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샬럿! 지금 일어났니?”
누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이브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대충 겉옷을 걸쳐 입은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시골의 맑은 공기가 폐부에 훅하고 들어왔다가 나갔다.
창밖엔 그녀가 일군 작은 텃밭이 있었다. 농사를 짓는다고 하기엔 소박한 규모였지만 그녀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진작 내려와서 살걸.’
이브는 이 평화로움이 너무 좋았다.
남부로 내려와 나딘 마을에 정착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처음에 부모님과 노아가 걱정했지만, 그녀는 놀랍게도 이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잘 적응했다.
나딘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텃세 하나 없이 친절한 것도 한몫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문을 연 이브는 익숙한 얼굴에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마거릿.”
“글쎄나, 이번에 우리 바깥사람이 가져온 모종 좀 한번 보련?”
마거릿은 친숙한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이브의 눈에 반짝하고 이채가 돌았다. 이 아침부터 모종을 보라고 하는 거라면 굉장한 품질의 모종이 들어왔을 게 분명했다.
“빨리 보러 가요!”
이브는 마거릿을 재촉하며 쭐레쭐레 따라갔다. 그러자 마거릿의 남편이자 농장의 주인인 벤리가 그들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이브는 그가 들고 있는 모종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모종이에요?”
척 보기에도 상태가 최상급인 모종이었다.
“샬럿, 이거 보거라. 돼지감자 모종이야. 그 구하기 힘들다는 돼지감자!”
이브는 그 말에 그의 모종을 보았다. 전생에서 우연한 기회로 몇 번 먹었지만, 감자랑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벤리가 뭘 모르는 녀석을 본다는 시선으로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이걸 크림 수프로 만들거나, 퓌레, 튀김으로 만들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아느냐? 송아지 요리에 가니쉬로 곁들이면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지! 그냥 감자에선 맛볼 수 없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감자랑 맛이 다르다고요?”
“그래! 특히나 브릴 지역에서 가져온 모종이라면 말이지.”
그리 얘기를 들으니 이브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했더니 군침이 절로 돌았다.
“이게 그렇게나 맛있다니…….”
이브는 혹하는 얼굴로 그 모종을 보았다. 그냥 감자도 좋아하는데 그 감자보다 더 맛있다면 꼭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벤리와 마거릿이 허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브를 빤히 보았다.
이브는 당연하다는 듯 소매를 걷으며 모종을 옮기기 시작했다. 작은 체구에도 다량의 모종을 한꺼번에 옮기는 일엔 거리낌은 없었다.
“여기에 심으면 되는 거죠?”
“역시 샬럿은 젊어서 힘이 좋다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다 심을 테니까.”
이브는 모종삽을 들고 본격적으로 모종들을 밭에 심기 시작했다.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원체 힘도 세고, 체력도 좋아서 농사일에 완전히 적성이었다. 심지어 손재주까지 좋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솔선수범 밭일을 도와주는 그녀와 금방 친해졌다.
심지어 그녀는 다른 능력도 있었으니.
“오늘 땅이 좀 건조한데 물 좀 줘야겠지?”
마거릿이 묻자,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녁이면 비가 내릴 거예요.”
“어머, 그러니? 괜한 힘을 뺄 뻔했구나. 고맙다. 샬럿.”
“별말씀을요.”
심지어 그녀는 공기의 수분만으로 날씨가 어떻게 될지 눈치챘다.
농사로 먹고사는 마을에선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후우…….”
초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땀을 흘리던 이브는 모종삽으로 땅을 파다가 지는 그늘에 시선을 올렸다.
은색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의 미남이 햇빛이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양산을 쓰고 있었다.
그녀에겐 익숙하다 못해 질린 얼굴이었다.
“뭔데?”
“여기서 이런 일이나 하고……. 진짜 너 대박이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순수하게 감탄하는 의미가 아니란 건 이미 십수 년 동안 겪으면서 알고 있었다.
이브는 모종삽을 든 채 말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고.”
“나라고 이런 시골구석에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너 잘살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아버지가 닦달하셔서 온 거지.”
……말본새하고는.
이브는 철없는 노아의 말투를 흘려들으며 되물었다.
“그래? 두 분도 잘 지내고 계시지? 혹시 악마가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는데, 성기사 몇 명이 와서 번갈아 가며 보초를 서더라고. 그래서인지 아직은 큰일 없이 괜찮아.”
발레리안이 조금 신경 써 준 모양이었다.
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샬럿! 이분은 누구니?”
옆에서 다른 모종을 살피던 마거릿이 노아를 발견하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벤리도 이 상황이 궁금한 건 매한가지인지 일하는 척 이곳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샬럿?”
노아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이브를 보았다.
“여기선 샬럿이야. 아주 잘살고 있는 거 확인했으면 빨리 집에 돌아가.”
이브는 모종삽을 든 손으로 저리 꺼지라는 듯 손짓했다.
“어머, 샬럿의 형제니?”
한눈에 마거릿은 그들 사이가 혈연관계라는 걸 눈치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이브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딱 노아 같은 생김새로 태어났을 테니.
‘괜히 닮아 가지곤.’
이브는 노아를 성가시다는 듯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노아는 인상을 왈칵 찌푸리며 이브를 마주 노려보았다.
“이름이 뭐니?”
“노아……. 윽!”
무심결에 풀네임을 말하려던 노아는 다리에 박힌 모종삽의 공격에 혀를 씹었다.
“노아예요. 제 오라버니.”
이브가 대신 말했다. 고통에 눈물이 그렁한 그를 보면서 눈짓했다.
‘적당히 눈치 챙겨.’
여기서 그녀가 에스텔라 백작 영애라는 것이 밝혀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보금자리를 알아봐야 하니까.
“그동안 샬럿이 가족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서 이런 멋진 청년을 오빠로 두고 있는 줄은 몰랐네.”
마거릿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노아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와서 아침이라도 들고 가렴.”
노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퉁명스러운 동생이 어디가 좋다고 가족한테까지 친절하단 말인가.
하지만 마거릿과 벤리는 샬럿을 좋아했다.
첫 만남엔 험한 일 한번 해 본 적 없는 아가씨라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금방 떠날 외지인이라 생각해 내심 그녀에게 마음의 정을 쉽게 주지 않았다.
하지만 샬럿은 이곳에서 살림을 꾸렸고, 그 한 달 동안 벤리 부부가 그녀에게 받은 도움은 셀 수도 없었다.
벤리 부부는 매사에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샬럿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물론 이브는 농사 비법을 알아내고, 이곳에서 무사히 정착하기 위한 속물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지만.
그들이 그녀의 속을 알 길은 없었다. 설사 알았더라도 야무지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아…….”
노아가 곤란한 눈빛으로 이브를 보았다.
그러나 이브는 그들의 대화엔 관심이 없다는 듯 모종삽으로 땅을 파며 돼지감자 모종을 심는 데 집중했다.
“예, 그러면…….”
유감스럽게도 노아는 어머니 또래의 사람에게 거절의 말을 잘하지 못했다.
* * *
“어떻게 음식이 끝도 없이 나와?”
벤리 부부 집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브의 집에 들어온 노아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원래 그렇게 나와.”
이브는 별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여상히 대꾸했다.
노아는 방금 끊임없이 채워지던 접시를 떠올리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넌 그걸 다 먹고?”
거의 테이블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양이 많은 식사였다. 하지만 이브는 전혀 그 양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해치웠다.
“원래 농사를 하려면 식사를 든든하게 해야 해.”
이브는 부른 배를 팡팡 두들기며 말했다.
“너한텐 천직이네…….”
노아가 말했다. 이브는 부정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왜 집에 안 돌아가고 내 집에 와?”
“뭐 네가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전해 줄 소식도 있고.”
노아는 건들거리며 거실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이브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전해 줄 소식?”
그게 무어란 말인가. 이브가 벌떡 일어났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노아와 이브의 공통점은 그것밖에 없었다.
혹시 자신을 걱정한 나머지 부모님께 병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호, 혹시. 내 정체가 밝혀진 거야?”
“그건 아니고.”
노아가 딱 잘라서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이브는 안도했다. 그러면 왜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람.
“별 건 아닌데, 그게…… 네 전 약혼자 소식이라.”
노동으로 잊고 있던 존재의 언급에 이브는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발레리안? 무슨 소식?”
“뭐야, 왜 아무렇지도 않아?”
노아는 제가 걱정했다는 게 무색했다는 걸 깨닫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브는 빨리 말하라며 손짓했다. 어차피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고 한들 이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 관계에 미련을 가져서 무얼 하겠는가.
“답답하니까 빨리 말해.”
“……이번에 대신전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어.”
“사건? 혹시 악마라도 출몰한 거야?”
“악마가 아니라, 성녀야.”
이브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가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 찰나를 눈치채지 못한 노아가 말을 이었다.
“대신전에 성녀가 강림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