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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20화 (20/100)

20화

그날 밤.

에스텔라 백작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황태자가 에스텔라 가문으로 보낸 옷 재단사와 보석 디자이너로 상황을 강제로 파악하게 된 탓이다.

“이브!”

“이게 무슨 일이니!”

“너 미쳤어?”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 노아의 기함을 들으며 이브는 옷 수치를 재는 재단사에게 몸을 맡겼다.

“일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아니, 그래도…… 전하와 약혼이라니!”

백작의 호통에 황실에서 온 재단사와 보석상은 흠칫 놀랐으나 모른 척 제 할 일을 했다.

‘루드비히 소공작의 약혼녀가 황태자와 약혼!’

누구든 기함할 소식이었지만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눈과 귀를 닫는 데 능숙했다.

하지만 그들이 의식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이쪽을 흘긋 곁눈질로 살피고 있었다. 이브가 슬쩍 그 부분을 지적했다.

“여기 우리만 있는 거 아니에요. 조금 이따가 이야기 나눠요.”

그녀의 말에 가족들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여기서 가장 답답한 건 나라고.’

이브는 울컥 치밀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게 저라고 반가울 리 없었다.

그녀의 흉흉한 분위기에 재단사와 보석 디자이너는 빠르게 제 업무를 완수하고 저택을 떠났다.

그들이 가자마자, 가족들은 한 몸이라도 된 듯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앗, 깜짝이야!”

노크도 없이 들어온 가족들의 모습에 이브가 깜짝 놀랐다.

“이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구나.”

백작 부인이 차분한 음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브는 그간에 있던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백작 부부는 발레리안의 행동에 많이 놀란 듯했지만, 노아는 생각보다 잠잠했다.

“노아, 이 일을 예상하고 있었어?”

“……뭐, 조금은.”

발레리안과 자비에, 노아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발레리안을 만나게 된 계기도 노아를 따라 황실에 갔다가 만나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노아가 그들의 오작교가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발레리안이 널 좋아하는 건 누가 봐도 알았지.”

“그렇다고 보통은 이런 식으로 붙잡진 않아.”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아는 그녀의 말에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이브는 피곤한 얼굴로 부모님께 사실을 말했다.

“……그래서 리안이 내가 이 약혼을 인위적으로 깨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럼 이런 방법으로 빠르게 단념시키는 게 최선이죠. 더 끌어봤자 상처만 남을 테니까요.”

이브의 말에 백작 부부는 죄인이 된 얼굴로 시선을 들지 못했다.

그들을 본 이브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저분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여느 집안이었으면 마법사로 태어난 딸을 버리려거나, 죽여서 존재를 지워 버리려고 했을 터였다.

오직 자신들의 평탄한 삶을 위해, 자식을 버리는 이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그러지 않았다. 오직 딸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는지 이해해요. 하지만 저만 생각할 게 아니라, 노아도 생각해 주세요.”

하지만 노아를 생각했다면, 그래선 안 되었다. 그녀의 말에 노아의 몸이 움찔했다.

* * *

다음 날, 해가 밝았다.

물론 이브는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 그 영약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몸져누웠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 슬슬 연회를 가기 위해 치장을 해야만 했다. 부모님과 노아에겐 연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일러 둔 상태였다.

‘어차피 좋은 꼴을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삿대질 당하며 누군가에게 칵테일이라도 맞을 각오도 하고 있었다.

‘과연 황태자의 약혼녀한테 그럴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녀가 무거운 얼굴로 한숨만 푹 내쉬고 있자, 익숙한 딴죽이 들려왔다.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꼴을 해 놓고 괜찮은 척은…….”

노아 에스텔라였다.

“아침잠도 많으면서 웬일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들 남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잠이 더럽게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생전에 아침 인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생소한 기분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익숙한 침묵이 잠시간 흐르고,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을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불안해서 말이야.”

“뭐가?”

“발레리안, 그 자식이 쉽게 믿지 않을 것 같은데.”

발레리안이 이브와 황태자의 약혼 소식을 쉽게 믿지 않을 거란 말에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중 앞에서 약혼 발표를 했는데도?”

“응. 한번 고집을 세우면 황소처럼 우직하게 밀고 나가니까.”

이브는 그간의 일을 상기하며 노아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입을 다물던 노아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확실히 하고 싶으면…….”

“하고 싶으면?”

이브는 솔깃한 눈으로 노아의 답을 기다렸다. 그녀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받은 그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들 앞에서 확 덮쳐 버려.”

“……누굴?”

“당연히 자비에지.”

“미친.”

노아의 발상에 이브는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만인 앞에서 황태자를 덮치라고?’

정말 또라이 같은 생각이 따로 없었다.

바로 넌더리를 내며 노아의 의견을 개소리로 치부하려던 이브는 멈칫했다.

‘잠깐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어차피 기간제긴 하지만 황태자와 그녀는 약혼으로 얽힌 사이였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가벼운 스킨십 정도는 ‘익스큐즈’ 할 만한 상황이라는 거지.

그 광경을 발레리안이 본다면?

그들의 이별에 아주 좋은 촉매제가 될 것이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진심이야?”

노아는 진짜 그녀가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지 크게 당황했다.

“왜? 설마 이 상황에서 농담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을 거 아니야.”

“……그렇지.”

반쯤은 농담 식으로 던진 말이란 걸 노아는 삼켰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저렇게 일을 저지르고 나서 돌아올 후폭풍이 그에게 굴절되어 쏟아질 것 같은 느낌.

“나중에 저질러 놓고 나한테 뭐라 하기 없기다.”

“일이 이상해지면 당연히 뭐라 할 건데?”

“그거 대체 뭔 심보야.”

“못돼 처먹은 심보지.”

이브는 스트레칭을 쭉쭉하며 대꾸했다.

“이제 나 드레스 입어야 해. 꺼져.”

“나도 더 있을 생각 없거든?”

노아는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흘겨봤다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잠시 뒤, 하녀들이 노크를 하며 방에 들어왔다.

“치장 도와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이브가 드레스를 입는다는 얘기를 노아가 대신 전한 듯했다. 이브는 입술을 삐죽였다.

‘답지 않게 웬 친절이람.’

노아 에스텔라와 이브 에스텔라.

그들은 어릴 때 머리채를 뜯으며 서로 싸운 적도 부지기수라, 가문 내에선 앙숙 관계로 유명했다.

물론 압도적인 그녀의 힘에 지는 쪽은 늘 노아였지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건 멈추지 않았다.

‘뭐, 노아는 억울한 상황이긴 했지.’

그저 동생이 마법사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족들의 관심이 온통 동생에게 몰렸으니.

어린 노아가 그녀를 질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끝났습니다, 아가씨.”

이브는 거울 안의 제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황궁의 보석상과 재단사가 왔다 가서 그런지 성인식을 치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한 여인이 거울에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색과 같은 붉은 티아라와 하얀 보석이 빼곡하게 박힌 하얀 드레스.

조명이라도 받는다면 눈이 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 상황이 설레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일을 벌이러 가는 것이 실감이 났던 탓이다.

“이제 가야지……. 황궁으로.”

중얼거리던 이브가 저택을 나섰다. 탄신연에서 폭탄이나 다름없는 약혼 발표를 할 예정이라 별도 하녀를 대동하진 않았다.

이미 황궁에서 보낸 황금색 마차가 저택 앞에 정차되어 있었다.

그녀가 앞에 다가오자, 마부는 능숙한 태도로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엔 황태자, 자비에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앉았다.

자신의 머리 색과 같은 검은 연미복을 입은 그는 누구보다 수려하고 우아했다.

그녀를 본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네.”

자비에가 마차에 올라타는 걸 도와주려고 했지만, 이브는 거절했다.

괜히 그에게 제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나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마차를 올라타는데 다리가 갓 태어난 사슴처럼 후들후들 떨렸다.

드레스에 파묻혀 보이진 않았겠지만, 다리가 보였다면 꽤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었을 터였다.

황도로 향하는 마차 안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그와 같이 나란히 창밖만 내다보던 그녀는 황궁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뛰었다.

“오늘 리안은 연회에 오나요?”

“……아버지의 호위 기사 자격으로 배치했습니다.”

그 말은 발레리안이 이 연회에 참석한다는 뜻이었다.

‘자비에가 작심했구나.’

이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비에가 일부러 그들의 약혼을 보여 주기 위해 발레리안을 연회에 참석시켰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연회장에 도착하자, 그 앞엔 사람들의 인파로 북적였다. 그 모습을 보자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브는 황태자에게 말했다.

“도와주세요, 전하.”

“……기꺼이.”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마차에 내려오도록 도와주었다.

아까 혼자 마차에 올라타겠다고 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아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게 분명했다.

‘대단한 영애군.’

마차에 오르기 전에 떨던 모습과 달리 순식간에 감정을 갈무리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아…….”

자비에와 함께 마차에서 내린 순간, 이브는 발레리안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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