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이 밤중에 왔다고요?”
노아가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깊은 밤이 찾아온 밖은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캄캄했다.
이브는 어머니의 반응에 깨달았다.
발레리안이 자신과 악마가 같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낸 것이리라.
이브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발견한 건가?’
악마의 유해. 그걸 발견했다면 이브에겐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 급한 일이 있다면서.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듯한 걸 루벤이 막고 있단다.”
아버지가 막고 있다는 얘기에 이브의 머리가 팽배하게 굴러갔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었다.
‘어떻게든 발뺌해야 해.’
만약 자신이 악마와 같이 있는 장면을 목격한 거라면 발레리안은 저를 만날 때까지 버틸 확률이 높았다.
그 결론에 도달한 이브는 급히 노아와 어머니를 방에서 내보내며 말했다.
“잠깐만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말해 줘요.”
방문을 걸어 잠근 이브는 백작 부인이 가져온 약을 대충 팔에 펴 바른 뒤, 붕대를 칭칭 동여맸다.
그리곤 소매가 긴 원피스로 갈아입어서 상처 부위를 빈틈없이 가렸다.
거울로 멀쩡한 제 모습을 확인한 이브는 한번 심호흡을 내뱉은 후, 문을 열었다.
응접실로 가는 발걸음이 쇳덩이라도 매달린 듯 무겁기만 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가 숨는다면 더 의심을 살 것이다.
응접실에 도착한 그녀가 문에 노크하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이브.”
그녀를 부르는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 목감기에 걸린 것보다는 어디서 비명을 지른 사람이 목이 나간 것처럼.
가만 보니 그의 얼굴도 영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눈시울은 붉어서 그 주변이 부어 있었고, 그의 입술은 피떡이 되어서 처참했다. 이브는 그 모습에 일순 하려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했다.
“발레리안…… 지금 네 모습이…….”
왜 그래?
그 뒤의 말을 그녀는 하지 못했다. 그가 돌연 그녀를 꽉 안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었구나…… 이브.”
그를 냉정하게 떼어 놓으려고 했던 그녀는 제 품에서 떨고 있는 발레리안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다행이야, 정말이지…… 난 모든 걸 잃는 줄 알았어.”
안도하는 물기 어린 목소리는 애절했다.
‘안 돼, 이브 에스텔라.’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이성을 되찾았다.
저는 바다 한가운데에 띄워진 나룻배처럼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와 부둥켜안으며 감동의 상봉을 할 때가 아니었다. 밀어내야만 했다.
그를 품에서 억지로 밀어내려고 했던 그녀는 꽉 껴안은 힘에 버둥거리기만 했다.
마지못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숨쉬기 힘들어요…….”
그러자 그가 황급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초조함이 깃든 푸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이브는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미안, 이브.”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인가요?”
이브는 그런 그를 지나치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발레리안은 그녀를 따라 그녀 앞에 앉았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이브는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천연스럽게 물었다.
“루드비히 경,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
발레리안은 침묵했다. 이브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뜨끔했다. 잔뜩 엉망이 된 얼굴을 두고 이런 말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빠르게 그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시간이 늦었어요, 돌아가세요.”
그녀를 한참 동안 흔들리는 시선으로 보던 발레리안은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오늘 오후, 영애께선 어디 계셨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심장이 쿵 떨어졌지만 이브는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있었어요. 왜 그걸 묻는 거죠?”
여기서 쉽게 그에게 세례식에 갔다는 걸 들켜선 안 되었다.
‘내가 왜 그곳에 갔을까.’
발레리안이 어지간히 악마와 잘 전투를 치렀을 텐데.
자신에게 온 편지에 눈이 멀어 발걸음을 한 이브는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멀쩡하니 다행…….’
그녀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멀쩡하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행색이었다.
물론 다친 곳은 없어 보이지만…….
‘다치지도 않았는데 상태가 왜 이렇게 엉망이지?’
세례식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릴리트 말고 또 다른 악마가 있던 건가?
원작의 사건을 그녀가 막지 못한 거라면?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주시하던 발레리안이 이윽고 말했다.
“그러면 그 팔, 걷어 주십시오.”
그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은 정확히 이브가 부상을 입은 오른팔이었다. 그녀는 흠칫하며 당황했다.
이브는 무의식적으로 그 팔에 시선을 두었다. 하늘색 원피스의 소매가 어느새 피에 물들어 있었다. 붕대를 그렇게 감싸 매었는데도, 그 틈으로 새어 나온 것이다.
“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입술을 짓씹으며 가만히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발레리안은 얼굴을 굳혔다.
“이건 내가 집에서 다친 거야.”
그녀가 황급히 변명했다. 그와 거리감을 두기 위해 존댓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였다.
“난 어디서 다친 거냐고 묻지 않았어. 이브.”
발레리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내가 그걸 물을 걸 미리 알고 대답하는 것 같네.”
“……그럼 아니야?”
“그거 알아? 이브가 당황할 땐, 평소 말투로 돌아온다는 거.”
이브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말하면 말할수록 제 무덤을 파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녀를 보는 발레리안의 시선은 그럴수록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브, 이젠 나에게 솔직하게 말할 때가 됐어.”
그 단호한 눈빛을 본 이브는 퇴로가 막힌 길 한가운데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된 이상, 말하는 수밖엔.’
세례식이 열리던 대신전의 성전에서 눈이 정면에서 마주친 상황에 발뺌을 해 봤자 더욱 의심만 살 터였다.
이브는 이쯤에서 인정해 주기로 했다.
적당한 거짓말을 섞으면서.
“그래, 난 그때 대신전에 갔었어.”
“……이브.”
제가 본 것이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맑은 하늘 같은 푸른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브는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서 조금 이상한 일을 겪긴 했지만 별일은 아니었어.”
“……별일이 아니었다고?”
발레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말과 모습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응, 여기 눈앞에 살아 있잖아?”
이브는 당연한 사실을 무얼 하러 묻냐는 듯 대답했다.
“난 그 상태를 멀쩡한 상태라고 말하지 않아.”
발레리안은 그녀의 대답을 곧바로 일축했다. 이브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 모습이 큰일이 있던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야?”
여상히 대꾸했지만, 그녀의 속은 타들어 갔다.
‘발레리안이 그것까지 본 건가?’
그녀가 악마와 함께 사라진 모습을 그가 목격했다면?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녀가 내뱉을 거짓말의 방향을 조금 수정해야만 했다. 그녀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신중해졌다.
‘보니까 어딜 다녀온 것 같은데.’
그가 입은 옷에 흙들이 묻어 있었다. 대신전에선 흙이 묻을 일이 딱히 없었다.
그러면 어딘가 밖을 다녀왔다는 뜻이고, 아마 그곳이 그녀가 있던 숲일 가능성이 컸다. 그 후, 곧장 그녀의 집에 찾아온 것이다.
‘내가 숲에 있었다는 걸 알고 다녀온 거구나.’
아래에서 보고를 받은 거라 생각했지, 직접 그곳에 다녀왔을 줄은 몰랐다.
절로 입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지만, 이브는 애써 이야기 방향을 다르게 틀어 보았다.
“그래…… 사실 세례식을 보다가 잠깐 눈을 깜빡이는 새 내가 어떤 숲에 와 있었어. 참 기이한 경험이었지.”
“……누군가와 같이?”
“아니, 나 혼자였어.”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이상한 숲에 남겨져서 그 숲에서 나오느라 고생하다가 이렇게 다치게 된 거야.”
그녀는 팔을 흘끗 보며 말했다.
“당황해서 조금 숲에서 넘어졌거든.”
“…….”
발레리안은 그녀의 말을 곰곰이 곱씹는 듯한 얼굴을 했다. 괜히 그런 그를 보며 이브는 불안해졌다.
예전의 발레리안이라면 그녀의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발레리안이라면 그녀의 말을 쉬이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녀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본래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밑천이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이브는 더욱 불안감만 커졌다.
“이브, 그럼 잠시 상처 부위 좀 살펴볼게.”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뭐?”
“상처에 감염은 없는지 살펴봐야 하니까.”
“그건, 조금 이따가 의사가 오면 보여 주면 돼. 네가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서 상처를 보여 주면 그녀의 거짓말이 탄로가 날 것이다.
발레리안은 그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늘빛이 감도는 액체가 들어 있는 투명한 병이었다. 그 병에는 교황청의 상징인 십자가가 세밀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성수를 가져왔어.”
이브는 기함했다. 교황도 아껴 쓸 정도로 귀한 성수를 나보고 쓰라고?
“그런 귀한 걸 나한테 쓰지 마. 그런 거 싫어. 부담스러워.”
“이브, 상처에 감염이라도 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내 주변에 그렇게 죽은 기사는 셀 수도 없고.”
발레리안이 진중한 얼굴로 설득했다. 이브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악마의 발톱이 과연 무결하고 깨끗할 거란 보장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독을 묻혔으면 묻혔지, 깨끗하게 정돈하고 소독하고 다니진 않았을 터였다.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발레리안이 재빨리 그녀의 소매를 걷으며 팔을 확인했다.
“발레리안……!”
이브가 미처 말릴 새도 없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능숙하게 붕대를 걷어낸 발레리안은 그녀의 상처를 보고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차갑게 식은 푸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이브는 직감했다.
‘아, X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