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렇구나.”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있던 원작이 현실로 실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 딱 이맘때쯤이네.’
원작 여주, 성녀 이유리가 대신전에 강림하는 시기. 원작에서 말하던 시기와 딱 맞물려 떨어졌다.
‘이럴 땐 기가 막히게 원작이 딱 맞아떨어지네.’
원작에서 이브의 정체가 적힌 복선을 앞부분에 넣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와선 무의미한 한탄을 속으로 잠시나마 생각했다.
“그러면 발레리안이 성녀의 호위 기사가 되었겠네.”
“어……. 맞아.”
노아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 이브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하려고 했던 소식이 그건데, 어떻게 알았어?”
지금 노아는 당연한 걸 묻고 있었다.
“100년 만에 강림한 성녀의 호위인데 제국의 최고 실력자가 맡아야 하지 않겠어?”
이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성녀가 강림하기 전에 이곳으로 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마 발레리안은 이유리와 사랑에 빠지겠지.’
전국에 숨어 있던 악마들의 표적이 이유리가 되면서, 발레리안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숱한 전투를 치르게 될 터였다.
고난과 역경을 넘나들고, 위기 속에서 꽃 피우는 사랑이라.
꽤나 로맨틱한 전개였다.
“그런데 그게 왜?”
그녀의 물음에 노아가 굳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성녀가 사람의 마력을 볼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원작보다 능력이 더 빠르게 각성한 모양이었다. 이브의 붉은 눈동자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어차피 마주칠 일도 없는걸.’
하지만 원작보다 전개가 빠르다는 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브가 중얼거렸다.
“……절대로 성녀 앞에선 얼씬도 하면 안 되겠어.”
“놀라지도 않아? 설마 알고 있었냐?”
생각보다 노아의 눈치가 빨랐다. 이브는 대답 대신 케일 주스를 마셨다. 그녀의 집 앞 텃밭에서 손수 기른 케일이라 신선하고 건강한 맛이 일품이었다.
“뭐? 어떻게 알고 있었는데?”
“몰랐어. 그냥 신의 대리자인 성녀가 그런 능력을 하나 갖고 있다는 게 별로 놀랍지 않은 것뿐이지.”
그녀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노아는 묘하게 마음이 걸렸지만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거처를 잡은 건 좋은 선택이었네. 그럼 간다.”
“그래.”
이브는 노아 쪽은 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대꾸했다.
문이 탁 닫히고 집에 홀로 남은 이브는 생각에 빠졌다.
“성녀가 강림했다고…….”
이미 원작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녀가 급하게 발레리안을 떼어 놓고, 가족에게만 알린 채 이 마을로 온 이유도 그에 있었다.
그렇게 단단히 대비하며 머리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걸 알고 있었는데, 마음은 새삼스러운 사실을 접한 것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야트막한 한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
원작의 주인공들끼리 지지고 볶든, 이제 내 알 바 아니다 이거야.
한편, 마차에 올라탄 노아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와, 어떻게 자고 가란 말도 안 하냐?”
기껏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이 먼 길까지 와 주었거늘. 냉랭한 동생의 반응을 떠올린 그는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아직도 그 일들을 마음에 담아 두는 건가?”
어릴 때, 그가 이브를 좀 짓궂게 괴롭혔던 건 인정했다.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그녀를 향한 부모님의 일방적인 과보호와 관심이 아니꼬웠던 탓이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으니까.’
만약 그가 진실을 알았다면, 이브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노아는 괜히 찝찝하고 후회스러워 창밖만 보았다.
“……어?”
바깥 풍경을 보며 경치를 관람하던 그는 익숙한 인영에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언제 길에 사람이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 그 녀석 같았는데?’
태양을 빚어 놓은 듯한 금발 머리에 고지식할 정도로 청푸른 눈동자를 가진 성기사. 발레리안 루드비히.
그러나 곧 노아는 한숨을 내쉬며 창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 녀석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대신전 안에서 성녀 옆에 있을 녀석이 여기에 있다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 * *
아침 햇살 아래.
창살을 뚫고 들어온 강렬한 햇빛으로 한 여인이 몸을 뒤척였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뽀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들어 올렸다.
눈꺼풀 속에서 드러난, 밤하늘을 담은 듯한 흑요석 눈동자는 신비하고 오묘한 빛을 띠었다.
바로 세간의 화제가 된 성녀 이유리였다.
그녀는 익숙하게 제 주변을 살피곤 입술을 열었다.
“……리안은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성녀를 옆에서 보좌하는 사제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이유리는 무언가 허전한 느낌에 입술을 오물거렸다.
“시장하신가요? 금방 아침을 가져오겠습니다, 성녀님.”
“괜찮아요, 아! 아침 산책 좀 하고 싶어요!”
이유리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와 또래인 여자 사제가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성녀님의 안전상 문제로 기사님이 오실 때까진 외부에 나가실 수 없어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이유리는 탄식을 흘렸다. 검은 속눈썹이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창밖에 시선을 돌린 검은 눈동자는 실망으로 물들었다.
“아침에 맞는 공기가 정말 좋은데, 아쉬워요.”
“죄송합니다, 성녀님.”
사제의 사과에 이유리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사제님의 탓도 아닌걸요.”
지저귀듯 울리는 성녀의 웃음소리는 마치 종달새처럼 맑고 청량했다. 누구도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였다.
“그럼 세숫물 좀 가져와 줄래요?”
고개를 끄덕인 사제는 조금 긴장이 풀린 얼굴로 세숫물을 가져왔다. 세수를 마친 이유리가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음, 이제 조금 배고픈 것 같아요.”
“아!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잠시 후.
사제가 가져온 식사를 본 이유리가 씨익 웃으며 사제를 보았다.
“같이 먹어요. 사제님.”
“아! 제가 어떻게 성녀님과 겸상을…….”
“음, 아까 사제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분명 들렸는데요?”
“아, 그건…… 성녀님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사제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이유리는 그녀에게 팔짱을 끼며 제 앞에 앉혔다.
“사제님, 같이 안 먹으면 저도 안 먹을 거예요!”
“……! 안 돼요! 그러다 행여 건강이라도 해치시면 어쩌려고!”
“사제님의 건강도 저한테는 너무너무 중요해요.”
이유리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사제는 고민하다가 수저를 들었다.
“그럼 제가 먹으면 꼭 드셔야 해요……!”
“사제님이 잘 드시면 저도 잘 먹을게요.”
이유리는 장난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 사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곤 수프를 한 입 먹었다.
“……와, 정말 맛있어요.”
“그렇죠? 저만 이렇게 맛있는 거 먹으면 그렇게 아쉬운 일이 없어요!”
이유리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왜요?”
“이렇게 맛있는 건 같이 먹어야 제일 맛있거든요.”
그녀가 찡긋 웃으며 말했다. 사제는 그녀를 따라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편안한 식사 시간이 흘렀다.
-똑똑.
“들어오세요!”
이유리의 명랑한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한 기사와 사제들이었다. 그중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이유리가 활짝 웃으며 팔을 휘저었다.
“리안! 좋은 아침이에요!”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사제들이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발견한 발레리안이 이유리에게 다가왔다. 햇빛 아래 있는 성녀와 발레리안은 신비로우면서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세상의 빛이 그들에게만 몰린 듯한 독보적인 존재감이었다.
제 본분도 잊었는지 사제들은 넋 놓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발레리안은 미안하다는 듯 이유리에게 말했다.
“성녀님, 미안합니다. 오늘은 오전 순찰이 조금 늦어졌었습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난 리안이 새벽마다 이렇게 부지런히 민생을 위해 신경 쓰는 모습이 대단한걸.”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의 눈매가 곱다랗게 휘었다.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미소에 이유리는 마주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기사님. 아까 못한 아침 산책을 지금 해도 될까요?”
유리는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발레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그 손에 머물렀다.
“성녀님의 본부라면.”
발레리안이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로 내밀어지지 않은 손에 머쓱하게 손을 물리려던 이유리는 그 손에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각오하세요. 아침에 못 했던 몫까지 오래 걸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