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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36화 (36/100)

36화

대신전 뒤뜰에 있는 정원으로 온 이유리는 양팔을 벌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유리가 가벼운 몸짓으로 폴짝 뛰며 뒤로 돌았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몸짓을 따라 찰랑거렸다.

“리안은 늘 밖에 있으니까 안에만 있는 기분은 모르죠? 칫. 아마 모를 거야.”

그녀는 그가 부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조차 사랑스럽고 귀여운 고양이 같았다. 그녀를 본 발레리안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녀께서 원한다면 외출 요청을 하겠습니다.”

“원한다면 요청하겠습니다?”

그대로 발레리안의 말투를 흉내 낸 이유리는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옆에 종일 붙어 있는데 말투가 너무 삭막해요. 리안, 나랑 나이도 별로 차이 안 나잖아요. 몇 살이라고 했었죠?”

“……올해로 스물두 살입니다.”

“나랑 세 살 차이네.”

그녀가 리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한국에선 이름을 두 자리로 말하는 게 친숙하다고 강조해 겨우 얻어 낸 호칭이었다.

이유리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제 손바닥을 마주쳤다.

“이참에 우리 단둘이 있을 때는 반말하는 게 어때요? 어차피 나이도 비슷한데 이런 말투는 너무 불편하지 않아요?”

“……그건 곤란합니다.”

부드러운 용모와 다르게 그는 생각보다 단호했다.

그의 난색에 유리가 흐응,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제가 어려서 그런 거라면 리안만 반말해도 괜찮아요.”

“성국의 법도가 그렇습니다.”

발레리안은 차분히 대꾸했다.

뒷짐을 진 유리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기 편한 자리로 한 발 옮겼다. 그의 시선이 자연히 그녀에게 닿았다.

“리안은 혼자 낯선 세계에서 떨어진 기분을 알아요?”

“…….”

“되게 무섭고 외로웠어요. 왜냐하면 이곳에 온 뒤로 그 이전에 있던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거든요. 거기다가 낯선 사람들만 주위에 있고.”

생기발랄하기만 하던 유리의 얼굴이 처음으로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제 옆을 지켜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든든하다는 걸 이제 와 알았지 뭐예요.”

“……그렇군요.”

발레리안은 이유리의 말을 진중한 얼굴로 경청했다. 그녀는 애꿎은 바닥을 툭툭 치며 쑥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리안이 내 친구가 되어 주는 건 힘들까요?”

“…….”

그녀가 간절하게 부탁하자,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에 고민의 빛이 스쳤다.

……만약 이브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브는 정에 약했었지.’

겉으론 자존심이 강해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던 이브는 늘 도도한 미소를 달고 살았다.

그러나 이따금 사정이 힘든 사람이 주변에 생기면 마음이 쉽게 약해져 결국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도와주었다.

이브는 그런 사람을 지나치고 무시하는 걸 찝찝하게 여겼다.

그는 그런 그녀를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세간에서 친절하다고 알려져 있던 그는 오히려 누군가 어려운 사정을 부탁하면 쉬이 도와주지 않았다.

당연하게 숨은 목적이나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게 루드비히 공작 가문의 자식으로서, 엘라의 자식으로서 습득한 습관이었다.

그리고 이브를 만난 뒤로, 그 습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듯이 사소한 습관부터 이브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

이브를 떠올린 발레리안의 눈빛에 잠시 고통이 스쳤다.

처음엔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욕심이 들었다. 그녀의 애정 어린 눈빛이 그에게 향했으면 좋겠고, 오직 그를 향해서만 웃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유리가 발레리안과 시선을 마주쳤을 땐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아마 이브라면 흔쾌히 성녀의 친구가 되어 주었을 터였다.

친절을 머금은 발레리안의 눈이 말갛게 휘었다. 유리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잠시 넋 놓고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한순간 외모에 정신이 팔린 자신이 부끄러워 빨간 사과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런 일련의 모습조차 그녀와 어울렸다.

“……정말? 고마워! 리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이유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눈이 곱게 휘었다.

“그럼 리안도 날 유리라고 불러 줘!”

기분 좋게 산책을 마친 유리는 발레리안이 훈련장에 있는 동안 흥얼거리며 기도실에 들어갔다.

‘너무 좋아.’

드디어 발레리안과 거리를 한 발 좁혔다는 사실에 유리는 그저 기뻤다. 그녀를 알아본 신도들과 사제들이 인사를 건넸다.

“성녀님께 태양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길.”

“이렇게 뵈어서 너무 감격스러워요…….”

어떤 이는 경애하는 시선으로 성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유리는 멋쩍은 얼굴로 악수를 청하는 신도들에게 친절히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이곳에 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 모습을 사제들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유리는 소녀 특유한 생기가 있으면서 은근히 기품도 흘렀다. 그들이 딱 상상하던 성녀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제라도 엘라 님의 옆에 성녀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한 신도가 진심으로 다행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말갛기만 했던 신도의 표정이 돌연 증오로 일그러졌다.

“그때 저번의 그년은 엘라 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몹쓸 짓을 했지요…….”

“신도님.”

사제들이 깜짝 놀라 신도의 말을 막았다. 말을 하던 신도는 화들짝 놀라며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신성한 성전과 성녀님 앞에서 이런 불경스러운 언사를 하다니.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아니요……. 괜찮아요.”

과할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사과하는 신도의 모습에 유리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저번의 그년? 몹쓸 짓?’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왠지 발레리안과 연관된 이야기 같은데, 유리는 아직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

사제의 만류에 자리를 떠나는 신도를 지켜보던 유리가 옆에서 상황을 목격한 사제를 붙잡았다.

“사제님,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어머, 그럼요!”

당연히 성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사제는 성녀가 저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 하나에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리는 사제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교리실로 들어왔다.

이 교리실을 이용하는 교황과 아리엘 대주교는 다른 볼일로 한창 바쁠 때라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어떤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세요?”

사제는 금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성녀의 면면을 살폈다. 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신도님이 하시던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요.”

“아, 성녀님이 들으시기에도 많이 교양 없는 말투였죠? 꼭 시정하도록 할게요.”

사제는 아까 그 신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한지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그게 아니라…… 리안과 관련해서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던 것 같아서요.”

“아…… 그.”

사제의 눈빛에 경멸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금 신도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럼 이 사제도 그 이야기를 아는 게 틀림없었다. 유리는 사제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세요.”

“하지만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개인사라서……. 죄송해요, 성녀님.”

사제는 소극적인 얼굴로 난감하다는 듯 눈을 굴렸다.

“아……! 저야말로 곤란하게 해서 죄송해요!”

유리는 제 실수를 이제 눈치챘다는 듯 자책했다.

“혹시 제가 무지에서 비롯된 말실수를 해서 리안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여쭤봤는데…… 사제님을 곤란하게 만들 거란 생각을 못 했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이유리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사제의 눈가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어쩜, 이렇게 착하고 사려가 깊으실까!

“사실은요…….”

잠시 고민하던 사제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유리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녀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유리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약혼녀가 배신하고 도망갔다고요?”

“네, 루드비히 경께서 정말 좋아하셨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까워요.”

사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 숨을 뱉은 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대체 이름이 뭔데요?”

그 순간, 유리는 발레리안이 너무 안쓰러워졌고, 얼굴도 모르는 그 전 약혼녀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에스텔라 백작 가문의 여식이요. 이브 에스텔라.”

“……이브 에스텔라?”

유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제는 그녀의 반응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성녀님은 귀족 영애가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할 거라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사제는 혹시라도 순수한 성녀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사람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게 믿음인데, 어떻게 그리 쉽게 믿음을 저버릴 수 있는 거죠?”

유리는 발레리안이 안타깝다는 듯 분통이 잔뜩 어린 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요, 우리 같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지요.”

사제도 고개를 저으며 유리의 말에 동조했다.

유리는 발레리안과 함께 지낸 시간을 떠올렸다.

한 달 동안 같이 있었지만 발레리안은 보통 사람보다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일을 최근에 당했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발레리안을 잘 위로해 줘야지!’

유리는 퍼즐처럼 맞춰지는 지난 한 달간의 일을 되새기며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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