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 편지를 떠올리자, 더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차피 원작에선 결국 살았잖아.’
아무리 위험에 빠지더라도 발레리안은 남자주인공이었다. 결국 대신전에서 습격했던 그 악마는 발레리안의 손에 처단된다.
그 악마를 지휘한 배후는 아직 원작에서 밝혀지지 않았다.
중후반부에서 연재가 멈추었기 때문이다.
‘왜 연재를 멈춘 거야, 이 작가 놈아……’
그래서 이 사건이 그녀와 연관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녀의 기색을 읽은 자비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로 성국으로 갈 생각입니까?”
“아니요……. 거길 제가 가면 전 미친 거죠.”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음 날, 성국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탄 이브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미친놈이다.’
마차 안, 후드를 뒤집어쓴 이브는 이곳에 그녀 혼자였다.
황태자에게도,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고 왔다.
그러나 밤새 고민하던 끝에 발레리안이 걱정되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차라리 기사 세례식에 관한 소식을 일찍 들었다면 익명의 편지라도 보내 제보할 텐데, 하루 전에 알게 되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 편지를 보낸 범인이랑 세례식 침입자가 동일 인물일까?’
그 편지가 단순한 질 나쁜 장난질에 불과하길 바라지만 만약 정말로 진심으로 보낸 편지였다면?
‘어떻게든 막아야 해.’
그녀에 대한 충심으로 저지르는 일이라면, 그녀의 말 한마디로 이 상황을 막을 수도 있을지 몰랐다.
‘안 되면…….’
그냥 무력으로 제압해야지.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 얼렁뚱땅 독학으로 공부한 마법의 내용을 떠올렸다.
성인식 때는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신기함보다는 죽음의 두려움이 앞서 마법을 배울 생각 따위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는데, 마법서를 읽은 지 10분 만에 손 위에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 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소질 있는 것 같은데?’
다른 마법은 잘되지 않았는데, 유독 물과 얼음에 연관된 마법은 수월했다.
한 시간 뒤, 뒤뜰에 메말라 있는 우물에도 마법을 사용하자 1시간 후엔 물을 꽉 채울 정도가 되었다.
마법 진도가 파죽지세처럼 쭉쭉 나가자,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도 마법에 흥미를 느꼈다.
‘근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주변에 같은 마법사라는 비교군이 없었기에 잘하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백 년 전에 모조리 화형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시작한 마법은 꽤 나쁘지 않은 능력이었다.
‘이 힘으로 발레리안을 지킬 수 있으니까.’
그녀는 제 힘이 처음으로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 녀석들.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 봐!’
밤새도록 마법을 연마하고 온 이브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국으로 들어서자 마차 창밖으로 대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성을 목전 앞에 두자 점점 긴장되기 시작했다.
성국의 길은 세례식을 구경하기 위한 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세례식 하나 보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다니…….”
제국에서 발레리안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톡톡히 느껴졌다.
아마 그녀가 황태자의 약혼녀가 된 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길거리에서 돌팔매질을 당하며 인민재판을 당했을 터.
상상만 해도 섬뜩한 광경이었다.
‘이 중에 악마가 숨어 있다는 거지.’
마물과 달리 인간의 외견을 가질 수 있는 악마가 이 평화로운 행렬 속에 숨어들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최상급 악마의 수하인 상급 악마.
상급 악마는 제 몸에 있는 마력의 형질까지 자유롭게 바꾸는 게 가능해 성녀 앞에서도 인간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상급 악마의 대표적인 특징이 ‘위장’과 ‘위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나도 좀 주지.’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 한 번 더 후드를 꾹 눌러쓴 이브는 마차에서 내린 후에 주변을 슬쩍 보다가 샛길로 빠졌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야.’
신원을 조회하고 있기에 신원이 확실한 사람만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면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통해 들어가려면 이 후드를 벗어야만 했다
그중에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쯤에 개구멍이 있다고 했지.”
옛날에 밤늦게까지 밖에서 놀다가 아리엘 대주교한테 혼날 것이 무서워, 발레리안과 함께 대신전 안으로 통하는 개구멍을 타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참 재밌었는데.’
결국, 그때 아리엘에게 들켜서 엄청나게 혼나게 되었다. 늘 해맑은 얼굴로 헤실거리던 발레리안이 시무룩했던 얼굴을 보는 것도 참 재밌었는데 말이다.
동시에 발레리안의 싸늘했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음이 불편해진 이브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개구멍을 찾는 일에 집중했다.
“찾았다!”
한참을 그곳 주변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이끼로 뒤덮인 불룩한 돌을 발견했다.
거길 들추어내자 성인 여성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 구멍으로 몰래 들어갔다.
‘여기가 바로 기도실이구나.’
왠지 오랜만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창문이 활짝 열려서 청량한 공기와 조금 쌀쌀한 온도.
익숙하지만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졌다.
예상대로 기도실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세례식 준비를 위해 자리를 뜬 것이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녀는 몰래 기도실에서 나와 세례식이 열리는 성전으로 향했다.
워낙 사람이 많았기에 후드를 쓰고 있어도 그녀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괜찮아요, 신도님?”
그녀가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걱정하며 물었다.
“……전 괜찮아요.”
이브는 살짝 제 목소리보다 낮은 톤으로 어색히 대답했다.
“추운 거라면 이 담요를 덮어요.”
한 여자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손에 있던 담요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담요를 받은 이브는 꾸벅 인사했다. 여기서 담요를 거절하면 더 권유할 것 같아서 그냥 얌전히 받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여자가 감탄했다.
“몸 상태도 안 좋은데 세례식을 보기 위해 왔다니, 기특하고 대단해요.”
“성국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보러 와야 하니까요…….”
이브는 괜한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대꾸했다.
“젊은 사람한테 보기 드문 신실함, 그 마음 변치 않도록 잘 보살펴 주도록 해요.”
그 말을 하는 사람도 이브와 비슷한 묘령의 여자로 보였다.
이브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괜히 대화가 길어졌다간 의심받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함성이 귓전을 때렸다.
“와아아아!!”
이브는 직감적으로 발레리안이 모습을 드러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 중에 악마가 있다고.’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외관상 악마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던 탓이다.
‘차라리 가까이서 지켜주는 편이…….’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이브는 인파들을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도님!”
그러자 아까 대화를 나누었던 여자가 이브를 쫓아왔다. 발레리안을 지켜줘야만 하는데, 계속 그녀 옆에 붙는 여자가 성가셨다.
이브는 저도 모르게 후드가 살짝 걷힌 시선으로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헉.’
이브는 헛숨을 들이켰다.
처음으로 정면에서 본 여자의 얼굴은 소름이 돋을 만치 아름다웠다.
탐스럽게 굽실거리는 금발 머리와 보라색 눈동자. 그 아래에 매혹적으로 찍힌 눈물점과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
눈웃음을 한번 지어 준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유혹할 수 있을 듯했다.
그녀는 투명하다 못해 눈처럼 하얀 손으로 이브의 어깨를 붙잡으며 걱정했다.
“그렇게 무작정 앞으로 가면 어떡해요? 여기서 다치시면 곤란해요.”
“루드비히 경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요…….”
당황한 이브는 적당히 발레리안의 팬인 척 대꾸했다. 난감했다. 최대한 사람의 시선을 피해서 조용히 악마를 찾아낼 생각이었는데.
‘그 악마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차라리 발레리안에게 직접 악마가 있다고 말할까?
이브는 갈등했다.
그러나 이미 그와 제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발레리안에게 악마의 존재를 말해 주는 게 발레리안을 도와주는 것이 맞을까?
그리고 그 정보의 출처를 물어본다면 그녀는 과연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문득 그녀는 단상 위에 있는 발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
햇볕 아래서 그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듯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교황 옆에 무릎을 꿇은 그는 성검을 무릎 위에 얹으며 경건한 자세로 세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입을 벌렸다.
‘말해 주자.’
그를 보자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가 다치는 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빗길 속에 낙마하던 날, 악마를 토벌하다가 다쳤다는 소식에 이브는 잠을 자지 못했다.
그를 보고 싶었지만, 이성으로 감정을 강하게 찍어 눌러서 참을 수 있었다.
‘이번엔 다칠 걸 알면서 모른 척 넘어가라고?’
적어도 그녀는 불가능했다.
그 상대가 발레리안이라면 더욱.
그녀는 성큼 한 걸음 그가 있는 단상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며칠 전, 발레리안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이브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는데 이제 무얼 믿을 수 있겠어.”
그가 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마음이 시큰거렸다.
“괜찮아요, 이브?”
그녀가 굳어 있는 게 이상했는지, 아까 봤던 금발의 여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 괜찮아요.”
이브는 괜찮다며 고개를 젓다가 문득 멈칫했다.
“잠시만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통성명이 늦어서 미안해요, 이브.”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휘며 정중한 얼굴로 인사했다.
“내 이름은 릴리트라고 해요.”
샐쭉 웃는 그녀의 눈이 붉은색으로 바뀌며 검은 동공이 옆으로 찢어졌다. 이브가 찾던 그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