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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21화 (21/100)

21화

수많은 귀족의 인파에도 잠잠했던 심장이 그를 발견하자, 빠르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우리를 본 건가?’

금색의 황실 기사 제복을 입은 그는 멋진 맵시를 드러냈다. 누가 봐도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것처럼. 홀린 듯 이브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잠시 다른 곳을 보던 발레리안은 같은 제복을 입은 기사가 다가오자 다른 용무가 생겼는지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

‘휴.’

오늘 제 목적도 일순 잊어버리고 진심으로 안도하던 이브가 흠칫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람.’

이 약혼의 목표는 발레리안의 마음을 접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를 피하려고 한다니, 정말로 모순적인 행동이 아닌가.

‘정신 차리자, 이브.’

한 번 더 결심을 굳힌 그녀는 황태자의 팔에 손을 끼워 넣어 팔짱을 꼈다.

“어서 다정한 척 연기하세요.”

그리곤 그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속삭였다. 자비에는 조금 주춤하더니 보여주기식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봐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였지만 잘난 외모가 그의 몹쓸 연기를 가려 주고 있었다.

그와 나란히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귀족들의 수군거림은 더욱 커졌다.

“에스텔라 영애 아니에요?”

“맞아요, 루드비히 소공작의 약혼녀…….”

“어머……!”

황태자와 에스텔라 백작 영애를 본 시종이 연회장 내에 외쳤다.

“자비에 루 힐리오스 황태자 전하와 이브 에스텔라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큰 연회장 문이 열리고, 이브는 황태자와 함께 장내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자 시끄럽던 장내는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고요했던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뒤, 그들이 들어오기 전보다 장내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귀족들은 당황스러움과 흥미가 한데 뒤섞인 얼굴로 수군거렸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황태자와 에스텔라 영애가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하다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어요.”

그건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애 자비에랑 파트너로 데뷔탕트를 치를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리 원만한 관계도 아니었고, 오히려 앙숙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이질적인 느낌은 없네요.”

기묘한 조합에 놀라던 그들은 아름다우면서 신비로운 분위기가 흐르는 이브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러나 그러한 감탄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럼 루드비히 소공작은 어떻게 된 걸까요?”

누군가 도화선에 불을 댕기면서 촉발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이브는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며 연회장을 살폈다.

그러다 루드비히 공작을 발견하고 흠칫 얼굴을 굳혔다. 칵테일을 마시던 공작은 이브와 자비에를 흘긋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이브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차린 자비에가 말했다.

“루드비히 공작이라면 일찌감치 알고 있습니다.”

“네?”

이브는 화들짝 놀랐다. 루드비히 공작이 알고 있다면 발레리안도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런데 공작이 어떻게 벌써 알고 있다는 거지?

“본디 궁에서 이만한 일을 벌이려면 공작의 암묵적인 동의도 필요합니다.”

자비에가 그 의문을 불식시켜 주었다.

“……허락하신 거였구나.”

이브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5년 동안 보아 온 세월이 있는데 한순간에 허락했다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배신감이 커서 그러시겠지.’

그녀가 생각해도 이 상황은 도의적으로 크게 어긋난 상태였다.

제 아들이 약혼녀를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영약을 찾겠다고 드래곤의 숲까지 갔는데, 돌연 그녀가 황태자와 약혼한다.

연회장에서 루드비히 공작이 당장 칼을 뽑고 그녀 앞에서 칼춤을 추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그럼 발레리안도 알고 있는 걸까.’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의 안색을 본 황태자가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혹시 발레리안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자비에도 발레리안의 반응이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녀석, 충격이 크겠지.’

자비에는 아버지께 전해 들은 신탁의 내용을 상기하곤 얼굴을 굳혔다.

지금은 친우의 마음을 돌볼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악마들과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야만 했다. 위험 요소는 배제하면 할수록 좋았다.

냉정하게 머리를 식힌 자비에는 트롤리에 있던 샴페인을 두 잔 들었다.

그리곤 한 잔을 이브에게 건넸다.

“술이 들어가면 좀 더 괜찮을 겁니다.”

“아뇨, 소용없어요. 저번에 리안이 준 영약을 먹고 나서부터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더라고요.”

“……허.”

자비에는 감탄사를 흘렸다.

거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불로초인 만큼 효능도 뛰어난 듯했다.

“그런 건 제가 아니라 폐하께 드려야 했었는데 죄송해요.”

이브의 사과에 자비에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에스텔라 영애의 몫이었던 약입니다. 그런 사과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그는 아쉬운 기색조차 없었다. 매사가 참으로 담백하고 깔끔한 남자였다.

이브는 원작에서 본 자비에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비로소 인정했다.

‘그런데 나한테만 왜 그랬던 건지.’

새삼 그가 왜 자신한테 그리 차갑게 굴었던 건지 궁금해졌다. 단순히 발레리안의 약혼녀라서? 그건 아닐 텐데…….

때마침 영약의 존재를 떠올린 귀족들은 이브를 보며 수군거렸다.

“당연히 목숨을 구해 준 루드비히 경과 함께 연회에 참석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대체 무슨 일인 걸까요? 설마…….”

그 얘기를 들은 이브는 고구마를 백 개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외면했던 양심의 가책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게 꾀병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그게 꾀병이라는 걸 알고 있는 발레리안이 입이라도 벙긋하면 그대로 죽는 목숨이었다.

루드비히 공작이 불도저를 끌고 에스텔라 가문을 밀어버리려고 한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무모한 발상이었는지 깨달았다.

‘자비에, 나 살려 줄 거지?’

이브는 간절한 시선으로 자비에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자비에는 부담스러운지 비스듬하게 시선을 피했다.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불길하군요.”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이브의 마음이 짜게 식었다.

‘역시 비호감이다.’

자비에의 다정남 속성은 이유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족들은 더욱더 탄성을 터트리며 수군거렸다.

“진짜 황태자 전하께서 단단히 빠지셨나 봐요!”

“어머, 어머…….”

어쩜 이렇게 단단히 오해할 수 있는 걸까.

여기 서먹하기 그지없는 한 쌍이 보이지 않나요?

그러나 귀족들은 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들은 계속 서로 속삭이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황태자와 에스텔라 영애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다.

‘왜 전하께서 에스텔라 영애와 함께 있죠?’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루드비히 소공작과 저분들 사이가 얼마나 각별한데…… 두 분이 루드비히 소공작을 배신이라도 했다는 말씀인가요?’

대충 이러한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을까 예상했다.

이브는 그 소식이 곧 강림할 이유리에게까지 당도하길 바랐다.

‘위로 속에 꽃피는 사랑인 거지.’

이유리가 모쪼록 상처받은 발레리안을 잘 위로해 주길 바랐다.

그때, 황제가 입장한다는 시종의 목소리가 장내에 우렁차게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러자 장내가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우르르 양옆으로 갈라졌다.

황태자는 이브를 이끌고, 황제가 걸어오는 쪽에서 가장 가깝게 섰다.

살짝 고개를 숙인 이브가 자비에에게 속삭였다.

“근데 폐하께는 어떻게 말씀드리죠?”

안 그래도 병환으로 힘든 황제가 이 소식까지 듣는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건 아닐까 심히 우려스러웠다.

“당연히 다 알고 계십니다. 영애께서 걱정할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네.”

며칠 만에 황제한테도 이야기를 끝내 놓았다니. 새삼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

이브는 고개를 슬쩍 들어 황제가 있던 쪽을 보았다. 그런데 황제 곁에 발레리안이 서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이브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영애.”

몸이 바짝 굳은 채 꼼짝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자비에가 말을 걸었다.

그 목소리에 애써 침착함을 찾은 이브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황제가 그녀의 앞에 있었다.

자비에와 같이 검은 머리를 가진 그는 세월의 흐름으로 눈가에 어린 옅은 주름이 있었지만 젊었을 때 꽤나 잘생겼을 외모였다.

“폐하, 옥체는 괜찮으십니까?”

자비에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황제는 웃음을 흘리며 괜찮다 손을 저었다.

“내 걱정은 아서라, 괜찮으니 지금 이렇게 나왔지 않느냐.”

괜찮다고 말했지만, 황제의 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누가 봐도 병환이 짙은 모습이었다.

‘아…… 그 영약.’

이브는 아픈 황제를 보자마자 제가 먹은 영약 카빌라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왠지 업보를 하나 더 추가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가 바로 에스텔라 백작의 여식인가? 이렇게 보니 반갑구나.”

황제의 물음에 이브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이브 에스텔라입니다. 이렇게 뵈어 영광입니다. 폐하.”

“하하, 백작의 딸 칭찬은 귀가 닳도록 많이 들었지. 백작과 많이 닮아서 그런지 낯설지가 않은 용모야.”

“……감사합니다.”

황제 앞에서도 아버지가 팔불출 기질을 뽐낸 모양이었다. 이브는 난처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어넘겼다. 그런 소탈한 미소에 이브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생각보다 부드러우시네.’

처음 만난 황제는 인상도 좋고, 성격도 좋아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비에가 누굴 닮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에스텔라 백작은 잘 지내는가?”

백작에 대한 안부를 묻는 황제에게 이브는 아버지 근황에 대해 조곤조곤 얘기를 건넸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 깨달은 이브는 굳었다. 발레리안이었다.

황실 기사 복을 입은 그는 조명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정말 태양 같았다.

마치 이 세계에서 주인공은 나라는 듯이.

그의 시선이 그녀와 그녀 곁에 있는 자비에에게 닿았다. 저를 향한 시선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모습에 이브는 직감했다.

‘발레리안…… 모르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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