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누가 봐도 넘어져서 생긴 상처는 아니었다.
이런 상처를 볼 일이 없는 이브조차 그 점을 바로 눈치챌 정도였으니. 하물며 발레리안은 이런 상처를 보는 일에 익숙했고, 해박했다.
‘설마, 알아버린 건가……?’
아니다. 이브는 빠르게 속으로 부정했다.
‘어떻게 상처만 보고 알겠어.’
이 상처를 낸 주인이 악마라는 걸.
문제는 발레리안이 전투를 숱하게 치르던 그 대상이 악마라는 점이었다.
삽시간에 냉랭해진 주변 공기는 왠지 그가 눈치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더욱 불안해졌다.
“……왜 그래?”
계속 침묵하며 상처만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이브는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상처에 꽂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이브, 너는 나한테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구나.”
이윽고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브는 심장이 덜컥했다.
아무래도 발레리안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이 순간이 이브한테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발레리안을 자극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선 그가 먼저 이야기하도록 유도해야만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하도록.
‘으…… 어떡하지.’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그의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자칫하면 제 무덤을 파다 못해 관뚜껑까지 열릴 것 같았다.
“이브, 그때 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해.”
발레리안의 눈빛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또한 아까 마물의 숲에서 목격한 장면을 떠올리면 피가 싸늘히 식는 느낌이었다.
처음 그 장면을 목도했을 댄,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 핏자국이 이브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생전에 그런 공포와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내리깔던 이브는 입을 열었다.
“……발레리안이 생각하는 게 아마 맞을 거야.”
“이브……, 악마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날 협박했어. 내가 발레리안을 죽일 수 있는 미끼가 되어 달라고.”
이미 이 상처가 악마에게서 다친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느 때보다 이브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 발레리안. 너도 알다시피 난 널 사랑하니까.”
이브는 가능한 이 마음이 진심인 것처럼 보이도록 눈을 내리깔았다.
괜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간 지금 말하는 이 내용들이 전부 거짓이라는 걸 들킬 것 같았다.
‘정말 버겁다…….’
이런 식으로 그를 끊어내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악마를 만난 시점부터 그녀의 결심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녀는 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야. 이걸 이용해서 가까스로 악마에게서 도망쳤어.”
그 목걸이에 향한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브는 그 찰나를 목격하고 안도했다. 그가 악마의 유해는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상대는 상급 악마인데, 아티팩트로 도망쳤다.’
발레리안은 이브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녀가 여기서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보통 사람보다 신체 능력이 좋은 그녀라면…… 운이 좋게 달아날 수도 있다.
“신전 내부에 악마와 협력자가 있는 것 같아.”
그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상처 난 그녀의 팔로 옮겨졌다.
“……미안해, 이브.”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이브는 자신의 거짓말이 이번에는 완전히 먹혀들어 갔다는 걸 직감했다.
‘기뻐해야 하는데.’
전혀 이 상황이 기쁘지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 상황이 빠르게 지나가길 원했다.
“발레리안, 보여 줄 게 있어.”
이브는 그를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에서 걸어오는 발레리안의 혈색은 병자보다 더 핏기가 없었다. 그녀가 보여 줄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브는 그 표정을 외면하며 방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간 그녀는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편지들과 상자를 차곡차곡 꺼냈다.
발레리안은 재빨리 이브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열린 상자에서 풍기는 독기의 농도가 강렬했다.
“이브! 이건 대체……!”
이런 위험한 상자를 그녀가 갖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발레리안이 당황한 얼굴로 이브를 보았다.
“발레리안은 독에 면역이 있지? 그러면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 한번 봐.”
이브는 얌전히 그의 뜻대로 뒤로 물러나며 발레리안에게 상자 안을 볼 것을 종용했다.
얼마 전에 받은 피범벅 곰 인형도 있었고, 예전에 발레리안의 약혼녀였을 당시에 받았던 협박 편지와 물건들도 다발로 들어 있었다.
‘버려두지 않길 잘했지.’
그녀의 게으름이 도움이 될 때가 올 줄은 몰랐다.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 악마까지 날 협박하더라고.”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편지를 보는 발레리안의 눈빛에 살기가 흘렀다. 선연하게 흐르는 분노에 이브는 흠칫 몸을 굳혔다. 당장이라도 그 상대를 쫓아가 불사를 것 같은 태세였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잠시 머뭇거리던 이브가 말했다. 이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누가, 언제 보낸 거라곤 말하진 않았다.
발레리안은 그녀가 악마들에게도 시달림을 받았을 거라 예상할 터였다.
‘그래, 그렇게 상상하도록 해.’
그게 바로 이브가 원하던 바였다. 사람의 상상이란 본디 무궁무진하여 어떤 최악을 상정하기에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 대한 쐐기를 박았다.
“이게 바로 내가 헤어지자고 한, 진짜 이유야.”
“…….”
발레리안이 침묵했지만, 이브는 그의 눈빛을 보고 확신했다.
그가 더 이상 그녀에게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기뻐 마지않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 안에 도는 뒷맛이 씁쓸했다.
* * *
며칠 뒤.
완전히 마음이 가벼워진 이브는 황궁으로 향했다.
그동안 발레리안은 에스텔라 백작저 근처에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그녀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황태자와 표면적으로 약혼을 유지할 필요는 더 없어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황태자는 화색이 돋은 얼굴을 했다가 다시 가늘게 눈을 떴다.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그의 시선에 이브는 흥, 콧방귀를 뀌며 허리를 쭉 폈다.
“이번엔 진짜예요.”
“쉽게 믿기지 않는군요. 제 앞에서 성검까지…….”
“네?”
이브의 물음에 자비에는 곧장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일축했다.
에스텔라 영애는 일이 일단락이 되었다고 단정했다. 저렇게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한다는 건 분명 근거가 있으리라.
그럼 구태여 발레리안이 제 앞에서 성검까지 뽑으면서 죽이려고 작심했다는 걸 제 입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고 싶지도 않고.
친우의 흠을 잡는 듯한 말은 제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이젠 정신 좀 차려라. 발레리안.’
자비에는 그리 생각하며 말했다.
“확신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뭡니까?”
“사실 제가 협박을 당하고 있었거든요.”
이브가 말했다. 자비에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진지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그의 모습에 이브는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옵니까?”
“그 덕분에 황태자 전하께서 바라던 대로 제가 파혼해 드렸잖아요.”
“설마…….”
황태자는 실언을 했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정작 거짓말을 하는 이브는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나랑 발레리안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었지.’
그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아무리 철면피인 그녀라도 황태자가 개인적으로 불러서 발레리안과 파혼을 요청하면 흔들리지 않겠나.
‘물론 흔들리진 않고 열만 받았지만.’
그래서 이브는 마음껏 황태자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졌다.
“미안합니다, 영애.”
진지하게 사과를 건네는 모습에 도리어 당황한 건 이브였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사과할 줄은 몰랐다. 아니지. 원래 원작에서의 자비에 성격을 떠올리면 이 반응이 놀랍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브에겐 예외였다.
자비에는 유독 이브에게 박한 태도로 응대했다. 발레리안과 약혼했던 5년 전부터.
“어차피 표면상 약혼을 한 것일 뿐, 서류로 얽힌 사이는 아니기에 더는 약혼녀로서 의무를 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가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브는 완전히 후련해진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한 톨의 미련도 남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자비에는 찻잔을 입에 대었다. 묘하게 차 맛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아, 그걸 말하는 걸 깜빡했군.’
그리곤 뒤늦게 에스텔라 영애에게 하지 않았던 말을 떠올렸다. 바로 루드비히 가문에 관한 소식이었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자비에의 허락에 집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황태자의 보좌관이었다.
“태자 전하, 이번엔 브릴린 후작 가문의 운송 사업에 제재를 먹였다고 합니다.”
“또, 그런…… 대체 이유가 뭐라고 하지?”
최근 들어서 루드비히 가문에서 귀족 가문들의 자금줄을 끊어놓고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루드비히 공작 가문에 문의해도, 업무상의 일이라 자세한 건 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자비에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보았다.
대부분은 루드비히 가문에 의해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귀족들이 구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호소문들이었다.
자비에는 시름이 잠긴 얼굴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 * *
교리실에 두 사람의 인영이 있었다.
약간 희끗한 머리를 가진 남자는 중년의 여자 앞에서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생각보다 제 주제를 알고 물러난 모양입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명줄을 제 손으로 늘린 셈이지. 에스텔라 영애가 생각보다 멍청하진 않아.”
교황은 권태로운 얼굴로 입에서 궐련을 떼며 숨을 뱉었다. 입에서 나온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교리실은 금방 담배 향으로 가득해졌다.
“이제는 성녀만 기다리면 되겠어. 후우…….”
교황을 보는 아리엘의 입가엔 경멸이 섞인 비소가 감돌다가 사라졌다. 제 앞에 있는 자가 교황이라고 하기엔 불손한 작태였다.
하지만 몽롱해진 그의 눈빛은 그런 그녀의 불손함을 눈치채기엔 둔감했다.
아리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가 이곳에 오면 제가 잘 보필하겠습니다. 성하. 여긴 염려치 마셔도 됩니다.”
“아아, 내가 이래서 대주교를 애정한다지.”
실비아를 만날 생각에 히죽 웃은 교황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그를 보며 아리엘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일이 순리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