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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17화 (17/100)

17화

그대로 꼼짝없이 땅에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이브는 곧 밀려올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품에 안긴 그녀는 경미한 타박상조차 입지 않았다.

‘누구지……?’

아까 그 마부인가?

하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는 시트러스 체향과 뜨거운 온기에 이 품의 주인을 깨달은 그녀의 심장이 쿵쿵, 엇박자로 뛰었다.

“발레리안…….”

……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의 너른 품에 안긴 이브는 바르작거렸지만, 발레리안이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녀를 안은 발레리안의 표정은 빗물에 눈앞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착각인가 생각했지만,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맡는 그녀는 그 착각이 현실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 향이 어디서 난 건지 추측하던 그녀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잠깐만, 그 높이에서 날 받았다면…….’

그녀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렇다면 분명 발레리안에게 다친 곳 하나쯤은 생겨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발레리안의 몸을 살피고 싶었지만,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어서 그의 몸을 살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이브.”

들리는 목소리는 괜찮은 듯했으나 그녀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피 냄새가 나는데……!”

말하다 보니 이브는 속상해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그러게, 거기서 낙마하는 사람을 받는 멍청이가 어딨어!”

“말의 다리에 상처가 좀 났어. 가시덩굴에 다친 모양이야.”

그의 말에도 안심하지 못한 이브는 버둥거리며 끝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그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비가 내려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일단 외관상 크게 다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발레리안의 말이 진짜인가?

“앗!”

그러던 중 이브는 진흙 구덩이에 발이 빠져 다시 뒤로 휘청거렸다.

발레리안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그가 말했다.

“비가 많이 내리니까 빨리 숲을 나가는 게 좋겠어.”

“……응.”

이브는 발레리안을 붙잡으며 천천히 숲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아까 한 사람 못 봤어?”

“누구? 이브 말고 다른 사람은 못 봤어.”

그럼 마부는 숲을 빠져나갔다는 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나간 마부가 어이가 없었지만, 이브는 수긍했다.

‘뭐, 원래 자기 목숨이 제일 귀한 법이니까.’

마부의 행동도 일면 이해가 갔다.

차라리 나란히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한 이브는 어색한 얼굴로 발레리안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몇 분 걷지도 않았을 때, 비가 뚝 그쳤다.

구름까지 걷혀 맑게 갠 하늘을 본 이브는 허탈했다. 날씨가 변덕이 죽 끓듯 해 한편으론 신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아까부터 흐르는 침묵을 깬 건 이브였다. 그녀의 물음에 발레리안이 느리게 대꾸했다.

“아침에 백작저를 갔는데 이브가 없어서.”

“그래서 날 쫓아왔다고?”

“응.”

이젠 그녀를 뒤쫓아왔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이브는 그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덕분에 다치지 않았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참으로 모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브가 도망간 줄 알았거든.”

발레리안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닌 모양이라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그의 모습에 이브는 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에게서 프러포즈를 받은 날, 진짜로 밤 중에 도망갈 생각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럼 남겨진 내 가족은 어떡해.’

아무리 그녀의 비밀을 숨겨 왔던 가족이라지만, 그들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무통보로 그녀 혼자 도망가 버리면 루드비히 가문에서 에스텔라 백작 가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루드비히 공작의 성격이라면 더 그렇겠지.’

그렇기에 이브는 가족들을 버리고 도망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황태자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한 것이다.

그와 약혼을 하게 된다면 루드비히 공작이 대놓고 에스텔라 가문을 건들진 못할 테니까.

“도망갈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브가 말했다. 적어도 도망자 신세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도망자가 된다는 건, 가족들도 도망자로 만드는 것과 진배없었으니까.

“이브, 황궁에 왜 간 거야?”

“……만날 사람이 있었어.”

이브는 자세한 설명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여기서 밝히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황태자는 그녀의 제안을 미친 소리로 치부한 상황이었으니, 이쪽은 영 희망이 없기도 했었고.

그녀의 모호한 대답에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직 빗물에 젖은 그의 손이 차가웠다.

“……이브,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 줘.”

“그런 거 아니야. 여기서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이건 진심이었다. 이브는 부디 제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발레리안과 눈을 마주했다.

“내가 잘못된 거야.”

이브는 말했다. 이 상황에서 솔직할 수 없는 자신이 조금 답답했다.

“원래 사람의 마음만큼 얄팍한 건 없으니까……. 내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지.”

그녀는 제가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를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차가운 게 아니라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뭐?”

이브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 마음이 변했다는데 상관이 없다는 말은 또 무어란 말인가?

발레리안이 어디서 머리라도 맞고 온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고 의심스러웠다.

“상관없다고, 이브 에스텔라.”

그 말을 하는 그의 입가엔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다. 하지만 이젠 그 미소가 마냥 해맑게 보이진 않았다.

“난 이브가 내 옆에 있는 게 중요해.”

이브는 당혹스러워 넋을 잃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갔다. 그간 그녀가 알아 왔던 그의 모습과 괴리감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녀가 예상했던 반응은 아래와 같았다.

-이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해?

-미안해, 발레리안.

-좋아. 이브. 네 마음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대충 이런 맥락을 예상했더랬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신의, 믿음……. 그걸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발레리안은 당연하게도 망설임 없이 뒤돌아설 거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깊게 실망하거나 내지 경멸하리라.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더 제가 변심했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한 상상 중엔 이런 반응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원작에서도 이런 애였나……?’

이제 원작이 의미가 있는 건가 혼란이 왔다.

그러나 아리엘 대주교가 전한 성녀의 강림 소식은 분명히 원작과 연관이 있었다.

‘근데 왜 이쪽은 왜 이래……!’

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발레리안의 모습은 혼란과 당황의 연속이었다.

그대로 이브는 발레리안의 품에 안긴 채 말을 타고 에스텔라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아니, 발레리안…… 네 모습은 또 뭐고!”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돌아온 이브와 그녀의 약혼자의 모습에 에스텔라 백작 부부는 기함했다.

“로즈! 어서 따뜻한 차 두 잔 가져오렴!”

그들을 본 백작 부인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에 하녀와 하인들은 분주한 몸짓으로 두툼한 담요와 차를 가져왔다.

응접실 안에 있는 널찍한 벽난로 앞에 이브와 발레리안은 나란히 앉아 담요를 덮었다.

“잠시 둘이 있고 싶어요, 어머니, 아버지.”

“……오래는 걸리지 않게 하렴.”

그들 사이에 맴도는 기묘한 분위기를 읽은 백작 부부는 자리를 떠났다.

“네.”

응접실에 단둘이 남고, 이브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발레리안은 제가 덮고 있던 담요를 이브에게 덮어 주었다.

이브는 당황하며 다시 담요를 가져가라 말했다.

“너 이러다가 감기 걸려.”

다시 담요를 가져가라고 눈짓을 보내도 그는 미동도 없었다.

“괜찮아.”

오히려 이브가 덮은 요를 더 여며 주며 그는 그녀의 손길을 거절했다.

“난 타고나길 몸이 따뜻해서.”

이브는 그의 말에 멈칫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태양의 힘을 타고난 엘라는 몸에 작은 태양을 품은 거랑 같다고 했지…….’

그래서 그는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높았다.

하지만 아까 빗속에서 그의 손은 차갑기만 했다. 그 점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브는 더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가 더 걱정하는 말을 덧댄다면 제가 마치 발레리안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발레리안이 먼저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브는 문틈 사이로 발견한 사람의 모습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복장은 분명 성기사들이 입는 제복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단장님, 또 차원의 틈으로 악마가 나왔다고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급히 찾아왔습니다.”

“어디서 말이지?”

“델르노 숲의 서쪽입니다.”

이브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에 휩싸였다.

‘아까 우리가 왔던 숲이잖아…….’

심지어 출몰 방향도 숲의 서쪽이었다.

황궁과 밀접한 곳에 차원의 틈이 생겼다는 소식에 발레리안도 심각히 표정을 굳혔다.

“당장 출발하지.”

그는 이브를 잠시 보고는 그대로 응접실을 나갔다.

이브는 왜인지 헛헛한 기분에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잠시 발레리안이 덮었던 담요라 그런지 그의 체향이 옅게나마 느껴졌다.

“역시 갈 줄 알았어.”

발레리안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마들을 소탕하러 가는 모습은 정말 원작과 다르지 않았다.

내내 원작과 다른 모습을 보였던 그가, 오랜만에 원작과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상하게도 입 안은 모래라도 씹은 듯 까끌까끌했다.

그날 밤이었다.

대신전으로부터 이브에게 한 소식이 전해졌다.

발레리안이 악마와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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