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한 귀족들의 사이에선 커다란 탄성이 튀어나왔다.
“어머!”
“허어……!”
상황에 휩쓸린 자비에는 그녀의 말대로 손으로 그녀와 제 얼굴 사이를 가렸다. 꽤 빠른 임기응변이었다.
눈을 감은 채 키스하는 척 이브는 수줍은 얼굴로 자비에에게 떨어졌다. 발레리안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던 이브는 자비에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얼굴이 완전히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라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진짜 키스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담.’
이브는 자비에에게만 들릴 만치 속삭였다.
“괜찮으세요, 전하?”
아무런 짓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지?
‘아…… 혹시 순결을 지키고 싶었던 건가?’
자비에만큼 사교계에서 깨끗한 이미지를 보유한 사람은 없었다. 아, 한 명 더 있긴 했다. 발레리안.
‘흠, 조금 미안하네.’
평판을 신경 쓰는 자비에에게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추문을 확인 사살하는 건 조금 가혹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럼 애초에 내 제안을 거절했어야지.’
문득 원작을 떠올린 이브는 탄식했다.
자비에가 이유리에게 했던 절절한 첫 고백. 거기서 그는 이유리와 손을 잡는 것마저도 부끄러워했고 조심스러워했다.
넌지시 여자와의 접촉이 처음이라는 게 묘사된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
‘근데 그 장면이 나올 일은 없겠네.’
갑자기 미안함과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자비에가 보기보단 순정파였구나.
이브는 작게나마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전하.”
그에게만 들릴 만치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녀의 숨이 그의 귓가를 간질거렸다.
그게 더 자극이 된다는 걸 모르는 이브는 그새 더 붉어진 자비에의 얼굴을 의아한 시선으로 보았다.
“……아닙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대답했다. 여전히 붉은 얼굴을 한 채 그는 이브의 얼굴을 살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자비에는 그녀가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하는 척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어찌 이리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무심해도 정도가 있었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이브는 그의 시선 처리에 난감해졌다.
‘많이 불쾌했나 본데.’
발레리안의 마음을 완전히 돌아서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급한 나머지 전후 설명도 없이 행동부터 옮겨 버렸다.
어떻게든 추후에 제대로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뒤에서 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에 뒤를 돈 이브는 흠칫 몸을 떨었다.
“……발레리안.”
잠시 자비에의 반응에 시선이 팔려서 발레리안을 잊고 있었다.
이미 귀족들은 이상 징조를 알아차리고, 슬금슬금 발레리안의 곁에서 떨어졌다. 주위에 대기하던 기사들은 움찔하며 황제를 보았다. 시선을 받은 황제는 그런 기사들에게 눈짓으로 행동을 멈추라는 지시를 넌지시 내비쳤다. 그리곤 조용히 이 상황을 관망했다.
발레리안이 자비에를 향해 한 발 내딛는 순간, 긴장의 끈이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장내가 엘라의 힘에 압도되어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할 때였다.
“발레리안, 여기서 멈춰라.”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루드비히 가문의 수장, 디에고 루드비히였다.
엘라의 기세에 억눌려 그 누구도 입도 벙긋하지 못할 때, 유일하게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 심연 같은 눈동자가 매섭게 제 아들을 쏘아보았다.
장내에 탄식 같은 안도의 한숨이 곳곳에서 내뱉어졌다.
루드비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울림 있는 낮은 목소리가 생생하게 발레리안의 귀에 박혔다.
“여기서 가문의 이름에 먹칠할 생각은 아니겠지. 발레리안 루드비히.”
“…….”
“하극상은 이걸로 끝이다.”
루드비히 공작의 시선이 이브의 얼굴에 닿았다.
이브는 그 시선에 뼛속까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지만, 똑바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루드비히 공작의 눈빛에 의심이 섞였다.
태양의 힘을 타고난 사람은 기세만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지금 발레리안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엘라의 힘을 방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브 에스텔라는 미동도 없었다.
반면 옆에 있던 자비에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발레리안이 방출한 태양의 힘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엘라의 힘이군.’
처음으로 엘라의 힘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자비에는 예상보다 더욱 위압적인 힘에 침음을 삼켰다.
자비에는 옆에 있는 에스텔라 영애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그와 달리 멀쩡했다.
마치 엘라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그럴 리가.’
자비에는 일순 든 제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삼켰다. 지상에 엘라의 힘에 영향받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 영향권엔 악마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힘인 것이다.
으레 이런 힘을 가진다면 제왕의 자리를 욕심낼 법한데도 루드비히 가문은 철저하게 황제의 곁을 지켰다.
오히려 그 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충직함으로 그들은 제국민들의 신임을 얻었고 더욱 공고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루드비히 공작이 발레리안을 보며 말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반역이라도 저지르겠다는 말이냐.
발레리안을 보는 공작의 눈빛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읽은 발레리안은 피가 흐를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제 의지를 실행으로 옮길 수 없었다.
왜냐면 자신은 제국의 엘라니까.
그 역할을 저버리면 정말로 이브는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돌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은 양가감정이 거세게 충돌했다.
그녀에게 진득하게 머물러 있던 푸른 눈동자가 떨어졌다.
잠시 후, 발레리안은 뒤돌아 연회장을 나갔다.
* * *
“독하다. 진짜 독하다.”
이브가 연회에서 있던 일을 말하자, 노아가 혀를 내두르며 이브를 질린 눈으로 보았다.
“와, 진짜 거기서 저질러 버릴 줄이야.”
“하는 척한 건데 왜?”
“그걸 대중 앞에서 한다는 게 보통 정신으론 불가능하지.”
“지극히 제정신인데.”
이브는 조금 후련한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이제 리안도 이곳에 더는 안 오겠지.”
“……그러겠지. 약혼녀가 그런 짓을 했는데 나라도 정나미가 다 털리겠다.”
윽. 그런 마음 아픈 소리는 하지 말아 줄래?
이브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이불 안에 숨었다.
“여기서 숨어 봤자 뭐 하냐…….”
노아가 한숨 섞인 어투로 말했다. 이브는 이불 안에서 꿍얼거렸다.
“어차피 리안도 마음이 바뀔 텐데, 뭐…….”
“그러겠지. 그러고도 널 좋아하면 등신이지.”
“아까부터 자꾸 아픈 말만 골라서 할래?”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게 내 탓인가!
이브가 이불을 확 걷으며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노아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빠르게 방을 나갔다.
“하여간 염장질은 제일 잘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노아가 노크하며 방에 들어왔다. 조금 다급해 보였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불길함을 감지한 이브가 서둘러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빨리 좀 말해 봐.”
설마 발레리안이 찾아온 건 아니겠지?
노아는 그녀의 창문을 살피며 물었다.
“야, 혹시 막…… 창문에서 뭐 날아오거나 하진 않았지?”
“응? 창문?”
이브는 문득 창문을 보았다. 멀쩡한 창문을 왜 보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창문이 완전히 하얀 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화들짝 놀란 이브가 창문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노아가 급히 붙잡았다. 그로 인해 멈춘 그녀는 의아한 시선으로 노아를 보았다.
가만 보니 그는 빈손이 아니었다.
선물상자와 여러 개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뭐야, 그건?”
뭔가 익숙한 모양새였다.
“이거 너한테 온 건데 아무래도…….”
노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녀석의 광신도들이 보낸 것 같아.”
“그 녀석?”
“발레리안.”
“아.”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안을 신처럼 여기며 추앙하는 사람들이 제국엔 꽤 많았다. 대부분은 대신전을 오가는 독실한 신자였지만 발레리안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하긴, 그런 사람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어.”
예상했던 전개였다.
“뭐?”
어떻게 그 생각을 했냐는 듯한 의문 섞인 노아의 시선에 이브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약혼할 때도 이런 깜짝 선물들이 쏟아졌었거든. 가끔씩 지금까지 보내는 끈기 있는 녀석도 있었고.”
발레리안을 추앙하는 사람은 성국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도 많이 숨겨져 있었다.
조금 신기한 사실은 이러한 협박성 선물을 보내는 사람들이 모두 여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생각보다 영식들도 많았다.
“이번에 뭐가 있으려나. 살해 협박?”
이브는 능숙하게 노아의 손에서 선물을 받아 뜯었다.
이제는 익숙해서 내적 친밀감까지 생길 정도였다. 이건 그때 그 녀석이 또 보낸 모양이네.
선물상자 모양이랑 색감만으로 어떤 애가 보냈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야! 거기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조심성 없이 열어 보는 거야?”
노아가 깜짝 놀라 이브에게서 다시 선물상자를 빼앗았다.
이브는 그런 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런 거에 당할 사람으로 보여?”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 들어가는 바보가 이 세상에 어딨는데.”
“여기.”
이브는 바로 노아에게서 상자를 빼앗아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귀여운 곰 인형이 들어 있었다.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 인형을 집어 올렸다.
그러자 곰 인형이 끼긱-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목과 몸이 떨어졌다. 안에는 무슨 액체를 넣은 건지 빨간 액체가 그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미친 자식!”
겁에 질린 노아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브는 그 빨간 액체를 킁킁 냄새 맡곤 토마토와 딸기를 섞어 끓인 잼 같은 액체라는 걸 알아챘다.
“이게 끝인가?”
이브는 허무한 얼굴로 다시 곰 인형을 집어넣었다.
이번엔 어떤 창의성 있는 선물로 날 협박할까, 조금 기대했는데 실망이 컸다.
“뭐야, 왜 그렇게 담담해…….”
일순 겁을 먹었던 노아는 차분한 이브의 모습에 저 자신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오는 노아를 막은 건 이브였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독 같은 게 뿌려져 있을 수도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