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19화 (19/100)

19화

다음 날, 이브는 황궁에서 도착한 편지에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황태자에게 연락 없이 방문했지만,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응접실에 앉아 느긋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참, 차 좋아하는 인간이야.’

대나무처럼 곧게 뻗은 정자세로 앉아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인간미라곤 하나 없었다.

“그 제안을 승낙하실 줄은 몰랐어요. 전하께서.”

그녀는 그의 앞에 털썩 앉았다.

“우리가 인사를 생략하는 사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자비에가 그녀의 예법을 지적하자, 이브는 눈도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꾸했다.

“그런 사이를 승낙하신 건 전하가 아니신지?”

위장 약혼 제안을 승낙한 걸 도리어 지적하자, 자비에는 찻잔을 든 채 이브를 빤히 바라보았다.

참 뻔뻔한 사람을 본다는 그 시선을, 이브는 가볍게 흘려보내곤 찻잔을 들었다.

“차향이 아주 좋네요.”

“……다행이군요.”

둘은 서로 마주 앉아 어색히 찻잔만 들었다.

티스푼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정적 속에 먼저 입을 연 쪽은 이브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루드비히 가문과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는데요.”

“루드비히 공작은 생각보다 공사 구분이 명확한 사람입니다.”

여자 문제만 얽히지 않는다면.

자비에는 그 말을 꾹 삼켰다.

15년 전, 황실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사건이 있었다.

그땐 루드비히 공작도 공작 부인이 살아 있을 때는 오로지 그녀를 위해 사는 것 같은 애처가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부인 멜린 루드비히가 악마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결국 살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 이후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루드비히 공작은 엘라로서 은퇴를 선언하고, 악마 토벌에서 한 발자국 빠졌다.

하지만 그 역할을 누군가는 분담해야 했고, 그 몫은 자연히 자식이었던 발레리안에게 돌아갔다.

자비에는 그 점을 상기하며 결심을 굳혔다.

‘그 선례를 반복할 순 없다.’

신탁은 100년 전과 같은 악마 소환 사건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에스텔라 영애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 발레리안이 돌연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하면 그대로 제국은 파멸이었다.

‘아마 내 의도를 루드비히 공작은 알고 있을 터.’

은퇴 후, 루드비히 공작이 손 놓고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엘라로서 소임을 내려놓은 공작은 가문의 세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다.

그 결과, 루드비히 가문은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대해졌다.

“공작께서도 이 약혼이 추후 루드비히 가문에도, 발레리안의 미래에도 이득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제 자식이 똑같은 일을 겪는 건 그도 바라지 않을 테니.”

멜린 루드비히의 사건을 모르는 이브는 좀처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보던 자비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언가 짙은 궁금증이 어린 시선에 이브는 작은 불길함을 느꼈다.

“저도 한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뭔가요?”

“왜 이렇게까지 발레리안과 파혼하길 원하는 겁니까?”

왜 그런 걸 갑자기 묻는 거지?

이브는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미 대답은 드리지 않았나요? 리안의 약혼녀로 사는 게 피곤해졌다고…….”

“그럼 내 약혼녀로 사는 건 피곤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이쪽도 만만치 않게 피곤해질 텐데.”

자비에는 그녀의 모순점을 곧바로 지적했다. 이브는 어색히 웃었다. 정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약혼 기한은 두 달 내로 끝낼 거니까요.”

“너무 짧습니다.”

자비에는 딱 잘라 거절했다.

“발레리안을 단념시키기 위해선 적어도 반년은 필요합니다.”

반년?

이브에게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그때쯤엔 수도를 떠나서 아예 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있어야만 했다.

“그건 절대로 불가능해요.”

“이유는?”

“전하께서 그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반년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인데, 거기서 이유까지 자비에가 알 필요는 없었다.

그 점을 꼬집자, 지비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방금 이브가 지은 것과 같은 미소였다.

“이제는 그럴 입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애의 약혼자가 될 몸이니까.”

“……굉장히 그거 파렴치하게 들리는 건 아시죠? 한때나마 친구의 약혼녀였던 사람인데.”

“피차일반입니다. 영애도 딱히 떳떳한 상황은 아니지요.”

“……어쨌든 반년은 안 돼요. 어차피 두 달이면 충분해요.”

“…….”

자비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보겠다는 듯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달 안에 리안의 마음을 돌릴 수 있어요.”

이제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유리가 대신전에 강림한다. 그리고 성녀의 호위 기사는 대대로 대신전의 최고 기사가 맡는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호위 기사를 맡는 건 당연한 수순.

원작대로 이유리의 전담 기사가 된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될 터였다.

“…….”

“말씀이 없으신데, 왜 그런 시선으로 보시는 거죠…….”

그녀의 말에도 여전히 그는 미동도 없었다.

뭔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눈치였다. 자비에는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곤 끝내 입을 열었다.

“낯설지 않은 광경입니다……. 저번에도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했었지요. 영애께선.”

이브는 내심 뜨끔해 입을 다물었다. 매사 황태자에게 이 일에 자신 있게 말했던 자신이 떠올랐던 탓이다.

“저도 몰랐어요, 리안이 가문 재산을 절반 떼어오고, 카빌라인지 뭔가 하는 영약을 가져왔을 줄은…….”

발레리안이 자신에게 해 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말하던 그녀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니 제가 쓰레기가 된 기분이네요, 아니……. 쓰레기가 맞나.”

이브는 침울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숨을 쉬던 그녀를 본 자비에는 그녀와 같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그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기색으로 입을 다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사정은 있습니다. 그리 자학하진 마십시오.”

“…….”

“그냥 영애는 남보다 더 냉혹한 마음을 가졌을 뿐입니다.”

이브는 황당한 시선으로 자비에를 바라보았다.

“위로인가요, 욕인가요?”

“당연히 위로입니다.”

전혀 위로 같지 않은 말이었다. 지금 황태자가 저에게 돌려 까기를 하고 있는 건가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이브는 그가 진심으로 한 말임을 깨달았다.

‘진심이라 더 기분 나쁜데…….’

면전에 대놓고 ‘넌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원작에서 이렇게 쓸데없는 솔직함을 드러내진 않았는데, 왜 자신 앞에서만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이제 정할 것은 약혼 발표일이군요. ……영애껜 사교계에서 사형선고일이나 다름없고.”

“실제로 사형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상관없어요.”

이브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능하면 빨리 발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우리 계약도 2달 남짓이니까.”

“그럼 내일로 하죠.”

“좋아요, 네……?”

그렇게 빨리요?

이브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빨리 발표해 달라고 한 건 이쪽이었으니 왜 이렇게 일정이 빠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의문을 읽은 자비에가 입을 열었다.

“내일이 폐하의 탄신 연회입니다. 무언가를 터트리거나 큰일을 치르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순간, 올해 초에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브, 이번 탄신연에 참석할 거야?’

‘그런 번잡스러운 건 딱 질색이야.’

그때, 이브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탄신연엔 늘 사람이 많았고, 그만큼…….

“화제성을 키우기에 딱 좋겠죠.”

하지만 그 당시엔 자신의 비밀을 모를 때였고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이브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식은 차로 목만 축였다.

“막상 일을 저지르려니 두렵습니까?”

“……아니요.”

사실 자비에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막상 일을 저지르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 일로 발레리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그에게서 경멸당할 걸 떠올리면 선득했다.

‘하지만 내 목숨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 가문 식솔의 목숨까지 달린 일이야.’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근데 자비에는 왜 도와주는 거지?’

사람 간의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자비에도 발레리안 못지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그녀의 제안을 승낙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건가?’

발레리안과 그녀를 떨어트려 놓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이유.

이브는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렇게까지 그들의 이별을 바라는 이유라면 퍽 거창한 이유가 숨겨져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어도 안 알려 주겠지.’

이브는 자비에를 알았다. 다른 사람에게 신사적으로 대하는 그는 마음의 벽이 두꺼운 사람이었다.

그 벽을 허물었던 유일한 사람은 바로 ‘이유리’였다.

명불허전의 원작 속 여자주인공이었다. 이제 두 달도 안 되어서 이 대신전에 강림할 그녀.

‘그때 가면 자비에도 이 약혼을 후회할 수도.’

그는 이유리를 지독하게 짝사랑한다. 그 진심이 워낙 절절했기에 자비에의 주식에 투자한 독자들도 많았다.

‘그 주식, 상장 폐지하는데…….’

그녀는 당연하게 발레리안의 주식에 투자했다. 애초에 햇살 캐릭터였던 그가 제 취향을 저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리안을 보자마자 바로 약혼하자고 무작정 떼를 썼지.’

지금 떠올리면 발레리안이 얼마나 난감했을지, 흑역사 같은 일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약혼하자고 난리 치는 광경이라.

여느 남자라면 딱 거절했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그 약혼을 받아 준 거냐고……!’

너 쉬운 남자 아니잖아!

그 일이 지금 와서 화근이 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자신의 약혼을 거절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진 오지 않았을 터였다.

분명히 원작 속에서도 이유리 전에 약혼녀는 없었다고 묘사되어있지 않았는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원작이 완전히 제멋대로였다.

“아, 그때가 영애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되겠군요.”

자비에의 녹색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얽혔다.

“……그곳에서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죽기야 하겠어요.”

“사교계에선 죽는 거나 다름 없-.”

“전하, 제가 말씀드렸죠. 전 실제로 죽는 게 두려운 거지, 누군가에게 삿대질을 당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고.”

“…….”

자비에는 아까부터 그녀의 말에 묘한 뜻이 담겼다고 생각했다.

마치…… 발레리안의 곁에 있으면 죽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나.

그러나 곧 그의 착각이라 치부했다. 발레리안의 곁에 있으면 죽는다니,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녀가 악마도 아니고.

‘악마는 남의 감정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

인간의 외관으로 위장해 섞여드는 악마들은 실상 본성만큼은 인간과 천지 차이였다.

그들은 제 욕망을 위해 누군가를 해치거나 상처 주는 것에 죄책감 따위 없었다.

‘어쩌면 그런 인간도 있긴 하겠지.’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그녀는 발레리안에게 줄 상처 하나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우아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