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릴리트라고……?
이렇게 면전에서 악마를 보게 될 줄은 몰랐던 그녀는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고 릴리트를 보았다.
언제 동공의 색이 변했냐는 듯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릴리트는 화사한 눈웃음을 그리며 이브의 머리를 만졌다.
“달빛을 빚어 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머리 색이네요. 역시…….”
이브는 릴리트의 손을 떼어 놓곤 말했다.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당신이에요?”
사람이라고 해도 되는지도 의문스러운 상대였다. 이브는 가늘게 뜬 눈으로 릴리트를 보았다. 지금은 외견상으로는 악마라는 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눈동자가…….’
붉은 눈 안에 옆으로 찢어지듯 길어진 검은 동공. 그건 분명히 발레리안이 말한 악마의 특징과 똑같았다.
후드를 완전히 뒤집어쓴 상태인데도 제 정체를 꿰뚫고 있는 걸 보면 발신인이 이 악마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요, 이브. 내가 보냈답니다.”
릴리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부정할 생각이었으면 제 앞에 나타나서 악마라는 걸 드러내지 않았을 터. 이브는 마른침을 삼켰다.
발신인이 이 악마라면 그녀가 할 일은 하나였다.
“그 편지의 의미가 뭐죠?”
“편지에 적힌 그대로예요.”
“저한테 그런 거로 충심을 보이지 마세요.”
이브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일로는 제 신임을 얻지 못해요.”
이 악마에게 그녀의 발언이 통할지는 모르지만, 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어마어마한 희생자가 나올 거야.’
굳이 이 많은 사람 속에서 이브의 앞에 나타나 제 정체를 밝혔다?
의미가 너무 명확했다.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그런 악의.
상황 파악을 너무 잘했던 탓일까. 이브는 점차 커지는 초조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던 릴리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럼, 잠시 대화 좀 나눌까요?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은 조용한 곳에서요.”
그 말에 이브는 갈등했다. 여기서 그녀가 악마를 따라간다는 건 누가 판단해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발레리안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이브는 밤새 공부했던 마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칠 수는 있겠지.’
어차피 지금 악마는 그녀의 존재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마법사.
‘그래서 그런 편지를 보낸 거겠지.’
지금 악마는 그녀에게 쉬이 손댈 수 없을 터였다. 이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릴리트는 단상 위를 살폈다.
그 순간, 발레리안의 시선이 릴리트와 이브에게 향했다.
그와 눈을 마주친 릴리트가 빠르게 이브의 팔을 붙잡곤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잠깐만……!”
작은 체구로 잡은 힘이 어마어마했다. 이브는 저항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악마에게 이끌려 갔다.
곧바로 이브는 제 눈앞의 현상이 일그러지며 점차 다른 풍경으로 변하는 걸 목격했다.
“……!?”
저한테 일어난 일에 놀라 입만 벙긋거리던 이브는 제가 어떤 숲에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여긴…… 숲?”
단순한 환상이나 꿈은 아닌, 진짜 숲이었다. 이곳에서 풍기는 풀 내음이 폐부 가득하게 들어왔다.
“이렇게 데려오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이브 에스텔라 님.”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릴리트였다.
“아무래도 이목이 쏠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실 듯하여, 급히 모시게 되었답니다.”
“……그래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브는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악마와 단둘이 남게 된 상황은 달갑지 않았지만 그나마 원작의 사건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발레리안이 다칠 일은 없겠네.’
이브에겐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거죠?”
이브가 물었다. 릴리트는 주위에 사람이 없어 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본래 눈동자 색을 드러냈다.
‘나랑…… 똑같은 눈동자잖아.’
저쪽은 조금 핏빛에 가까운 검붉은 눈동자였지만, 이브는 제 눈동자와 같은 결의 색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껄끄러웠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로 한패 같지 않은가.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브 님.”
“……뭐죠?”
“저희는 이브 님이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답니다.”
이브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릴리트의 시선과 마주했다. 역시, 이미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제국 사람 속에서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살면서 서러움도 크셨을 거예요. 그들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누굴 배척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으니까요.”
릴리트는 이브가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연인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정체를 숨기며 전전긍긍하고…… 가족들이 도망자가 될까 봐 두렵지 않았나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브는 내심 움찔했다. 제 진짜 속마음이 타인의 입 밖으로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이브의 흔들리는 시선을 본 릴리트의 입가에 미소가 옅게 번졌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저라고 감정이 없겠나요? 그저 악마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증오받고, 척결의 대상이 되고…….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는지.”
릴리트가 이브의 손을 돌연 잡았다. 이브는 사람같이 따뜻한 손의 온기에 당황했다.
“마법사님이 조금만 도와주면 돼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경멸과 증오의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거예요.”
이브는 일순 착각할 뻔했다. 지금 이 악마의 말이 진심이라고.
하지만 원작을 읽은 이브는 알고 있었다.
악마들의 본성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원작에서 악마들이 발레리안에게 했던 짓들은 도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겁하고 악랄하며 잔인했다.
발레리안을 죽이기 위해 그의 주변 사람을 죽이거나 협박했고, 급기야 이유리를 납치해 그를 협박했다.
결국, 이유리는 그 과정에서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악마들은 그녀를 죽이지 못해서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와 목적은 단 하나였다.
오로지 탐욕.
인간 세계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 인간들을 제 노예로 만들어서 유희를 즐기고 싶어 하는 악랄함.
절대로 마법사인 그녀와 악마들의 원하는 길은 같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날 유혹하겠다고.’
이브는 제 앞에 있는 악마의 수가 뻔히 보여서 기가 찼다. 한편으론 소름이 돋았다.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이 악마의 말에 속았을지도 몰랐다.
가련하게 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울먹거리는 릴리트의 모양새는 가증스럽기보단 진심처럼 보였으니까.
‘악마에게 홀리지 말라는 말이 이것 때문이구나.’
상급 악마의 능력 중 하나인 ‘위선’이 여기서 여실하게 드러났다.
이브는 제 손을 잡은 릴리트의 손을 밀어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이브의 기색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릴리트의 입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하지만 노련하게 제 감정을 숨기며 그녀가 말했다.
“동료를 더 모아야 해요.”
“아, 나보고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포탈을 열어 달라고요?”
이브는 단박에 그녀가 원하는 바를 눈치챘다. 릴리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100년 전에 나온 역사서와 똑같은 전개잖아.’
그렇다면 그 당시에 마법사들은 이 제안을 승낙하고, 포탈을 열어 준 거란 말인가?
이브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다면 제국에서 마법사들을 척결하려고 나서는 걸 원망조차 할 수도 없지 않나.
지금 당장이라도 이 악마에게 백 년 전의 사건이 사실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 악마가 사실대로 말해 줄지도 미지수였다.
차라리 이 대화는 빠르게 끝내는 게 좋았다.
“절대 싫어요.”
이브가 단호히 대답했다. 릴리트는 예상했다는 듯 불쌍한 연기를 곧바로 버리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 정체가 밝혀져도 괜찮다는 이야기니?”
“……뭐?”
이제 내 비밀로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인간이란 존재는 참 얄팍하거든. 네가 마법사가 아니냐는 의문 하나만 던지면 금방 진위를 판단하려고 달려들 거야.”
이브는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그 진위를 무슨 수로 판단한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너도 알지 않니? 이제 곧 성녀가 강림할 거야. 역대 성녀들은 마력을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후후.”
“……무슨.”
이브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성녀가 강림한다는 소식까지 악마에게 들어갔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설마 성국 내부에 협력자나 악마가 있는 건가?’
상급 악마는 마력의 형질을 바꿀 수 있으니 언제든 신도로 위장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저쪽은 내 정체를 밝히지 못해.’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한 악마들이 하나 남은 마법사가 위험에 처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이브의 생각을 읽은 릴리트의 입술이 고혹적인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생각보다 영리하네. 그럼 엘라는 멀쩡할 수 있을까?”
이미 릴리트는 이브가 엘라를 각별히 생각한다는 걸 눈치챈 지 오래였다. 행여 엘라를 다치게 할까 편지를 읽고 이곳에 따라온 것이 뜻하는 바가 너무 선명했던 탓이다.
릴리트가 이브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발레리안의 목숨으로 협박을 하겠다는 건가? 이브는 한발 물러나며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응, 멀쩡할 것 같은데?”
사람만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니라면, 상급 악마 정도는 발레리안이 처리할 수 있었다.
“흐음, 그래? 꽤 자신 있게 말하네. 그거 아니? 그 엘라가 중급 악마한테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 말이야.”
“……뭐라고?”
이브는 깜짝 놀랐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디.
최소한 상급 악마한테 당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중급 악마한테서 발레리안이 부상을 입었다니!
‘거짓말이겠지!’
중급 악마는 상급 악마와 달리 마력의 형질을 바꿀 수 없어서 마력을 사용하면 금방 악마라는 게 들통이 난다. 그래서 금방 정체를 들킨 수많은 중하급의 악마가 발레리안의 손에 제거당해 왔다.
믿기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 순간, 부상 소식을 전해 왔던 헬리엇의 미묘한 태도가 떠올랐다. 그건 예기치 않은 일을 겪은 사람처럼 당황하던 눈빛이었다.
‘발레리안이 정말 중급 악마한테 당한 거라면…….’
그의 힘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 수도 있었다. 이브가 동요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릴리트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스쳤다.
“정말이야, 내 말에 거짓은 한 점 없어.”
“그래서, 이번엔 날 통해서 발레리안의 발목을 잡겠다고?”
“그렇게 해석하면 내가 너무 불한당 같잖니? 다 상부상조하자고 건넨 제안인데.”
릴리트가 가늘게 눈을 휘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할래? 마법사님. 어차피 당신도 선택지가 없잖아. 정체를 들키면 죽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인데.”
이브는 입술을 깨물며 릴리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면 그녀의 정체를 까발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다.
“절대 그렇게 안 될 거야.”
팔을 뻗은 이브는 곧바로 마법서에서 읽었던 주문을 곱씹었다.
‘제발, 잘 되어라.’
하룻밤 사이에 연습한 마법으로 이 상급 악마를 그녀가 해치울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릴리트는 이브가 필요했으므로 죽일 수 없었고, 이브는 그런 그녀를 잠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만드는 게 목표였다.
[이엘로.]
이브가 주문을 외우자, 건조했던 공기가 갑자기 습해지면서 물기가 모였다.
그 물기는 빠르게 얼어서 날카로운 얼음을 만들어 냈다.
그 광경을 본 릴리트가 미처 몸을 피하기도 전에 얼음이 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쾅쾅쾅!
빙결 마법의 위력은 지반이 흔들릴 정도로 강했다.
‘어라……?’
딱딱하고 건조한 바닥이 엉망으로 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이브는 멍하니 보며 입을 벌렸다.
“……위협만 줄 생각이었는데.”
처참해진 숲의 광경에 이브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발레리안이 준 영약의 효과가 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