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브는 움찔했다. 정말 문양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흡사했다.
“누가 장난을 친 거겠지.”
“야, 누가 이런 식으로 장난을 해?”
노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느낌이 무척 좋지 않았다.
“혹시…… 누가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있겠냐?”
노아는 난색을 하며 그녀의 추측을 곧바로 부정했다.
하지만 그 또한 찝찝한지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거로 장난을 치는 사람은 없다면서. 말의 아귀가 안 맞잖아.”
이브의 지적은 타당했다. 누구보다 이 선물이 질 나쁜 장난이길 바라는 건 그녀였다.
그런데 편지에 적힌 말이 굉장히 불길했다.
‘나에 대한 충심을 엘라의 죽음으로 증명하겠다고……?’
실질적으로 제국에 있는 엘라는 단 두 명, 루드비히 공작과 그의 아들인 발레리안 루드비히 소공작, 그녀의 전 약혼자였다.
지금 제국에서 대표하는 엘라는 딱 한 명이었다.
‘발레리안 루드비히.’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이 편지에서 지칭하는 사람은 발레리안일 가능성이 컸다.
“……이 선물의 발신인부터 찾는 게 좋겠어.”
이브는 편지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별다른 특징은 보이지 않았다. 문양을 만져 보던 그녀는 순간 따끔함에 황급히 편지에서 손을 뗐다.
“아!”
문양을 만지던 검지에서 작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노아는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넌 무슨 조심성도 없이……!”
“이상하다. 여기 바늘 같은 것도 없는데……? 종이에 베인 건가?”
이브는 다시 편지를 들고 문양을 유심히 보았다.
제 손에 피가 났다면 종이에도 피가 묻었을 게 분명한데 편지에는 핏자국 하나도 없었다.
‘마치 피를 먹은 것처럼…….’
노아는 그런 불길한 편지는 버리는 게 낫겠다며 어디서 집게를 가져와 편지를 들었다.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는 걸 집에 둘 수는 없어, 야. 야! 이브 에스텔라!”
이브가 다시 편지를 가져가서 살펴보자 노아가 기겁했다.
“잠깐만, 문양 색이…….”
그녀는 편지에 보인 문양의 색이 검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뀐 걸 발견했다. 마치 그녀의 눈동자처럼.
“붉은색으로 바뀌었어.”
“뭐? 내 눈엔 그대론데?”
노아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에 이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거라면 마법이 걸려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 아니, 사람이 맞는지도 불분명한 발신인의 정체가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이브가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보관해 둘게. 부모님께는 말하지 마. 내가 조용히 알아볼 테니까.”
이 발신인에 관해 가장 빠르게 알아내는 방법은 황실이나 루드비히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양쪽 다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편지의 발신인을 알아내기 위해선 내용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알아낼 수밖에.’
이브는 편지를 보며 복잡해지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생각보다 빨리 복귀했구나. 발레리안.”
대주교 아리엘은 이제 막 대신전으로 온 발레리안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브와 황태자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어쩜 그런 파렴치한 짓을.’
이브 에스텔라. 그럴 아이로 보이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사특하고 영악한 아이였다.
아리엘은 순정적인 이브의 태도에 마음을 열었던 발레리안이 그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까 걱정되었다.
“예, 호출을 받았습니다.”
발레리안은 무감한 낯으로 인사했다. 아리엘은 발레리안을 안타깝다는 듯 보며 어깨를 토닥였다.
“잘 왔단다. 여기가 네 집이라고 생각하렴.”
그 다정한 손길과 속내는 조금 달랐다.
아리엘의 갈색 눈동자에 살짝 흡족함이 스쳤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이제 곧 성녀가 강림할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신탁 내용을 들었을 때, 발레리안과 이브의 관계가 신경이 쓰였다.
온전히 성녀만을 보필해야 할 발레리안의 관심이 이브에게 향하는 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걱정은 한시름 덜었구나.’
자칫 성녀의 심기를 거슬렸다간 100년 전과 같이 다시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면 교황청과 성국의 입지도 다시 좁아질 테고.
그래서 발레리안의 역할과 책임은 막중했다.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듯해 아리엘은 겉으론 속이 상한 척하고 있었지만 속내는 웃고 있었다.
“이제 곧 성녀가 대신전에 올 거야. 아마 네가 성녀의 호위 기사로 임명되겠지. 그러기 위해선 성기사로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아야 해.”
성녀를 만나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돈하는 세례식 절차는 필수였다. 아리엘의 마음이 급해졌다. 혹여 세례식 전에 성녀가 강림한다면 곤란했다.
‘세례식.’
성녀의 기사가 되기 위해선 필수적인 절차였다. 발레리안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서 이브의 곁에 있고 싶은 걸 참아냈다.
제국의 평화는 곧 이브의 평화기도 했으니까. 그는 그녀의 평화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세례식은 언제가 괜찮겠니? 모쪼록 빠르면 좋을 것 같은데, 여러 번 세례식이 미뤄져서 더는 미루면 좋지 않을 것 같거든.”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발레리안도 이 세례식을 질질 끌 생각은 없었다. 빨리 이 세례식을 마치고, 이브가 자신에게 숨긴 게 무엇인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구나. 그러면 최대한 세례식을 앞당겨 진행하도록 하마.”
“네,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아리엘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발레리안을 보았다.
“그럼, 푹 쉬렴. 발레리안.”
* * *
일주일 뒤.
황태자의 초대로 나란히 연회에 참석하게 된 이브는 연회장에 오자마자 황태자의 재촉에 시달렸다.
연회장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잡은 그들은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닥이며 대화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단념하겠다고 합니까?”
그 모습은 다정한 연인인 것처럼 보였지만 대화의 내용은 실상 다정한 연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성국으로 돌아간 거겠죠.”
발레리안이 약혼녀의 배신으로 상심해서 성국에 틀어박혔다는 얘기는 벌써 유명해졌다.
하지만 자비에만큼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말을 해도 계속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비에는 발레리안이 이렇게 쉽게 물러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안심하세요, 전하.”
“……영애는 발레리안을 잘 모릅니다.”
그에 대해 대화하면 이런 식의 무한 도돌이표였다.
자비에는 답답한지 샴페인을 들이켰다. 평소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브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무래도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군요. 영애의 말을 들어서 좋은 결과가 없었다는 걸 잠시 망각했습니다.”
“이미 늦었어요. 그 강은 건너 버렸으니까 우리는 착실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는 수밖에 없답니다.”
황태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며 이브는 다정한 연인인 척 그의 잔에 제 잔을 맞부딪혔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샴페인 한 모금을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자비에는 참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한동안 성국에서 나올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비에가 말했다. 이브는 그의 말에서 묘한 뉘앙스를 눈치채고 물었다.
“무슨 들은 이야기가 있으신 건가요?”
“내일, 발레리안이 기사 세례식을 받는다고 합니다.”
“……기사 세례식.”
성검의 주인으로서 정식적인 데뷔식을 치른다는 말이었다. 이브가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이대로 이유리가 성녀로서 등장한다고 하면 자연스레 그가 그녀의 곁을 차지할 테니까.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하고 이상하지…….’
이 기분을 보아선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근데 정확히 무언가를 짚어서 잘못된 점을 말할 수도 없는 모호함만 존재했다.
“참석할 겁니까?”
자비에의 물음에 당연히 참석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려던 이브는 멈칫했다.
그녀의 미묘한 반응에 자비에는 의아한 시선으로 보았다.
“맞아…… 기사 세례식은 외부인도 참석이 가능했었죠.”
이브는 이상한 불안감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 뭐였는지 알았어.’
기사 세례식에 관해선 원작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이유리가 강림 후에 악마가 대신전에 잠입해서 그녀를 습격했을 당시였다.
이유리를 습격한 사건은 악마가 대신전을 직접 습격한 첫 번째 사건이 아니라 두 번째 사건이라고 했다.
첫 번째 사건이 바로…….
‘발레리안의 기사 세례식!’
이브는 심장이 덜컥했다. 심지어 발레리안이 인파에 숨은 상급 악마를 만나서 목숨이 위험해진 사건이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세례식 참관객 중에 그 악마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문득 일주일 전에 받았던 편지를 떠올렸다.
[……당신에 대한 충심을 엘라의 죽음으로 증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