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 시선을 느낀 건 비단 이브뿐만이 아니었는지 자비에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발레리안의 얼어붙은 눈빛은 어느 때보다 살벌하고 흉흉했다. 한기가 뼛속까지 저미는 듯했다. 그의 분위기에 자비에도 확신했다.
‘아직 소식을 못 들은 모양이군.’
루드비히 공작이 발레리안에게 둘의 약혼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이다. 공작의 의도를 읽은 자비에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사실을 굳이 눈앞에서 확인하게 하여 충격 요법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공작은 이미 에스텔라 영애와 황태자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을 터.
소문대로 참 냉혹한 사람이었다.
황제도 그들의 시선이 어디로 향한 지 깨닫고 발레리안에게 미소 지었다.
“그래, 장차 황실 기사단을 이끌 재목으로서 인사를 해 두는 것이 좋겠지.”
“…….”
“앞으로 황궁에서 자주 보게 될 얼굴이니 잘 숙지해 놓도록 하거라.”
황제가 누굴 지칭하는 말인지는 명확했다. 그의 시선이 이브에게 향한 것을 본 발레리안의 눈빛에 차가운 불꽃이 튀었다.
주먹을 쥔 그의 손이 떨리는 걸 목격한 이브는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한 장본인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뭐야……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고?’
생각보다 직설적인 황제의 말에 이브는 당혹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황제의 말로 연회장은 한 번 더 찬물 샤워를 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만큼 황제가 던진 말은 노골적이었다.
황제의 말을 자비에가 능숙하게 받았다.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린 채.
“앞으로 잘 부탁하지, 내 약혼녀를.”
그리곤 악수를 청하듯이 발레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브는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무언가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발표를 할 줄 알았건만.
예정 시간보다 폭탄 투하 속도가 훨씬 빨랐다.
문제는 그녀 자신도 그 장단에 맞추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이 제안을 한 게 나였지.’
거기다 황제까지 나서서 이렇게 순순히 장단에 맞추어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브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바로 세웠다. 여기서 뒤로 물러서는 기색을 보여선 안 되었다.
이 약혼에는 그녀의 의지가 컸다는 걸 보여 줘야 했으니까.
자비에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그녀만 보고 있는 발레리안을 향해, 이브가 이윽고 입술을 열었다.
“잘 부탁드려요, 루드비히 경.”
발레리안을 정면으로 본 이브는 저도 모르게 깊이 안심했다.
‘다행히 회복했구나.’
외관상 그의 모습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일전에 악마에게 당해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브는 내심 걱정되어 불안한 하루를 보냈었다.
행여 그 부상으로 발레리안에게 후유증이라도 남는 건 아닌지.
주인공이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보지 않으니 걱정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이제 그 걱정은 눈 녹듯 씻겼다.
조금 후련해진 마음으로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으며 드레스를 잡고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의 약혼녀 이브 에스텔라예요.”
이브의 말로 그의 감정이 화르륵 점화된 듯 그를 감싼 분노가 장내를 순식간에 잠식했다.
완전히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자비에조차 몸이 뻣뻣하게 굳었을 정도였다.
그 분위기를 읽었지만, 이브는 여상히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알게 될 거라고 했죠? 제 진심을요.”
“이게…… 영애의 진심입니까?”
무언가 끓어오르는 걸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는 짐짓 신사적이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초인적인 인내로 제 감정을 다스리고 있다는 걸.
“네, 이게 제 진심이에요. 미안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어요.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길 바란다는 건 어찌 보면 욕심이 아닐까요? 루드비히 경도 곧 좋은 상대를 만날 거예요.”
누가 들어도 참 쓰레기 같은 멘트였다.
그 위장 약혼의 가담자인 자비에조차 속으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브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만인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었다.
심지어 그녀를 위해 가문 가문의 재산을 반이나 증여하고, 영약까지 구해 온 약혼자, 아니, 전 약혼자에게…….
자비에는 그녀가 자신의 평판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걸 다시 한번 통감했다.
그래도 그러한 말을 아무런 동요도 없이 말하는 그녀가 예사로운 인물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렇습니까.”
발레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에스텔라 영애를 바라보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류에 다들 숨 막힌 표정으로 침만 삼켰다.
절로 가슴이 선득해지는 얼음 같은 비소였다.
그의 표정을 읽은 이브는 각오한 일이었음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 속내와 달리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밤하늘 아래 고요한 연못처럼 잠잠하고 차분했다.
귀족들은 그녀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안 루드비히가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그녀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마성이 있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를 환기시킨 건 황제였다.
“본래 사람의 마음만큼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없지. 자, 이제 그만 다들 연회를 즐기게나.”
황제가 연회장 한쪽에 앉은 궁중 악단에 눈짓했다.
그러자 고아한 선율이 흘러나와 연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조금은 풀어진 분위기 속에 이브가 빠르게 자비에에게 눈짓했다.
그 시선을 받은 자비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같이 추겠습니까?”
“너무 좋죠.”
이브는 바로 자비에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향했다.
여전히 귀족들의 시선이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흥미로움과 경악이 한데 얽힌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이브는 생각보다 감흥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그녀 앞에서 비소를 짓던 발레리안의 얼굴만 둥둥 떠다녔다.
자비에와 이브가 플로어로 들어서자 음악이 왈츠로 바뀌었다.
“춤은 출 수 있습니까?”
“절 뭐로 보시고. 제가 전하의 자리에서 출 수도 있어요.”
남녀 파트 둘 다 꿰고 있다는 이브의 말에 자비에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이브는 무척이나 거북해졌다.
“뭔데요, 그 표정.”
“이런 춤을 즐길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매일 집무실에 박혀서 일만 해 봐요. 일 빼곤 다 재밌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전혀 공감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 완전히 일벌레 아니야?
절로 질색한 표정이 떠오를 뻔했지만, 이브는 그와 같이 춤을 추는 게 황홀하고 행복한 듯 싱긋 웃었다.
이브는 자비에의 어깨너머로 흘긋 연회장을 살폈다. 어느덧 발레리안은 장내에서 사라져 있었다.
“휴우…….”
그녀는 긴장의 끈을 놓고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던 자비에가 살짝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영애는 귀족들의 시선보다 발레리안의 시선 하나가 더 무서운 모양이군요.”
자비에의 지적이 정확했다. 이브는 그의 말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발레리안을 찾는 거라면 아까 테라스로 나갔습니다. 영애의 계획이 꽤 잘 먹혔던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그녀의 계획이 통했다라.
무릇 작금 상황을 생각한다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왜인지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이브는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이 순간이 행복한 척 활짝 웃었다.
그런 그녀를 자비에가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구나, 신기해서 봤습니다.”
담백한 어조엔 조롱의 의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빠진 이브는 미간을 좁혔다.
“점점 솔직해지시는 것 같아요. 과유불급이란 말씀 혹시 아세요?”
“최근에 제 앞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을 만나서 말입니다. 사람은 주변인을 닮는 법이죠.”
“누군지 몰라도 멀리하시는 게 좋겠네요.”
뻔히 그녀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이브는 가볍게 무시했다. 플로어에서 스텝을 맞추던 자비에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감탄했습니다.”
조금 생뚱맞은 그의 말에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그게 언제를 지칭하는 건지 확실히 가늠되지 않았다.
“발레리안을 상대할 때, 그 완벽한 연기, 처세술. 저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5년 동안 사랑했던 연인에게 망설임 없이 비수를 꽂는 냉혹한 결단력.”
“차라리 욕을 하세요.”
“진심으로 제가 배우고 싶은 부분입니다. 훗날 큰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 때 평정을 잃고 감정에 치우친 사고를 하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으니.”
이브는 자비에가 무얼 얘기하는지 비로소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음악 한 곡이 끝났다. 플로어에서 벗어난 이브가 입술을 뗐다.
“방금의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니, 쉽지 않은 인생이네요.”
자비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 그도 씁쓸했는지 가라앉은 시선으로 샴페인을 머금었다.
그때, 테라스에 있던 발레리안이 장내로 들어왔다.
아까 단정했던 모습과 다르게 조금 머리와 옷이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귀족들의 시선이 바로 그에게 향했기에 이브 또한 그의 존재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이브는 떠올렸다.
오늘 아침에 오라비 노아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사람들 앞에서 확 덮쳐버려.”
“……누굴?”
“당연히 자비에지.”
만약 그걸 실행으로 옮긴다면 지금만큼 적기는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이브가 자비에에게 속삭였다.
“전하, 저희 약혼하는 거 맞죠?”
“……왜 그런 걸 묻습니까.”
자비에는 불길한 표정을 지은 채 이브를 보았다. 새삼스럽게 묻는 태도에 뭔가 일을 치를 것 같은 느낌이 만연했다.
“약혼한 사이니까 확실하게 보여 줘야죠. 키스하는 척해요. 빨리!”
발레리안의 시선이 이곳에 향한 걸 눈치챈 이브가 다급히 속삭였다.
“어, 어떻게 하는 척을 하라는 말인지……!”
당황한 자비에의 모습에 답답해진 이브는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곤 자비에의 얼굴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