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니, 그걸 왜…… 왜 뜯은…….”
워낙에 당황해서 그런 걸까. 이브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발레리안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다르게 어두웠고 차분했다.
얼음을 날카롭게 깎아 놓은 듯한 날 선 시선에 이브는 어깨를 움츠리려다가 애써 꼿꼿이 자세를 폈다.
“됐어요, 경이 그러든 말든 더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그럼 이만.”
그녀는 제가 괜한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닫고 대화를 일축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 이브는 다시 한번 당황했다.
“왜 내가 그랬을 것 같습니까?”
이브는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가늠조차 잡히지 않아 당황했다. 그러나 이브는 자신이 비춘 동요를 깨끗하게 지워냈다.
“……알고 싶지 않아요.”
그에게서 대답을 얻어낸다고 한들,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대로 그의 곁을 스치고 나가려는 이브에게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버렸습니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져서.”
“…….”
이브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여기서 네가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인다면 이번엔 뭘 또 버릴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이브는 삐걱거리는 몸을 돌렸다. 정면에서 본 발레리안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이브는 지금 제가 무얼 듣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버린다니…… 대체 뭘.”
“이제야 돌아보는구나.”
그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그를 본 이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직도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대로 발레리안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그새 이성을 잃고 그의 말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방금 그가 내뱉은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 것 같아서……, 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브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 농담하지 마.”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네.”
솔직히 이브는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브가 아는 한 발레리안은 이런 식으로 허투루 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발레리안.”
“응. 이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같았다. 이브가 일순 제 상황을 착각할 만큼 천연스러운 말투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을 되찾고 물었다.
“정말 모든 책임과 의무를 버리겠다는 말이야? 나 따위 때문에?”
이브는 대책 없는 그의 선언에 할 말을 잃었다. 발레리안이 그런 그녀를 싸늘히 노려보았다.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는데 이제 무얼 믿을 수 있겠어.”
“……발레리안.”
“나에게 진심을 보여 주겠다고 한 게 고작 연회장에서 벌인 일이라면, 참 재밌었어. 이브.”
그의 말투는 여상했지만, 그녀를 보는 눈빛만큼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내가 연회장을 온 건지, 삼류 연극을 보러 온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의 눈빛은 그녀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이브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 미움을 받는다는 게 이런 감정이구나. 가슴이 뻑적지근하고 답답해졌다.
“넌…… 날 절대 이해하지 못해.”
입술을 깨물고 있던 이브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
그런 모습을 발레리안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녀가 저에게 감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차갑고 무심하게 대했을 때 이브의 반응은 그에게서 마음이 떠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는 그 말에 담긴 뉘앙스가 다른 때와 다른 의미를 담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예리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이브가 말했다.
“그래, 내가 나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네 인생에서 없어지는 거니까 마냥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차라리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이브.”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마. 여자 하나 때문에 의무를 다 저버린다는 말은.”
실제로 버릴 생각도 없으면서.
원작에서도 제가 짊어진 의무와 사명을 책임지며 이유리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자제하던 사람이 바로 발레리안, 그였다.
그런 거짓말로 죄책감을 주려는 발레리안이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브의 붉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되면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그녀였다.
‘그런 나를 이런 식으로 비난한다고?’
차라리 그녀의 행동을 온전히 꼬집고 비난했으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거짓으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악마라면? 아니면 마법사라면? 넌 정말 날 붙잡을 거니?’
이브는 당장이라도 발레리안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너무나 뻔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그는 제 허리에 있는 성검을 꺼내서 내 목을 치겠지.
그의 성검을 본 이브는 검이 살짝 뽑혀 있는 걸 발견했다.
‘……뭐지?’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발레리안은 악마를 처단할 때를 제외하고 성검을 뽑는 경우는 없었다.
‘설마.’
그녀는 아까 식은땀으로 젖어 있던 자비에의 이마를 떠올렸다.
연회장에서만 해도 멀쩡했던 그의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진다는 게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비에의 앞에서 발레리안이 성검을 뽑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설마, 발레리안. 너 이 성검을 뽑은 거야?”
“…….”
그의 침묵이 긍정을 뜻한다는 걸 깨달은 이브가 헛웃음을 흘렸다.
“미쳤구나, 너.”
“이 상황에서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말을 하는 발레리안의 시선이 이브에게 꽂혔다.
“그래, 이브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이브는 정말로 화가 나면 누구보다 차갑고 이성적이게, 제 속내를 숨겼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이브가 저한테 화가 난 것이 있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정확했다.
“이브, 나에게 화난 게 있으면 솔직히 말해.”
“……내가 발레리안한테 화가 날 리가 있겠어? 애초에 내가 너한테 화를 낼 수 있는 입장 따위 못 되는데.”
그녀의 대답에 발레리안의 눈빛에 확신이 어렸다. 그녀가 그에게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그리고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이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성국이지.”
정확히 그가 있을 곳은 그녀 곁이 아닌, 성녀 이유리의 옆이었다.
그녀가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단호한 그녀의 눈빛을 본 발레리안의 얼굴에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결정을 번복하지 않으리란 걸.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외면했을 뿐이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이브.”
“더는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아.”
이브는 그의 말을 날카롭게 잘랐다.
이 대화를 질질 끌수록 그녀에게 불리했다.
생각보다 발레리안은 눈치가 빨랐고, 그렇다면 언제 그녀의 비밀을 알아낼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발레리안의 손에 죽었던, 악마들과 악마의 잔당을 떠올렸다.
‘이브 에스텔라, 처형식을 진행한다.’
발레리안의 음성이 생생하게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제 옷을 잡은 이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피스가 구겨지듯 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발레리안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점을 눈치채고 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 이브가 먼저 대화를 끊길 요구했다.
“……이 이상 대화는 무의미해. 그러니까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이브.”
“이제 무슨 말을 하든 대답하지 않을 거야.”
그의 부름에도 이브는 냉정히 돌아섰다. 발레리안은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그녀의 입에서 숨기는 게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
‘그러면 직접 알아낼 수밖에.’
발레리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집으로 돌아간 이브는 곧바로 부모님께 말했다.
“이제 발레리안이 찾아와도 문 열어 주지 마세요.”
“……그래.”
서로 마주 보던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러운 그들의 표정에 이브는 불안해졌다.
“혹시 저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요?”
“그건 아니란다. 그냥…….”
두 사람은 마음이 불편한 얼굴로 서로만 보고 있었다.
“이브, 이대로 괜찮겠느냐?”
그렇게 좋아해 마지않던 약혼자를 배신하고 그의 친구와 약혼을 했다. 오로지 그녀가 마법사라는 이유 하나로.
그들은 이브가 얼마나 힘들지 상상하면 가슴이 아팠다.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가져 봤자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전 괜찮아요.”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다.
일전에 우연이라도 발레리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방금 그를 만나고 완전히 매듭을 지으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리안의 옆자리는 내 몫이 아니었어.’
그걸 온전히 인정하게 되니까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편안해 보이는 딸의 모습에도, 백작 부부는 완전히 걱정을 씻지 못했다.
그들 뒤에 있던 노아가 그녀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잠깐 와 봐, 보여 줄 게 있어.”
“왜?”
그를 따라 응접실로 가자 어떤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 또 그 상자가 왔는데, 좀 이상한 게 있어서.”
그의 표정이 여느 때와 다르게 심각히 굳어 있었다.
선물을 받아든 이브는 대수롭지 않게 선물을 열었다. 이번에도 협박성 선물이 있겠지. 하지만 이번엔 그런 선물이 아니었다.
상자 안에는 하나의 편지가 있었다.
……당신에 대한 충심을 엘라의 죽음으로 증명하겠습니다.
라고 적힌 내용의 편지 하나만 있었다.
“나에 대한…… 충심?”
“뭔가 이상해서 이 편지 아래에 보이는 문양을 조사해 봤는데, 이거 봐봐.”
노아가 내민 책 안엔 편지 하단에 그려진 문양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책은 이 문양을 딱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었다.
[악마의 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