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샬럿, 샬럿!”
이제 막 동이 튼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이른 여름 새벽.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이브는 비적비적 일어났다.
“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녀의 옆집에 사는 마거릿 부인이었다.
어떤 급한 일이길래 마거릿이 이리 애타게 부르는 건지.
겨우 침대에서 벗어난 이브는 눈곱도 떼지 못한 채 문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돼지감자 모종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나마 예상이 되는 건 작물의 문제였다.
이브가 문을 열자, 마거릿이 분개한 얼굴로 열통을 터트렸다.
“샬럿! 내가 정말 못 살겠다! 이 멧돼지 녀석들 때문에!”
마거릿과 벤리는 간밤에 멧돼지 떼가 나타나서 작물들을 망가뜨렸다고 설명했다.
“제가 심었던 모종까지 전부 파헤쳤다는 말이에요?”
“그래그래!”
“아…… 망할.”
이브는 뻐근한 목덜미를 잡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일했던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는 뜻이구나. 쌍욕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이참에 이 멧돼지들을 사냥해 보려고 한다.”
“지금 이 시간에요?”
“방금 파헤친 작물로 포식해서 자고 있을 게다. 요 녀석들의 활동 시간이 보통 저녁에서 밤 사이니까 그 전에 소굴을 찾아내서 우리가 빠르게 일망타진하는 게야!”
자신보다 큰 삼지창을 든 벤리가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쭉 폈다.
“조심하세요, 벤리 아저씨. 그러다가 저번처럼 어깨를 다치면 어떡하시려고요.”
이브는 그런 그가 든든하기보단 걱정되었다. 요 근래 자잘하게 그의 관절에 문제가 생긴 터라 삼지창을 들고 있는 모습마저 불안해 보였다. 마거릿도 한술 거들었다.
“그래요, 벤리! 샬럿의 말을 들어요.”
벤리도 끄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삼지창을 내려놓았다.
“그래, 이런 일을 하기엔 내가 많이 늙긴 했지.”
“이런 일은 역시 샬럿이 제격이에요.”
아니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이브는 당황한 시선으로 마거릿과 벤리를 보았다.
자신에게 일을 떠넘기는 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아무래도 이분들이 작정하고 온 듯했다. 이브는 입술을 실룩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혼자서는 못 해요.”
“우리가 어떻게 너만 혼자 보내겠니? 우리도 함께 갈 거란다.”
“그래, 아론은 이미 대기 중이지.”
“아론이 벌써 준비를 끝냈다고요?”
“알다시피 우리 마을에 청년이라곤 아론이랑 샬럿, 너뿐이잖니. 호호.”
이미 그녀의 참여는 기정사실이 된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준비하고 나올 테니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브는 한숨을 삼키며 멧돼지 토벌을 위한 채비를 꾸렸다.
아론까지 준비를 마쳤다면 이 멧돼지들이 전방위로 피해를 끼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 빨리 해치워 버리자.’
여태까지 그 귀한 농작물까지 망가뜨린 주범이 멧돼지라면 응당 응징을 해 주어야 하는 법.
이브는 무기라고는 작은 칼밖에 없어서 벤리한테 방망이를 빌렸다.
그들이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산 입구로 향하자,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아론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일을 따라 농사를 해서 그런지 아론은 체격이 크고 단단했다.
그녀를 발견한 아론이 당황했다.
“벤리 아저씨. 이 새벽에 샬럿을 산으로 데려간다고요?”
“이런 일에 샬럿이 빠질 수 있나. 하하!”
벤리는 이브의 등을 팡팡 두들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브는 심드렁한 시선으로 벤리가 준 나무 방망이를 들여다보았다.
“이 방망이는…… 과연 멧돼지만 팰 수 있을까요?”
그녀의 스산한 어조에 흠칫한 벤리가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렇게 잠시 뒤, 마거릿이 추가 인원을 데려오고 이브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곤란한 상황에 봉착했다.
“여기 웬 발자국이 이렇게 많죠?”
“그러게나 말이야. 이렇게 되면 멧돼지 발자국인지 다른 짐승 발자국인지 헷갈리는데…….”
이브는 어디서 많이 본 발자국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보았더라. 분명 낯익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렇게 여럿이 함께 찾는 것보단 팀을 짜서 움직이는 게 낫겠군.”
이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버나드가 제안했다. 마을 사람들과 이브도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이런 식이면 종일 수색을 해도 멧돼지 털 한 가닥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샬럿이랑 아론이 한 팀, 벤리와 내가 한 팀…….”
간략하게 두 명씩 팀을 짰다. 여기는 호랑이가 없는 산이었기에 위험한 야생동물은 멧돼지나 늑대 정도였다.
그러나 요새 늑대는 산에서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간 건가.’
이 산이 다른 산에 비해선 먹을 것이 없는 편이긴 했다.
그래서 이 멧돼지들도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오는 거겠지. 생각해 보면 조금 딱한 사정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불쌍하다고 언제까지 농작물을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브는 손에 있는 방망이를 꽉 쥐며 아론과 함께 산길을 수색했다.
“이런 발자국들은 처음 봐.”
아론은 바닥을 보며 이브에게 물었다.
“샬럿은 본 적 있어?”
“음……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 나.”
이브도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완전히 멧돼지의 발자국이 묻힌 건 아니라, 수색에 큰 난항이 있진 않았다.
“저기 아니야?”
한참 산을 돌아다니던 그들은 흙으로 된 굴을 발견했다.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은데.”
“꽤 커 보여. 우리 둘이서 타진할 수 있을까?”
굴 안쪽을 보고 싶어도 어두워서 쉬이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옆에 아론이 없더라면 마법으로 어떻게 해 보겠지만, 지금은 오로지 그녀의 힘으로만 제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브가 아무리 성인 남자보다 힘이 세다고 해도, 멧돼지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잠깐만, 굴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멧돼지 굴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이브는 바짝 긴장했다. 그럼 멧돼지가 깨어 있다는 뜻인가?
“정확히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이브가 묻자, 다시 소리에 집중하던 아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뭘 씹어 먹는 소리가 들리는데, 과일이라도 먹는 건가?”
씹어 먹는 소리? 이브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도무지 과일 씹어 먹는 소리로는 안 들리는데.’
뼈가 으적으적 씹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저게 과일을 씹어 먹는 거란 말인가.
야생동물이라도 사냥해서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으레 사람이든 동물이든 무언가를 먹고 있을 때가 가장 무방비한 상태일 터. 이브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굴 안에 멧돼지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지금 습격하는 게 좋겠어.”
“지금? 그래!”
아론은 이브가 하자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보다 그녀가 더 똑똑한 편이었으니 그녀의 의견을 따르는 게 편했다.
실실 웃고 있는 아론을 보며 이브는 계획을 세웠다.
‘굴 안에서 무슨 일 생기면 아론부터 기절시키고 마법으로 처리하지 뭐.’
이브의 방망이가 잠시 아론의 뒤통수를 향했다. 잠시 휘두르는 모션을 취하며 각도를 가늠하던 이브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이 정도면 사람이 죽진 않겠지?’
혼자 고개를 끄덕인 이브는 아론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였다.
“가자.”
아론과 이브는 대각선의 구도로 서서 굴 쪽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그러나 굴 안에 들어가고 으적으적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썩은 내가 진동했다.
“윽!”
결국 참지 못한 아론과 이브는 코를 움켜쥐었다. 짐승의 피비린내와 섞여서 불쾌한 냄새가 났다.
이상함을 감지한 아론과 이브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론이 불안한 시선으로 이브에게 눈짓했다.
‘앞으로 더 갈까?’
이브가 고민하는 사이, 굴 안에서 터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브와 아론은 곧바로 경계 태세에 돌입하며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꽉 쥐었다.
-타타탁!
그 순간이었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무언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내 커다란 무언가가 아론을 향해 돌진했다.
“크르르…….”
이브는 빠르게 아론의 소매를 붙잡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검은 짐승이 아슬아슬하게 아론의 몸을 비껴 나갔다.
“윽!”
그녀의 도움으로 검은 짐승은 피했지만, 그녀의 무지막지한 완력에 아론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부딪힌 곳이 아팠는지 그는 신음을 흘렸다.
이브는 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보며 힘 조절을 잘못했다는 사실에 미안해졌다. 그러나 사과를 할 틈이 없었다.
다시 한번 그 짐승이 아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브가 짐승의 몸을 방망이로 세게 후려치며 소리쳤다. 퍽!
“아론! 빨리 달려!”
그러곤 냅다 굴 밖으로 뛰었다. 굴 안은 너무 어두웠다.
그곳에서 습격이 아닌, 경계가 바짝 든 짐승과 마주 싸우는 것은 불리하고 무모한 행위였다.
“이건…… 대체 뭐야!”
이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뛰쳐나온 아론은 같이 튀어나온 짐승의 모습을 보곤 질겁했다.
이브도 굴 밖에 모습을 드러낸 짐승을 보고 몸을 굳혔다.
아니, 산짐승이 아니었다.
“……마물?”
커다란 덩치와 검은 털, 빼곡하게 박혀 있는 흉측한 이빨 사이로 흐르는 검은 액체. 검붉은 발톱엔 짐승의 살점이 얼기설기 붙어 있었다.
네발로 서 있던 마물은 이제 두 발로 서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마치 늑대 인간 같은 모습이었다.
“크르르르-. 크르르릉!”
바짝 얼어 있던 아론과 이브를 향해 마물이 먼저 달려들었다.
“윽!”
마물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아론이 마물의 발톱에 어깨를 다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억!”
그때 하필 바닥에 있던 돌부리에 머리를 부딪친 그가 그대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