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완전히 머리꼭지가 돌았군.’
자비에는 이 상황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에스텔라 영애와 입맞춤을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순전히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지극히 에스텔라 영애의 돌발 행위였지.
“…….”
자비에는 슬쩍 발레리안의 눈동자를 보곤 해명을 포기했다.
무얼 말하든 저런 눈빛을 한 사람에게 통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하물며 연락도 없이 이 시간에.”
자비에는 발레리안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발레리안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 약혼을 계획한 게 누구인지 말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유감이네, 내 판단력을 믿는 대가는 좀 뼈 아플 텐데.”
발레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로 눈웃음을 짓는 그는 일면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태양의 힘을 보유해 누구보다 따뜻한 체온을 가진 그에겐 역설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면 정말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수가 있거든, 자비에.”
발레리안의 발걸음이 성큼 자비에에게 가까워졌다.
자비에는 이 상황이 별로 자신에게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걸 직감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발레리안, 공과 사는 구분하도록 해. 이러는 건 옳지 않다.”
“상관없어. 이젠 그 ‘공’이 없어졌거든.”
“무슨 뜻이지?”
자비에는 뒤늦게 발레리안의 가슴께에 황궁 기사를 뜻하는 훈장이 뜯겨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브를 생각해서 참아 보려고 했는데, 이브가 없으면 또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그의 판단을 점화시킨 건, 파혼 서류가 결정적이었다.
발레리안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 깨달은 자비에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상보다 더욱 안 좋았다. 이 눈앞에 있는 녀석의 상태가.
“죄를 지으면 악마가 사는 지하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하던데, 진짜인지 알게 되겠어.”
싱긋 웃던 발레리안은 돌연 싸늘히 얼굴을 굳히며 검을 뽑았다. 엘라만 사용할 수 있는 성검은 뽑히자마자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위용을 과시했다.
“발레리안! 성검은 악마를 죽이라고 하사한 검이다!”
정신 차리라는 듯 자비에가 경고했지만 과연 이런 말들이 효용성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지금 그의 기세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죽일 듯 살벌했다.
자비에가 다급히 문 쪽을 보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발레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유감이지만 내가 황궁 기사들을 다 물렸어. 지원군은 오지 않을 거야.”
“정말로 미쳤군.”
자비에는 여기서 상대를 자극해 봤자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발레리안의 모습을 보면 그저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자비에의 뇌리에 자구책이 떠올랐다.
“그래, 날 죽여라. 발레리안.”
“…….”
“하지만 이런다고 너에게 돌아선 에스텔라 영애의 마음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나?”
발레리안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점점 목을 죄어 오는 듯한 살기의 압박에 자비에는 얼어붙은 입술을 겨우 떼었다.
“단연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네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면 증오와 혐오만 짙어지겠지.”
“자비에, 큰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발레리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비에는 이어진 말에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제가 떠올린 수가 자구책이 아닌, 자충수였다는 걸.
“상관없어.”
그리고 생각보다 제 친우가 훨씬 더 미친놈이었다는 걸.
“이제 와서 이브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이브가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되거든.”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란 말인가.
자비에는 과거를 떠올렸다.
어릴 적에 에스텔라 영애를 만나기 전, 발레리안은 지극히 정의롭고 밝은 소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그 과거를 흔적도 없이 말살시킬 만치 충격적이고, 소름이 돋았다.
“이브는 내 세상에서 유일한 태양이었어. 그 태양을 훔친 대가는 책임져야겠지.”
서늘한 눈초리가 자비에의 얼굴에 날카롭게 박혔다.
발레리안의 손이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계세요? 전하.
이브 에스텔라.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자비에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기가 막힐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한편, 밖에 있던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여기에 있다고 했는데 그새 자러 간 건가?”
이브는 황태자 궁 시종장의 안내를 받고 여기까지 왔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겠냐고 제안했었지만, 어차피 간단하게 의논만 할 생각이었기에 거절했다.
‘그 정도 터치에 놀랄 줄이야.’
잠시 발레리안 앞에서 키스하는 척, 연극 하는 것만으로도 기겁을 하다니.
대중 앞에서 어디까지 터치가 가능한 건지 의논할 생각이었다. 위장 연인을 하려면 이 점은 확실하게 정해 두는 편이 나았으니까.
한 번 더 노크하려고 손을 들었던 이브는 순간 벌컥 열리는 문에 손을 허공에 멈추었다.
“……발레리안.”
그녀 앞에 문을 연 사람은 황태자가 아닌, 발레리안이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발레리안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제 얼굴을 빤히 보는 그의 시선에 이성을 찾고 침착히 입술을 떼었다.
“루드비히 경, 잠시 전하와 나눌 말이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발레리안은 잠시 실내에 시선을 던졌다.
무심결에 그의 시선을 좇은 그녀는 황태자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전하? 괜찮으세요?”
깜짝 놀란 이브는 곧바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식은땀을 흘린 채 앉아 있는 자비에의 상태는 보기에도 퍽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시종을 부를까요?”
“됐습니다.”
자비에는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제 미간을 쓰다듬었다.
“……이거 완전히 병 주고, 약 주는 꼴이군요.”
“네?”
그의 의문스러운 말에 이브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자비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왜 여기에 온 겁니까? 이 한밤중에.”
“……그게.”
이브는 슬쩍 발레리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집무실에서 나가지 않은 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브는 그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하려다가 외려 이 순간이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눈빛에 도는 이채에 자비에는 아까와 같은 불길함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전하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
이브가 수줍은 척 말했다. 그런데 자비에는 그녀의 말에 장단을 맞추기는커녕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영애…… 제발.”
상황 파악 좀 하십시오. 자비에는 목 끝까지 치미는 그 말을 억누르는 데 필사의 힘을 쏟아부었다.
그제야 이브는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정말 어디 아픈 거예요?”
겉으론 괜찮은 척해도 그녀와의 약혼이 생각보다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다. 이브는 착각했다.
‘생각보다 많이 연약한 황태자일세.’
이브는 엉거주춤 그의 곁에서 비켰다. 왠지 자비에의 눈빛이 그러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곤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발레리안.’
그와 시선을 마주한 이브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무심하면서 차갑기 그지없었다. 늘 따뜻하기만 했던 눈빛이 차갑게 식은 걸 보자 이브는 괜히 가슴이 찌릿했다.
‘나한테서 완전히 미련을 버렸구나.’
아마 그를 배신하고 황태자를 선택한 그녀를 경멸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라지 마지않던 오해였거늘.
모순적이게도 그의 반응에 이브는 삽시간에 기분이 아래로 추락했다.
“……루드비히 경, 황궁의 좀 불러 주시겠어요?”
이브는 발레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발레리안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됐습니다.”
자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마치 이 성가신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브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아니, 사이좋은 연인인 척해야 하는데 저렇게 가면 어떡한담!’
그녀가 붙잡을 새도 없이 자비에가 나가버린 바람에 집무실에는 발레리안과 이브, 단둘만이 남아버렸다.
어색히 눈알을 굴리던 이브는 발레리안이 입은 제복에 실밥이 뜯어진 걸 발견했다.
‘저기는 분명…….’
황궁 기사들이 기사 서임을 받을 때 하사받는 훈장을 다는 위치였다.
방금 연회장에서 봤을 때만 해도 그 훈장은 멀쩡하게 달려 있었다. 근데 왜 지금은 그 훈장이 안 보이는 거지?
이브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눈치챈 발레리안이 말했다.
“제 손으로 뜯었습니다.”
“……뭐?”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에 신경이 곤두섰던 이브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한발 늦게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훈장의 행방에 존대를 쓰는 것도 잊어버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