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 순간, 얼음 속에서 어떤 인영이 튀어나왔다.
이브는 릴리트라는 걸 직감하고 바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아!”
하지만 제 팔을 날카롭게 할퀸 릴리트의 손톱에 이브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절대로 이 무지막지한 힘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으.”
팔에서 제법 피가 흘렀지만, 이브는 다시 빠르게 팔을 뻗었다. 여기서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돌이킬 수 없었다.
“……! 너!”
방심했던 릴리트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바닥에 꽂힌 얼음들이 어느새 릴리트의 발을 감싸며 면적을 넓히고 있었다.
‘이제 막 각성한 마법사였는데!’
에스텔라 백작저에 편지를 보냈을 때, 릴리트는 문양을 이용해 이브의 피로 마력을 감지하고 미소 지었다.
아직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라면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큰 오판이었다.
릴리트의 동공이 점점 검붉은색으로 넓게 물들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이브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악마를 죽이는 방법이 뭐라고 했지?’
그녀는 빠르게 발레리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악마를 죽이는 방법은 이 성검이나 성수를 뿌린 칼로 목을 자르는 거야. 이브.’
악마와의 전투에 관심을 가지는 그녀에게 다정히 설명해 주던 그의 목소리가 선연했다.
하지만 이브는 성검도 없었고, 성수는 고위 성직자들만 소유할 수 있어서 가져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악마를 죽일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고민하던 그녀는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하나 또 있었지!”
이곳에 오기 전에, 악마에 관해 읽은 서적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마법서라 금서였지만.
[악마를 죽이는 건, 몸속에 있는 마력을 다 빼버리는 방법도 있다.]
그 이론에 대해선 대충 외웠지만, 실제로 누군가의 마력을 빼는 걸 연습해 본 적이 없었다.
‘이론만으로 실전에 적용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실패하면 그대로 릴리트를 묶어 둔 채 도망하면 되는 것이다.
이브는 얼음 안에서 발악하는 그녀를 보며 눈을 감고 상상했다. 얼음 곳곳에 있는 이브의 마력이 릴리트의 몸속에 있는 마력을 빼내는 모습을.
그 순간, 이브는 제 몸에 있던 기력이 훅,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묘한 탈력감에 휘청거렸다. 이내 이브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아아악!”
그러나 곧이어 들리는 갑작스러운 비명에 깜짝 놀라 눈을 뜬 이브는 눈앞에 벌어진 일에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릴리트……?”
분명 비명이 들렸는데 얼음 속에 그녀가 없었다. 그 자리엔 검은 가루만 남아 있었다. 릴리트가 한 줌의 재가 된 것이다.
“이렇게 쉽게 죽었다고……?”
얼음이 사라진 뒤, 그 주변을 살핀 이브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릴리트가 방심을 했던 탓도 있지만, 이렇게 쉽게 죽다니.
무엇보다 제 마법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진짜 이거 들키면 바로 화형대에 오르겠는데?’
인간은 원래 압도적인 힘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근원을 제거하는 것.
판단을 내린 이브는 곧바로 릴리트가 있던 자리로 향했다.
“일단 흔적부터 치우자.”
눈앞에 있는 릴리트의 흔적부터 치우는 게 우선이었다.
언뜻 보면 검은 재로 변한 릴리트는 야영을 하고 남은 나무의 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악마 토벌에 익숙한 성기사들이 발견한다면 혹시나 발각될 수 있었다.
‘발레리안만큼은 보지 못하게 해야 해.’
아마 근 몇 년 동안 악마를 가장 많이 죽인 남자가 발레리안일 것이다. 그런 그가 이 흔적을 발견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이브는 더욱 열심히 땅을 파서 릴리트의 흔적을 지웠다.
‘다행히 발레리안이 내가 여기 온 건 모르고 있다는 거야.’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교황이 무릎을 굽힌 채 눈을 감은 발레리안에게 성수를 뿌리고 있었다.
다른 흙으로 꼼꼼하게 릴리트의 재를 덮은 그녀는 사위를 살폈다.
짙푸른 숲은 앙상하게 줄기만 남은 나무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건조하고 서늘한 분위기의 을씨년스러운 숲이었다.
그제야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는 걸 알아차린 이브는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대체…… 여긴 어디람?”
* * *
대신전의 성전.
현재 기사 세례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오후 시간.
대주교 아리엘은 발레리안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발레리안!”
그가 갑자기 단상 위에서 뛰어내리는 게 아닌가!
여느 때와 다르게 평정심을 크게 잃은 얼굴로 발레리안은 인파를 헤집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브!’
이브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전만 해도 이 부근에서 그의 세례식을 보고 있던 그녀가, 그녀 옆에 있던 여자와 사라졌다.
이브의 옆에 있던 여자가 이브의 팔을 잡고 마법을 쓰는 순간, 발레리안은 깨달았다.
‘상급 악마다.’
그걸 알아차린 후엔 이브가 악마에게 이미 납치당한 뒤였다.
발레리안의 심장이 불안감으로 쿵쿵, 뛰고, 강하게 뛰는 맥박으로 주변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저 엘라를 목격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루드비히 경! 팬이에요!”
예민하게 날이 바짝 선 발레리안은 그런 그들을 서늘히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누군가 사라진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발레리안은 입술을 짓씹었다.
‘침묵 마법을 사용했군.’
그렇다는 건 꽤 탁월한 마법 실력을 가진 악마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디로 데려간 거지?’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초조함과 불안감을 억누른 발레리안은 눈을 감고 악마의 흔적을 쫓았다.
아무리 마력의 흔적을 지우더래도 그 어두운 본질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태양의 힘과 악마의 마력은 본디 상극이었으니, 마력이 충돌하는 지점을 찾으면 되었다.
발레리안의 엘이 순식간에 공중에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발레리안!”
대주교 아리엘이 당황한 얼굴로 발레리안을 쫓아왔다. 그녀가 흘긋 단상을 보자 잔뜩 얼굴을 붉힌 교황이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구긴 교황은 입을 벙긋거렸다.
‘어서 엘라를 데려와!’
그 입 모양을 읽은 아리엘은 성가시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오기 전, 교황은 이 세례식조차 참석하길 귀찮아했다.
그 시간에 실비아 부인과 밀회를 즐기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리엘은 속으로 경멸을 숨겼다.
‘아직은 저놈이 저 자리를 지켜줘야지.’
적어도 성녀가 강림할 때까진, 교황청에서 일어나는 오물을 뒤집어쓸 얼굴마담이 필요했다.
아리엘은 발레리안의 팔을 붙잡고 설득했다.
“아직 세례식이 끝나지 않았단다. 어서 돌아가서 세례를 받으렴!”
아리엘의 얼굴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신도가 모인 자리에서 그가 제 자리에서 일탈하는 건 막아야만 했다.
성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보다는, 이 자리가 온전한 성녀의 기사로 만들기 위한 절차였기 때문이다.
“발레리안 루드비히!”
그녀의 채근에도 발레리안은 미동도 없었다.
“세례식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발레리안은 인파들을 헤치며 홀연히 사라졌다. 아리엘은 당황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설마…… 이브 에스텔라?”
그가 저렇게 돌발 행동을 할 땐, 대부분 이브와 연관된 일이었다. 아리엘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모두 발레리안과 성국을 위한 일이야.’
아리엘은 발걸음을 돌려 교황에게 다가갔다. 그들 사이에는 은밀하고 조용한 대화가 오갔다.
한편, 성기사단들을 소집한 발레리안은 곧장 마물의 숲으로 향했다.
거칠게 말을 몰며 숲으로 향하는 그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조여들고 있었다.
그간 이브를 향한 마음을 애써 접어 보려고 했지만, 이브가 눈앞에서 납치를 당한 모습을 목격하자 미칠 것 같았다.
불규칙적으로 맥박 하는 그의 귓가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웅웅거리며 뭉개지듯 아득하게 들렸다.
‘이브.’
그녀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며 좀먹었다. 자신이 쥔 고삐가 열에 타서 녹는지도 모르고, 발레리안은 속도를 박차며 말을 몰았다.
“단장님.”
마물의 숲에 도착한 성기사들은 당황한 얼굴로 발레리안을 보았다.
얼떨결에 단장의 명령에 어느 때보다 급히 말을 몰고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상태였다.
“여기에 상급 악마가 있습니다.”
발레리안은 짧게 설명했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기사들은 잔뜩 동요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상급 악마들은 대부분 직접 움직이지 않고, 아래 있는 마물과 하위 악마들을 지휘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상급 악마가 직접 움직였다고?
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인원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조금 더 지원을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 기사가 단장에게 제안했다. 발레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숲 안을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안에 인질이 있습니다.”
괜히 떠들썩하게 난리를 피우면 이브가 잘못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가장 실력이 출중한 정예기사들을 모아 최소한의 인원으로 데려온 것이다.
“……인질이라니.”
기사들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심각히 굳었다.
발레리안은 빠르게 4팀으로 나누어 수색에 착수했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발레리안은 다시 평정심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브…….”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숲 자체에서 나오는 마력 때문에 악마의 마력을 정확히 좇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단장님! 흔적을 찾았습니다……!”
흔적을 발견한 성기사가 발레리안에게 빠르게 소식을 전했다. 발레리안은 재빠르게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발레리안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게…….”
흔적을 발견한 기사들이 서 있는 지반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조금 전, 큰 전투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바닥엔 인간의 핏자국도 있었다. 검은 피를 가진 악마와 다르게 붉은 피였다.
“단장님, 아무래도…….”
기사들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전투에 휘말렸다면 높은 확률로 인간은 죽었을 것이다.
발레리안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바닥만 보았다.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이브가 죽었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