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녀를 보던 그가 비스듬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구해 준 게 많이 못마땅한 모양이야, 이브.”
그는 그녀의 기색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정곡을 찌른 말에 내심 뜨끔했지만, 이브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무얼 원하는지만 알고 싶었다.
그래서 빠르게 그가 원하는 대가를 치르고 깨끗하게 끝내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침묵하는 그녀를 보며 먼저 입을 연 쪽은 발레리안이었다.
“수도로 돌아와.”
“……뭐?”
대체 무슨 대가를 치르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던 이브는 발레리안의 발언에 당황했다. 기껏해야 그에게 상처 입힌 것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할 줄 알았다. 하나 이런 식의 요구는 예상도 못 했다.
“……그, 그건 곤란해.”
“왜, 손가락질당하는 게 두려워? 아니면 같잖은 협박?”
발레리안이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브.”
이브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어 가만히 그를 보았다.
“널 협박하던 사람들은 다 사라졌으니까.”
“……사라졌다고?”
“그래. 그러니까 이브, 너도 네가 한 짓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지.”
그녀를 담은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싸늘히 노려보는 발레리안의 시선에 이브는 당혹스러워졌다.
“그래, 솔직하게 나에게 말했다면 해결되었을 일이지. 이렇게 쉽게.”
협박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의 흉흉한 기세에 눌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제 널 향한 협박이 네가 한 모든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진 못할 테지.”
그의 말에 이브는 입술만 달싹였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다. 당시에 지난 기간 동안 부조리한 일을 겪었다고 일찌감치 말했더라면…….
발레리안의 성격상 가만히 묵과하지만은 않았을 터.
그녀가 그와 헤어지고 싶어서 만든 조악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그가 알아차리고 지적한 것이다.
‘알면서 왜…….’
그가 그녀에게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온 이유가 뭐야?”
그가 이곳에 있는 의도마저 의심스러웠다. 산에서 만난 것도 과연 우연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 한편에 선득한 바람이 불었다.
이브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노려보았다.
“오해는 곤란해. 여기에 악마가 산발적으로 출몰한다는 제보를 받고 온 거였거든.”
“그런데 왜 혼자야?”
“이 근처에 볼일이 있던 건 나뿐이라.”
그 근처를 지나다가 겸사겸사 순찰을 돌았다는 말이었다. 무어라 더 지적할 부분이 없는 해명이지만 무척이나 의심스러웠다.
모든 걸 우연으로 얼버무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구나.”
여전히 그가 의심스러웠지만, 이브는 수긍하는 척했다. 이 이상 따지는 것도 무의미한 짓이었으니.
“하지만 그 요구는 들어줄 수 없어.”
그녀가 단호히 말하자, 발레리안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표정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지독히도 서늘했다.
“그렇게 도망치는 비겁자로 남겠다고?”
“……그래, 누군가 날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어.”
“상관없다면서 왜 수도에 올라오지 않는 건데.”
발레리안은 그녀의 모순점을 지적하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브는 그 반응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와 왜 그가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연히라도 그녀를 마주치니 심사가 뒤틀린 걸까?
하지만 정말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발레리안이었다. 그는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안쪽의 살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런 곳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사는 게 좋다고.’
작금의 대화에서 그가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낸 것 중 진실은 하나도 없었다. 악마가 출몰했다는 제보부터 근처에 볼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수도에서 자신의 죄를 책임지라는 말까지도.
발레리안은 자신을 버린 이브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는 그녀가 모진 일을 당하는 걸 볼 수 없었다.
“신전 내부에 악마와 협력자가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말대로 신전 내부에 엘라의 힘을 방출해서 수색했지만, 악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일찌감치 도망쳤거나 협력자가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그 뒤로 매일같이 잠자는 시간을 한 시간으로 줄여서 새벽마다 그녀를 보러 왔었다.
그녀가 제 눈에서 떨어지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게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던 계획은, 방금의 일로 완전히 틀어졌다. 그가 산에서 발견한 마물의 흔적은 최소 다섯 마리. 그만한 마물이 돌아다닌다는 건 이 마을에 악마가 숨어 있다는 의미였다.
그녀를 어떻게든 수도로 데려와야만 했다.
수도에서 누군가 그녀를 삿대질하고 비난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가 그리 원한다면 그녀에 대한 여론을 바꾸는 일 따위는 쉬웠다.
“책임을 회피하지 마, 이브 에스텔라.”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이브에게 박혔다.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든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어?”
이어진 그의 말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이브의 심장이 쿵쿵, 엇박자로 뛰었다.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지만…….”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 옆엔 이미 이유리가 있잖아.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대신 이브는 다른 말을 꺼내었다.
“……지금 이 모습으로 충분히 죗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해 주면 안 돼?”
“글쎄, 그렇다고 하기엔 이브는 너무 행복해 보이는걸.”
내가 곁에 없는데도, 지독하게.
발레리안은 뒷말을 삼킨 채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칼로 찌르는 듯한 그의 시선에 이브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나라고 이런 삶을 원했던 건 아니야.’
제가 원할 때 가족들을 보지도 못하고 사는 것이, 과연 온전하면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일까.
단지 자신의 비밀이 밝혀질까 불안에 떠는 것보단 마음이 편한 쪽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왕 떨어져 사는 거, 가족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고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 행복했어.”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면 그의 동정이라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요구도 물러 줄 수도 있겠지.
그녀는 발레리안의 마음에 남은 선함을 믿었다.
그러나 이브는 동정보다는 자존심을 선택했다. 스스로가 원치 않는데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은 이젠 지긋지긋했다.
‘이미 너한텐 성녀가 있잖아.’
발레리안과 이유리는 누구에게도 박해받을 일도 없고, 모든 사람의 칭송에 둘러싸인 채 누리는 행복한 삶이 예약되어 있었다.
반면에 이브, 그녀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마법사라는 게 밝혀지면…… 그 상상을 하는 것도 이제 지루하고 짜증 났다.
“행복했지. 적어도 여기서 널 만나기 전까지는.”
이브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도 그의 표정엔 큰 변화가 있진 않았다.
하지만 이브는 그의 눈빛이 흔들린 걸 보았다. 그의 동요를 알아차린 이브가 곧장 쏘아붙였다.
“내 행복을 깨고 싶다면, 그래. 원하는 대로 끌고 가, 발레리안.”
루비색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스쳤다.
“정말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면.”
그녀가 말하는 바는 진심이었다.
그 목소리에 실린 진심을 읽은 발레리안의 평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굳건했던 가면이 유리 조각처럼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얼굴이 잔뜩 하얗게 질린 그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내가 더 설명할 의무는 없지 않을까?”
이브가 여상히 말했다. 발레리안이 더 묻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말을 그녀가 허투루 내뱉지 않는다는 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이만 물러나겠지.’
이브는 그가 그녀의 죽음까지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한동안 고요히 흐르던 침묵을 깨트린 건 노크 소리였다.
“샬럿! 배고프지? 네가 좋아하는 포크수프를 많이 가져왔……. 어머. 안에 기사님도 계셨네?”
마침 식사를 들고 온 벤리 부부가 어색한 시선으로 이브와 발레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발레리안은 인사도 없이 벤리 부부 곁을 스쳐 지나 치료실을 나갔다.
“어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거릿은 그들 사이를 오해한 모양인지 얼굴을 붉히며 호호, 웃었다. 이브는 그런 그녀의 손에 들린 음식을 보았다.
음식 냄새가 이렇게 거북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죄송하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서…… 오늘 식사는 힘들 것 같아요.”
벤리 부부는 그녀의 말에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샬럿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들의 수고스러움보단 식신으로 유명한 샬럿이 음식을 마다한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벤리 부부는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걱정에 휩싸였다.
* * *
다소 늦은 아침에 발레리안이 성국으로 들어왔다.
그 행보가 꽤나 이례적이었던지라 신전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몰렸다.
한편 아침 산책을 하지 못한 이유리는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리안이 왔다고요?”
그가 복귀했다는 소식에 냉큼 침대에서 일어난 유리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사제들의 말대로 그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오늘은 왠지 그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꼈다.
‘안 좋은 일이 있던 걸까?’
늦게 온 그에게 볼멘소리를 늘어놓으려 했던 유리는 그의 기색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에게 다가온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묘하게 그늘이 져 있는 그의 모습을 흘끔거린 유리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늦을 수도 있지. 오히려 늦어서 큰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는데 멀쩡해서 다행이지, 뭐야. 나는 그보다 더 서운한 게 있는걸?”
“……?”
그가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보자, 유리는 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우리 편하게 말 놓기로 했잖아!”
“아, 미안해.”
장난스레 말했는데 그의 얼굴엔 작은 웃음기도 돌지 않았다. 그늘이 짙게 깔린 채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잠시 망설이던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의 생활을 일거수일투족 보고해 주렴.’
성녀가 강림하자마자 그에게 내려진 대주교 아리엘의 명.
차라리 내려진 임무라도 집중해서 이브의 말을 잊고 싶었다.
“내 행복을 깨고 싶다면, 그래. 원하는 대로 끌고 가, 발레리안.”
“…….”
“정말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면.”
절로 떠오르는 이브의 말에 발레리안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곱씹을수록 끔찍하고 아득한 기분에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로 가슴에 비수가 꽂힌다는 감정이 무언지 알게 되었다.
그러다 불현듯 그녀가 그런 말을 뱉은 이유가 무언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설마 악마 새끼들이.’
아직도 이브를 괴롭히고 있단 말인가?
그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
* * *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리안,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유리의 물음에 발레리안은 아니라며 좋은 밤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성녀의 방을 떠났다. 혼자 방에 남은 유리는 찝찝한 기분에 휩싸였다.
온종일 발레리안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했다.
답답한 마음에 호위도 없이 대신전을 돌아다니던 유리는 기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매일 밤중에 단장님은 대체 어딜 가시는 거지?”
“순찰을 하기엔 너무 어두운 시간인데 말이야.”
“오전에 돌아오실 때마다 단장님의 말이 엄청 지쳐 있던데.”
유리는 직감했다. 발레리안이 밤마다 먼 곳을 다녀오고 있다는 것을. 그럼 그는 어디에 다녀오고 있는 거지?
한편 마물의 숲에 도착한 발레리안은 달빛 아래서 퍼런 안광을 빛내며 성검을 발검했다. 이 새벽 중에 보이는 악마와 마물들은 족족 죽이고 말리라. 거의 화풀이였다.
새벽에 때아닌 짐승 소리와 비명 소리가 숲에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