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래서, 상태가 어떤데요?”
지금 이브 앞에는 발레리안과 같이 출정을 나갔던 동료 헬리엇이 서 있었다.
대신전에 갈 때마다 보초를 섰던 성기사라 그녀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처음에 발레리안의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그의 모습에 이브는 온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낯이 창백해졌다.
‘발레리안이 설마…….’
악마에게 당한 건가.
차마 드는 불길한 생각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소식은 다행히도 발레리안의 죽음이 아니었다.
“단장님의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고, 마물의 독에 당해서 정신을 잃기도 하셨습니다.”
그의 상태는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이브는 무의식적으로 헬리엇에게 대신전으로 따라가겠다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내가 가면 끝이야.’
여태까지 그녀가 그를 밀어내면서 했던 말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 정도 부상이라면 리안은 너끈히 회복할 거야.’
이브는 차분한 음색으로 헬리엇에게 말했다.
“하루빨리 낫길 바란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잘 지내라는 말도요.”
“……어, 같이 안 가시는 겁니까?”
헬리엇은 당황한 시선으로 이브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의 그녀라면 아픈 발레리안을 두고, 이곳에 남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가 크게 아팠을 때, 단장님이 그 귀한 영약까지 구해다가 그녀에게 건네지 않았던가.
그런 감동적인 서사까지 두 사람의 사이에 얽힌 상태이거늘.
그녀의 대답은 너무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당황한 헬리엇이 주춤거리자, 이브가 말했다.
“네, 더 이상 갈 이유가 없거든요. 잘 가세요. 헬리엇. ……거기서 잘 지내시고요.”
그녀는 그대로 제 방문을 닫았다. 다소 허겁지겁 문을 닫은 이브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녀가 저 문을 닫아 의미하는 바는 다름과 같았다.
이제 우리 사이가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걸.
아마 저 헬리엇의 얼굴조차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 * *
“그래서…… 아무래도 이브 에스텔라 영애에게 다른 급한 일이 있던 게 분명합니다.”
방금 대신전에 도착한 헬리엇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발레리안에게 이브의 소식을 전했다.
헬리엇은 분명 에스텔라 영애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란 걸 어필했으나 결국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약혼자의 부상 소식을 알면서도 에스텔라 영애가 오지 않았다는 것.
제삼자인 헬리엇조차 둘 사이의 애정 전선에 큰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그럼 푹 쉬십시오, 단장님.”
발레리안의 차갑게 굳은 표정에 헬리엇은 제가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급히 치료실을 나갔다.
치료실에 홀로 남은 발레리안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브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그는 그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했다.
‘여기서 끝내자, 발레리안.’
이브의 음성이 미치도록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발레리안의 손에 있던 붕대가 순간적으로 녹아내렸다. 무의식적으로 엘이 발현된 것이다.
태양의 힘 엘은 본디 불의 힘이 아니라, 태양이 가진 열기를 구현하기 때문에 그 힘을 사용하면 웬만한 물건은 금방 녹아서 사라진다. 성검을 제외하곤.
‘이게 사람을 구하는 힘이라고.’
발레리안은 비소를 지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힘을 주변 사람들은 늘 칭송했다.
그래서 어릴 땐 그 힘이 마냥 좋은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공자님은 세상을 구할 힘을 타고나신 거예요.’
모든 이가 입을 모아 그리 말했다.
그렇게 믿었던 힘이 각성되자, 발레리안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화를 낼 때마다 몸에 닿는 물건이 태양열에 닿는 것처럼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마치 이건…… 사람을 구하기보단 파멸시키는 것에 어울리는 힘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주변이 일컫는 힘과 실제로 자신이 가진 힘의 간극에 방황하며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브를 만나고 나서 달라졌다.
그녀는 그에게 거창한 이유를 부여하며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온전히 그의 존재를 좋아했고, 그가 무얼 하든 격려해 줬다.
‘난 리안이 참 좋아. 심지어 리안이 가진 힘도 그래.’
‘리안처럼 참 따뜻한 힘이잖아.’
그녀는 그가 악마를 처단하고 올 때면 그 자신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겼다.
의무감으로 했던 일들이, 그녀로 인해 아주 조금씩 좋아하는 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그럴수록 그녀가 원하고 바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만인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살았다.
그렇게 그가 가진 모든 걸, 스스로 온전한 제 것이라 믿을 때쯤.
갑자기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약 한 달 전.
“…….”
발레리안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생각에 빠졌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치료실로 누군가 들어왔다.
순간 이브가 온 것인가, 발레리안의 시선이 빠르게 문 쪽으로 향했지만 푸른 눈동자는 실망감으로 식어 내렸다.
……이브가 아니었다.
“괜찮나?”
자비에, 그의 친우였다.
황궁에서 정무를 하던 자비에는 주변 숲에서 악마가 출몰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제국군의 원탁 참모실로 향했다.
이미 발레리안이 출정을 갔다는 소식에 금방 일단락이 될 거라 생각했건만, 이어서 그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처음 그 소식을 자비에는 믿지 않았다.
‘그 발레리안이 다쳤다고?’
어릴 때부터 타고난 힘과 짐승 같은 반사신경, 괴물 같은 완력과 민첩함으로 여느 상급 기사를 압도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발레리안이 고작 마물의 손에 다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자비에는 발레리안의 상태를 실제로 확인하고 그 소식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밤중에 델르노 숲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크게 다쳤군.”
“……이 정도는 일주일이면 금방 나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발레리안은 자비에를 흘긋 보곤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 부상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빤히 보던 자비에가 말했다.
“너답지 않게 어이없는 상처를 입었더군.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발레리안은 그를 잠시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외려 그 반응에 자비에는 힌트를 얻었다.
발레리안이 고민이 있는 얼굴로 입을 열지 않는다.
그 경우는 에스텔라 영애와 관련된 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비에는 속으로 깊어지는 시름을 삼켰다.
다만, 그는 어느 때보다 진중한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보며 말했다.
“발레리안, 주변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네 본분을 잊어서는 안 돼. 네 손엔 제국민의 안위가 달려있으니 말이다.”
태양의 힘 ‘엘’을 가진 자, 엘라.
백여 년 전에 악마들이 제국을 침공할 때, 그 엘라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제국은 악마의 손에 함락당해 지금 같은 평화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지옥 같았던 광경은 역사서에서도 적혀 있었다.
태자 책봉을 받은 5년 전. 유일한 황손인 자비에는 황태자만 들어갈 수 있는 서재에서 조금 다른 역사서를 보았다.
백 년 전, 악마 소환 사건.
황실 역사서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거기엔 온갖 잔인한 학살과 고문들이 명명백백히 묘사되어있었다.
처음 그 역사서를 읽었던 당시를 떠올린 자비에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루드비히 공작 가문 사람들을 온전히 제국의 기사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게 장차 제국 사람들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자의 책임이었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침묵하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자비에는 목이 타들어 갔다.
당장 그 발레리안을 흔들어 놓는 사람을 포기하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걸 입 밖으로 꺼낸다는 건 역효과만 낳을 뿐.
지금 이브 에스텔라 영애의 이별 사유에 황태자, 자비에의 개입이 있다는 걸 스스로 실토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갈비뼈는 이미 다친 지 시간이 지난 것 같았습니다.’
아까 자비에는 발레리안을 진료했던 치료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발레리안, 갈비뼈는 어쩌다가 다친 거지? 이 대답만 듣고 돌아가도록 하지.”
자비에의 관심이 귀찮았던 발레리안은 마지못해 사실을 말했다.
“……낙마해서.”
“네가 낙마를?”
“아니.”
발레리안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자비에는 설마, 싶은 얼굴로 말했다.
“에스텔라 영애?”
“……생각보다 빨리 맞추네. 자비에.”
발레리안의 시선이 비로소 자비에에게 향했다. 그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자비에는 말을 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에스텔라 영애가 낙마를 하지? 어디서 말이라도 탔다는 말로 들리는데.”
자비에는 에스텔라 영애를 문득 떠올렸다. 별로 승마를 즐기는 여자로 보이진 않았다.
“갑자기 델르노 숲이 빗물에 잠겨서 말을 타고 나왔거든.”
“……그랬었지. 갑자기 숲이 침수되었다니 이상한 일이군.”
자비에는 악마 출몰과 함께 참모실에서 받은 이상기후 소식을 떠올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자비에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에스텔라 영애가 말을 몰다가 낙마를 했다는 말이군. 그리고 그 영애를 네가 받다가 다친 건가?”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긍정에 자비에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꼴로 악마와 전투를 치렀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게 내 역할이니까.”
“발레리안.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 제국을 생각해.”
발레리안은 그 말에 자비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본 자비에는 제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완전히 에스텔라 영애에게 미친 놈이 따로 없었다.
“어쩌면, 이브가 날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거든. ……부질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비식 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브의 옆에서 떨어지지 말 걸 그랬지.”
“…….”
결국 이브를 불러내기 위해 일부러 다친 상태로 악마와 전투를 치르고, 또 다쳤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악마랑 싸우다 다친 것도 일부러 다쳤을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발레리안이 마물 따위에 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자비에는 조금 아연해진 시선으로 누운 발레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제 친우가 약혼녀에게 단단히 미친 것 같다고.
자비에는 영애가 제안한 위장 약혼을 다시 한번 심각하게 고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