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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38화 (38/100)

38화

“아론!”

이브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아무래도 돌에 머리를 제대로 박았는지 꿈쩍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브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론은 저대로 기절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달려드는 마물을 본 이브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리 와! 이 미친놈아!”

마물의 신경을 이쪽으로 돌리기 위해 그녀는 주변에 있던 돌을 마물에게 던지며 욕을 했다. 그 효과가 있었는지 아론에게 다가가던 마물이 일순 행동을 멈추었다.

이어 마물은 몸을 돌려 이브를 노려보았다. 크르르르-.

‘으, 면상 한번 살벌하게 생겼네…….’

정면에서 보니까 더 징그러웠다. 길게 쭉 찢어진 입 안에 빈틈없이 빼곡히 박힌 이빨은 한 번 물리면 뼈가 아작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발레리안이 어깨를 다친 거였나.’

심지어 발레리안이 토벌을 나가는 지역엔 이런 마물과 악마들이 한둘이 아니라, 떼를 지어 다녔다.

새삼 이런 녀석들과 숱한 전투를 치르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하나만 목도해도 손발이 떨리는데 말이다.

“와 보라니까?”

이브가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빠르게 움직이는 마물을 따라 마법을 사용하기엔 그녀의 마법이 아직 정확성이 떨어졌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오면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마물은 그녀를 쉽사리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거리를 두고 이브의 모습을 빤히 노려볼 뿐이었다. 굴 안에선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막 달려들었지만, 밝은 곳에 나오니 상대를 이길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마물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아론에게 향했다. 표적이 다시 바뀐 것이다.

‘그건 안 되지!’

방망이를 든 이브가 마물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우선 마물을 기절시키거나 행동 불능 상태로 만들 작정이었다.

-퍽!

정확히 마물의 머리통을 노린 일격이 예상보다 적중했다.

-깨갱!

사람이라면 머리가 부서졌을 텐데 생각보다 마물의 머리통은 단단했다. 그 타격에 고통스러웠는지 마물이 침을 흘리며 앞발을 휘둘렀다.

이브는 빠르게 그 공격을 피했지만, 그만 돌부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앗!”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마물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마물은 곧바로 바닥을 박차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이브가 손을 내밀어 주문을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푹!

살점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마물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쾅!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지자 주변 지반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이브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런데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 눈앞에 성검을 든 발레리안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발레리안?”

해를 등진 채 역광을 받은 그는 여전히 숭고하고 아름다운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절대 그를 이곳에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이브는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 * *

“어머, 아론!”

발레리안과 이브가 마을로 내려오는 걸 지켜보던 마을 주민들은 발레리안 등에 업힌 아론의 모습을 발견하곤 기겁했다. 버나드가 의원을 부르러 간 사이, 마거릿과 벤리가 이브의 모습을 살폈다.

“샬럿! 괜찮은 거니?”

“다친 곳은 없느냐!”

그들이 마치 부모님처럼 걱정해 주자, 이브는 쑥스러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멀쩡해요.”

“내가 괜히 데리고 가서…… 정말이지, 미안하다!”

처음 보는 벤리의 약한 모습에 이브는 더욱 손사래를 쳤다.

“누가 마물이 나올 줄 알고 산에 가요. 괜찮아요.”

“큰일 날 뻔했어! 마침 기사님을 만나서 망정이지!”

마거릿도 눈물을 글썽이며 이브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다가 문득 마거릿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호기심과 관심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이브 옆에 있는 발레리안에게 향했다. 현재 발레리안이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그가 기사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기사님은 누구신지 혹시 아니?”

“아, 아뇨……. 그냥 우연히 산에서 만나서 우리를 구해 주셨어요.”

이브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발레리안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하며 사례를 하겠다고 말했다. 발레리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당연한 의무에 사례는 필요치 않습니다.”

“어머…….”

그야말로 기사다운 정직한 태도에 주변에 있던 마을 주민들이 탄성을 흘렸다. 대부분은 아주머님들이었다. 그들 곁에 있던 남편들은 괜히 헛기침만 하면서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브가 어색한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다급히 말했다.

“그럼 저는 집에 가서 조금만 쉴게요.”

“잠시만.”

발레리안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

그제야 알싸한 통증을 느낀 이브는 인상을 찡그렸다. 뒤늦게 이브의 팔에 난 상처를 발견한 마거릿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샬럿! 이 상처는 뭐니? 빨리 소독하러 가자꾸나!”

이브도 뒤늦게 제 팔꿈치에 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바닥에 갈린 것 같은 상처는 한눈에도 쓰라려 보였다. 아무래도 방금 마물을 피하면서 넘어질 때 난 상처인 듯했다.

“이 정도는 그냥 약만 바르면 나아요. 괜찮아요.”

이브는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마거릿은 이브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안 돼! 이런 상처를 놔두다간 덧날지도 몰라!”

“그래, 샬럿! 어서 치료받으러 가거라.”

벤리 아저씨까지 합세해서 이브에게 치료를 받으라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이브는 그들을 따라 의원 집으로 향했다.

뒤를 힐끔 보니 발레리안은 마을 병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발레리안은 여기에 무슨 일이지?’

여유를 찾은 이브는 의문점을 떠올렸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자연스레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혹시…… 날 보러 온 걸까?’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의 곁에는 이미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유리가 있지 않나.

‘근데 왜 하필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다문 채 벤리 부부를 따라 걸어갔다.

아론을 진찰한 뒤, 진료실에 앉아 있던 의원은 이어 들어온 환자를 보곤 깜짝 놀랐다.

“허어, 이번에도 젊은이가 다친 건가? 이러다 마을에 늙은이만 남겠수, 끌끌끌.”

“그런 일 없게 잘 좀 봐 줘요.”

마거릿이 이브를 의원 앞에 앉혔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서 소독 과정 또한 길지 않았다.

밴드로 족한 일인데 붕대까지 두르게 된 이브는 잠시 쉬라며 떠밀리듯 치료실에 들어왔다. 벤리 부부는 식사를 가져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아차, 아론의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는 걸 잊었네.”

치료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아론은 입원실 침대에 누워 있을 터였다.

문을 열려고 했던 이브는 앞서 문이 열리자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을 어색하게 거두었다. 그리고 밖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이브는 당황했다.

“아…….”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어?”

발레리안이 그녀를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들어오라는 뜻이다. 치료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문을 닫고 그녀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팔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가벼운 상처야.”

“……그래.”

그의 대답은 오랜만에 만난 인연이라고 하기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브는 차분히 마음을 추슬렀다.

‘난 전 약혼자일 뿐이니까.’

그가 그녀에게 다정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관계인 것과 별개로 그녀가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아까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왜인지 입술이 안 떨어졌다.

이제 그녀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 낸 그의 모습을 보니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이브는 일부러 태연한 척 말을 건넸다.

“아까 구해 줘서 고마워.”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는 그의 반응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이번엔 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는 걸까?

아까 마을 주민 앞에서 보인 태도랑 너무 상반된 반응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이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보던 발레리안이 치료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다소 오만한 작태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어울려서 더 기분이 묘했다.

‘루드비히 공작님을 보는 것 같네.’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디에고 루드비히의 아들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발레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뿐인 고마움인가?”

“……뭐?”

“원래 고마움을 표할 땐 사례를 하잖아, 이브.”

발레리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태양처럼 눈 부시고 바다처럼 청량한 미소였다. 그러나 방금의 말로 인해 이브는 저 미소가 마냥 순수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아, 여기선 샬럿인가? 그럼 나도 샬럿이라고 부를게.”

지금 이 순간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브는 당황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혼잣말을 이어 갔다.

“근데 역시 샬럿보다는 이브 쪽이 입에 붙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성미가 급한 이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발레리안의 얼굴에 복사꽃같이 싱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목숨을 구해 준 대가는 톡톡히 받아 낼 생각이야.”

그녀를 보는 푸른 눈동자는 쾌청하기만 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뭘 받아 내고 싶은 건지 빨리 말해 주겠어?”

이브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기실 그가 구해 주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마법을 사용해 제압할 수 있었다.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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