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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40화 (40/100)

40화

나딘 마을의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이브는 이불을 덮은 채 뒤척였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발레리안과 나눈 대화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나보고 수도에 올라오라고?’

발레리안의 속내가 대체 무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속마음을 파악해 보려던 이브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진짜 돌겠네…….”

그 의도가 뭐였든지 간에 그가 그녀를 무척이나 난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나마 그녀가 한 말에 발레리안이 동요했다는 건 희망적이었다. 그가 그녀의 죽음까지 바라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래…… 그렇게까지 모진 애는 아니니까.’

아무리 배신하고 자신을 떠난 연인일지라도 발레리안의 성격상 그녀의 죽음까지 바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정이 많은 성정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가차 없어질 땐, 악마와 악마들의 잔당을 처리할 때였다.

‘그러니까 나는 더 수도에 가면 안 돼.’

이제 곧 성녀는 황실의 부름을 받아 데뷔탕트를 치르게 될 것이다.

거기서 유리는 수도에 한 달 정도 머무르게 되는데, 그사이에 이브와 그녀가 만나기라도 한다면?

유리는 곧바로 이브의 정체를 알아볼 터였다.

“그럼 내 죽음이 현실이 되겠지…….”

발레리안의 손에 죽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모진 말을 한 것도 있었다.

‘되게…… 상처 입은 눈빛이었지.’

하지만 이브는 괜히 발레리안에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눈빛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당분간 내 앞에 나타날 일은 없을 테니까.’

이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비난과 삿대질은 무섭지 않지만, 가족들이 위험해지는 건 두려웠다. 그러니 수도에 올라가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꼬끼오!

새벽에 건너편 집에서 큰 수탉이 우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이브는 창밖을 보았다.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하……. 오늘도 잠은 다 잤네.”

오늘은 복숭아 농장에 가서 일을 돕는 날이었다.

능숙하게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익숙한 장비들을 챙기고 문을 열었다.

“……!”

이브는 제집 앞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눈을 홉떴다.

루비색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네, 네가 왜…….”

발레리안이었다. 당분간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란 간밤의 추측을 보란 듯이 박살 낸 채로 그가 제집 앞에 서 있었다.

“좋은 아침, 샬럿.”

그는 싱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천연덕스러운 그 모습에 이브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기에 악마들이 있는데 내가 여길 떠날 수는 없지.”

그, 그건 그렇지…….

이브는 창백히 굳은 얼굴로 발레리안을 보았다. 그는 그녀가 걱정하는 게 무언지 깨닫고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업무 때문에 온 거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럼 어제의 대화를 되풀이하진 않을 거란 뜻이었다.

그녀는 문득 그의 성검 손잡이가 검은 피로 얼룩진 걸 발견했다.

‘진짜 악마라도 잡고 온 모양이네.’

그녀의 눈매가 조금 풀리는 걸 본 발레리안은 그녀가 안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럼 이만. 이 주변을 순찰하는 중이라 이만 가 보도록 할게.”

“……응.”

그리 말한 그는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이브는 조금 멍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한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면 내 집 앞에는 왜 온 거지……?”

아니, 어쩌면 그의 말대로 순찰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걸 수도 있지 않나. 이브는 조금 찝찝했지만, 생각을 털어 버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기에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한편 그녀에게 용무가 없는 척 자리를 떠난 발레리안은 산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헬리엇이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단장님! 여깁니다!”

오랜만의 출장이라 기분이 좋은지 헬리엇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그를 본 발레리안은 어젯밤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젯밤. 대주교의 집무실.

온종일 이브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발레리안은 결국 집무실로 향했다.

발레리안이 대주교 아리엘에게 말했다.

“한 달간 출장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니?”

난데없는 그의 요구에 아리엘은 화들짝 놀랐다. 출장을 요청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심지어 한 달씩이나 자리 비우는 걸 요구하다니!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곳에서 악마가 출몰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기사들을 보내면 될 일이 아니니?”

“성국과 제국의 안정을 위협할 만한 일은 제가 직접 뿌리째 없애고 싶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료한 명분이었다. 바퀴벌레같이 증식하는 악마들은 애초에 싹을 자르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의 가장 적임자는 그녀 앞에 있는 엘라, 발레리안이었다.

그 점을 알고 있던 아리엘은 흐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제보가 확실한 거니?”

“어제 새벽에 제가 확인했고, 직접 악마를 죽였습니다.”

발레리안은 품에서 투명한 실린더를 꺼냈다. 악마의 피가 담겨 있는 실린더에서는 검은빛이 돌고 있었다.

“거기에서 채취한 피입니다.”

기실 이곳에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무슨 일이든 진행하기 위해선 확실히 믿음을 얻어 놓는 것이 편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집무실에 오기 전에 다른 악마를 죽여서 악마의 피를 손수 가져오는, 작은 수고로움을 자처했다.

그를 본 아리엘이 고민에 빠졌다.

‘흠, 이걸 어찌할까.’

여기서 그가 요청하는 출장을 거절한다면 성국 사람들은 교황청이 성녀의 안위만 걱정한다면서 속으로 반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끌어올린 위상이니만큼 이런 작은 반감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달은 좀 곤란해. 성녀님의 호위를 장시간 비워 둘 수는 없단다. 일주일은 어떻겠니? 상급 악마만 아니면 이 시간으로 충분할 거야.”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성녀의 호위로 있는 한, 한 달 이상 기간을 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일주일의 출장을 생각하고 꺼낸 말인지라 발레리안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럼 지원군을 붙이도록 하마.”

대주교 아리엘의 말에 발레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작은 마을이라서 많은 인원이 가면 주민들이 불편해할 겁니다.”

“하지만 혼자 보내는 건 위험해. 저번에 다친 일도 있고, 이번에도 발레리안이 다치면 성녀의 안위는 누가 책임진단 말이니?”

아리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발레리안이 한발 물러나 제안했다.

“그러면 헬리엇 베르너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리하여 발레리안은 헬리엇과 함께 나딘 마을로 향했다.

‘일단 입부터 막아 놓아야겠군.’

헬리엇을 본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에게서 이브 에스텔라가 이곳에 산다는 소식을 들은 헬리엇은 깜짝 놀랐다.

“여기에…… 에스텔라 영애가 살고 있단 말입니까?”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엇은 믿기지 않았다.

찻잔만 들던 고귀한 영애가 이러한 외딴 시골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던 발레리안이 딱딱히 말했다.

“그에 관해선 절대로 함구해. 행여 그 소문이 퍼지면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

흉흉한 기세로 입단속을 시키는 그의 모습에 헬리엇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론 단장다운 모습이라 생각했다. 배신한 옛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그 연인조차 상처받지 않게 하려는 점이 그랬다.

“예…… 근데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악마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발레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무척 자연스러운 태도에 헬리엇은 끔뻑 속아 넘어갔다.

“허……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헬리엇의 표정은 그리 썩 밝지 않았다. 모든 제국민이 존경하는 단장의 순정을 짓밟고 상처를 준 채 도망친 여자였다. 그런 그녀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아마 성국 사람이나 제국민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헬리엇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그러나 헬리엇은 잠시 후,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기함했다.

버나드의 안내에 따라 마을 지리를 익히던 중, 누군가 머리에 얇은 천을 일 모자처럼 쓴 채 장작을 패는 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이얍!”

버나드는 그 모습이 익숙한 듯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샬럿! 우리 마을에서 가장 힘이 장사인 데다가 일머리도 아주 좋은 아가씨입니다. 샬럿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엘라 님도 보셨을 테지요.”

버나드의 시선이 발레리안에게 향했다.

“저, 저분이…….”

헬리엇은 넋을 잃은 얼굴로 이브가 농사일을 돕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브가 패던 장작이 날아가 헬리엇의 발치에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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