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이브의 말에 노아의 얼굴이 창백히 굳었다.
“뭐……?”
그대로 행동이 멈춘 그는 이브가 저지른 일련의 행동을 상기하며 기함했다.
“야, 그걸 알고 뜯은 거야? 미쳤어?”
“난 별로 독에 타격이 없어. 면역이 있나 봐.”
이브는 더욱 경악하는 노아의 얼굴을 보며 머쓱해졌다. 왜 이렇게 유난이람.
‘나도 처음엔 몰랐지.’
처음에는 협박 선물을 받고 무심히 창가에 방치했는데, 그 옆에 두었던 식물이 썩는 게 아닌가.
이브는 처음에 제가 물을 주지 않아서 썩은 거라 생각했지만 썩은 식물에서 나는 냄새가 굉장히 고약했다.
그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 독을 비밀리 조사했더니 환각성 맹독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장시간 맡으면 정신적인 질환을 일으키며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뒤로는 이브는 그 선물들을 단단히 밀봉해 침대 밑에 숨겨,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자신에겐 웬만한 독에 면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가족들의 손에만 닿지 않은 곳에서 잘 폐기 처분하면 되는 거 아닌가?
괜한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발레리안을 옆에 두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각오했었으니까.’
원작에서 이유리도 발레리안과 친하게 지내며 멸시 어린 시선과 살해 협박에 시달렸었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된 발레리안이 그 협박자를 찾아내어 일망타진했다.
공개적으로 그 협박자를 찾아내 재판에 회부시켰다.
그야말로 남자주인공답게 깔끔히 정리한 것이다.
“그런 독에 면역이 있다는 게 신기하네……. 마법사들은 다 그런 건가?”
노아의 중얼거림에 이브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때부터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어.’
이런 맹독에 면역이 있다는 게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은 아니지 않나?
심지어 자신은 발레리안과 같은 엘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제가 안일했다는 걸 인정했다.
그 결과는 이런 이상한 치정극의 배우가 된 것이고.
이브는 갑자기 몰려오는 진한 자괴감에 침대 위로 미적미적 올라갔다. 잠이라도 자고 싶은데 지나치게 정신이 맑았다.
‘이게 전부 발레리안이 준 약 때문이야.’
그녀는 괜히 속으로 그를 원망했다. 상황이 왜 이리 굴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발레리안의 눈빛과 허탈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아버지를 따라 공작성으로 들어온 발레리안은 가솔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집무실로 향했다.
연회장에서 일어난 사건의 여파로 발레리안의 얼굴은 온기 한 줌 없이 냉랭했다.
그가 집무실 손잡이를 잡자, 손잡이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그걸 무심하게 보던 발레리안은 힘으로 문을 밀고 들어섰다. 문의 잠금쇠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말리셨습니까?”
공작에게 묻는 발레리안의 얼굴은 예민하고 날카로운 기색이 만연했다.
그런 그를 루드비히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말리지 않았다면? 그럼 네가 무얼 할 수 있지?”
공작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발레리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저와 이브는 아직 파혼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루드비히 공작은 집무실 책상 서랍을 열어 한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니, 더 이상 에스텔라 가문과 루드비히 가문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발레리안은 곧바로 그 편지를 읽었다.
에스텔라 가문에서 온 파혼 서류였다. 그곳엔 루드비히 가문에서 백작 가문에 증여한 재산도 돌려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그가 잡은 종이 부위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걸 보던 루드비히 공작이 말했다.
“지금 힘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지. 이러니 이 약혼은 무산되는 게 맞다.”
발레리안을 보는 푸른 눈동자는 실망감과 착잡함이 얼핏 스쳤다.
“여자 하나에 휘둘려서 무슨 상상을 했는지, 무슨 행동을 하려고 했는지, 깊이 생각해라.”
서류 아래에 적힌 아버지의 사인을 본 발레리안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아버지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분이라면.”
발레리안의 어머니인 멜린에 관한 이야기에 루드비히 공작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루드비히 공작의 푸른 눈이 창밖으로 향했다.
그는 그 결혼을 후회하고 있었다. 멜린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 숨 쉬고 살아 있었을 테니.
“혼인 전이니 이쯤에서 그만 멈춰라. 그게 네 미래를 위한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이킬 수만 있다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았을 터였다.
멜린를 살릴 수만 있다면. 제 아들이 저 같은 과오를 범하는 건 원치 않았다.
“하…….”
발레리안은 탄식 같은 웃음을 흘렸다. 상황에 맞지 않은 웃음에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미 집무실 책상의 한쪽이 녹아서 사라져 있었다. 루드비히 공작은 눈썹을 치켜들며 발레리안을 보았다.
“발레리안, 정신 차려라.”
“저는 이런 식으론 절대 이브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가문의 명예가 걱정되신다면-.”
발레리안은 제 기사 제복의 가슴팍에 달린 훈장을 거칠게 뜯어내어 집무실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실 걱정 없도록 다 내려놓겠습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짓이지? 발레리안!”
쾅!
루드비히 공작은 아들이 나가버린 집무실 문을 당황한 시선으로 보았다. 붙잡을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손잡이가 없어진 문은 이미 잠금쇠가 망가져 너절해진 채 종이처럼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다소 황당하다는 듯 보던 공작은 깊이 한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후우.”
집무실에 남은 그는 이마를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어 보좌관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아니다.”
막상 보좌관이 눈앞에 나타나자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다소 당황한 얼굴로 레인 페드로는 공작을 힐끔 쳐다보았다.
부서진 집무실의 문과 무언가를 말하길 머뭇거리는 공작님.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레인 페드로는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루드비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황궁에서 들리는 소식이 있으면 전하도록. 특히 발레리안과 연관된 소식이라면 지체 없이 전달해야 할 것이다.”
“예.”
보좌관 레인 페드로는 명을 받았다.
한편, 황궁의 보초를 서던 기사들은 익숙한 얼굴에 당황했다.
발레리안 루드비히.
황궁 기사 중 루드비히 경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대신전에서 최고 기사직을 맡고 있었지만, 추후 황궁 기사단도 통솔할 엘라였기 때문이다.
밤중에 루드비히 경이 왔다는 것보단 그의 살벌한 기세가 그들의 당황스러움을 가증시켰다.
‘혹시…….’
탄신연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그들도 들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었던 그들은 당연하게도 그 얘기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연회에서 돌아온 황태자의 명에 당황했다.
-당분간 발레리안 루드비히가 온다면 출입을 자제시키도록.
처음 받아 보는 명령에 기사들은 술렁거렸다.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루드비히 경이 시한부였던 약혼녀를 위해 귀한 약초를 구하러 드래곤의 숲을 간 이야기는 제도 전반을 휩쓸었다.
제도 사람이 좋아하는, 퍽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이야기였으니.
그 유명한 이야기가 제도 전역에 파다한데 그런 약혼자를 버리고, 황태자와 약혼 발표를 하는 건 웬만한 사람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욱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 명을 받기 전까지는.
그들을 본 발레리안이 말했다.
“황궁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예.”
루드비히 경의 가슴팍에 훈장이 뜯긴 것을 보고 멈칫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본 발레리안이 난감한 듯 싱긋 웃었다.
“수선이 덜 되어 있었는지 떨어졌습니다.”
“아, 그런 거였군요! 저희도 조심해야겠습니다.”
당연하게 길을 비키려던 그들은 명령을 상기하고 다시 막아섰다.
“아, 죄송하지만 당분간 루드비히 경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금지? 황태자의 명입니까?”
푸른 눈동자가 사냥하는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보초를 선 기사들은 주춤하다 입을 열었다.
“네…… 억!”
대답하자마자 기사들은 단말마 같은 소리를 내뱉은 뒤, 기절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의 뒷목을 쳐 가볍게 기절시킨 발레리안은 기사들을 옆에 있던 풀숲에 던져놓고 유유자적 황궁으로 들어섰다.
그러한 명령을 하달받은 건, 보초를 서는 기사들뿐.
궁내에 들어온 발레리안을 발견한 궁내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인지라 자연스레 그의 곁을 지나쳤다.
그러나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으레 발레리안에게 인사를 나누곤 했던 그들은 발레리안의 싸늘한 눈빛에 겁을 먹고 말조차 걸지 못했다.
황태자의 집무실에 도착한 발레리안은 잠시 문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공작성에 있던 일처럼 이번에도 엘라의 힘에 손잡이가 녹아내리면 곤란했다. 누가 도중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안 되었으니.
엘라의 힘을 억누른 발레리안은 노크도 하지 않고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발레리안,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지?”
분명히 황실 기사들에게 발레리안의 출입을 자제시키라고 언급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발레리안이 있다니, 상황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자비에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발레리안의 눈빛을 본 그는 직감했다.
‘제정신이 아니군.’
엘라의 힘으로 인해 실내의 온도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일전에 에스텔라 영애가 시한부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기세가 더 거셌다. 자비에는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그 말에 발레리안은 집무실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곤 문을 잠갔다.
자비에는 속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 문을 잠근 모습에 여러 상상이 스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방금 황실의 전령이 가져온 소식을 떠올렸다. 잠시 뒤에 이브 에스텔라 영애 쪽에서 황궁에 방문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그녀가 방문하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아마 위장 약혼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러 오는 것 같은데.’
자비에는 그녀의 방문이 이 상황을 불식시킬지, 악화시킬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비에, 여유가 있어. 이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하다니.”
발레리안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겉보기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미소였지만 푸른 눈동자에 눅진한 살기가 서렸다.
참아 왔던 살기가 서슴없이 드러나자 자비에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