭지 부분이 다른 복숭아와 살짝 다르다는 걸 제외하면.
“아니. 이것도 이쪽에 분류해야 해요.”
이브가 상처가 있는 박스를 가리켰다.
“여기 꼭지 부분이 뻥 뚫려 있잖아요. 이건 상한 거고 그 안에 초파리가 생기죠.”
이브는 저도 모르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헬리엇의 묘한 눈길에 이브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건?”
발레리안이 다른 복숭아를 들었다. 그의 질문에 이브가 말했다.
“그건 복숭아 골도 깊고 상처 없이 매끈하니까 상등품이네.”
핫. 이브는 자꾸만 나불거리는 제 입을 때리고 싶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발레리안이 미소를 참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발레리안을 쳐다보았다.
‘참 나, 이 상황이 웃긴가?’
이브는 괜히 심통이 나서 복숭아 박스를 들고 척척 걸어 나갔다.
가능하면 발레리안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서 작업할 생각이었다.
“왜, 왜 쫓아와요?”
“아직 배울 게 많은데 혼자서는 못 합니다.”
그러곤 그가 자연스레 그녀의 상자를 뺏어 들었다. 그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이브가 다시 상자를 빼앗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에 다른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쪽에 물어봐요.”
이브는 가늘게 눈을 뜨고 발레리안을 뾰족이 노려보았다.
“다들 바빠 보이는데, 제가 방해하기가 미안합니다.”
발레리안이 그녀가 가리킨 쪽을 흘긋 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은 상자를 나르고 복숭아를 분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누구는 한가한 줄 아나.’
이브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저렇게 말하는데 기어코 저쪽에 가서 배우라고 하면, 지금 일하는 사람을 그녀보다 한가한 사람으로 만드는 꼴이 되었다.
“휴, 알겠어요.”
이브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발레리안이 웃으며 그녀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어느새 작업 의자까지 가져온 그는 나란히 의자를 두었다.
‘정말 왜 이러는 거람.’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 * *
일꾼들과 농장민들이 샬럿과 기사님이 나란히 앉아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헬리엇은 묵묵히 그 옆에서 복숭아 분류 작업을 했다. 그러나 곧 옆에서 들리는 속닥임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저 기사님이 샬럿한테 관심이 있는 거 맞죠?”
“기사님 말고 엘라 님이라고 해야죠! 근데 그런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샬럿이랑 잘 어울리세요.”
그 이야기를 듣던 헬리엇은 욱했다. 지금 그 옆에 있는 여자가 단장님께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 저런 말은 꺼내지도 못할 터였다.
‘누굴 엮는 건지.’
아무래도 이런 시골에 젊은 사람이 없다 보니 아무나 젊은 남녀가 같이 있으면 그런 오해를 하나 싶었다.
헬리엇은 그들을 따라 단장님과 에스텔라 영애가 있는 쪽을 보았다.
‘……오해할 만하네.’
그는 빠르게 인정했다.
서로 나란히 앉아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일하는 모습이 짐짓 다정한 사이처럼 보였다.
정작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헬리엇은 속이 터졌다.
‘단장님은 참 속도 좋으시지!’
헬리엇은 제 연인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저렇게 사이좋게 지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것처럼 대하는 이브 에스텔라 영애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어디서 시선이 느껴진다고 생각한 이브가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과 헬리엇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수수 시선을 거두었다.
그 모습에 이브는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오해라도 사겠어.’
이브는 발레리안에게 말했다.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히 분류할 수 있죠? 아직도 모르겠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가만히 보던 발레리안이 입술을 열었다.
푸른 눈동자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 갑니까?”
“갈 데가 있어서요.”
사실 이 일을 마치고 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발레리안과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어라, 샬럿. 어디 가려고?”
마침 그녀 주변에서 빗자루질하던 버나드가 물었다.
“병문안 좀 가려고요.”
“아, 아론을 보러 가려고?”
“네.”
“다녀오면 어떤지 나한테도 좀 말해 주거라.”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인 이브가 무심결에 발레리안 쪽을 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살얼음처럼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눈 한 번 깜빡였더니 발레리안은 제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여상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한 이브는 농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