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 말을 하는 이브의 겉모습은 지극히 차분했지만, 속은 완전히 난리 난 상태였다.
‘저질러 버렸어!’
여기서 발레리안을 다독이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약점을 쥐고 있었으니까.
아마 그 편지를 이브가 작성했다는 걸 그가 입만 벙긋하면 이브는 바로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심을 본 이브는 그를 더는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싫어졌다고?”
조금은 충동적인 발언이었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인정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써먹을 수 있는 이별 사유는 이미 다 써먹어 버렸으니까.
‘이제 최후의 수단만 남은 거지.’
아마도 연인 간의 이별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할 이유는 딱 하나였다. 단순 변심.
쓰레기같이 보일 것 같아 그녀가 절대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이별의 종류였다. 하지만 이제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맞아. 네가 싫어진 거야. 내 마음이 변한 거지.”
“……거짓말하지 마.”
물컵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그는 열기 어린 숨을 뱉으며 물컵을 놓았다.
그 물컵은 그의 손바닥 자국 그대로 살짝 녹아 있었다. 태양의 힘이 그도 모르게 새어 나온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모습을 본 이브는 이 자리에서 그에게 죽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올곧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아. 이브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거.”
“그렇게 믿고 싶겠지.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발레리안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이브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쪽은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내 마음이 변했다는 걸 조만간 확실하게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줘.”
“이브.”
그 뒤로 발레리안은 한참이나 그녀의 말에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똑똑.
“누구세요?”
-루드비히 공작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발레리안은 루드비히 공작이 부른다는 소식에 저택을 떠났다.
이브는 창문으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긴 한숨을 뱉었다.
‘이제 완전히 끝인 건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가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발레리안의 마음이 확고하다면, 이 파혼을 쉬이 진행할 수 없을 터였다.
‘확실한 파혼 사유가 필요해.’
이브는 다시 고민했다. 그 고민은 다음 날 아침이어서야 끝이 났다.
* * *
“그래서 날 찾아왔단 말입니까?”
황태자가 어이없는 시선으로 제 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묘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아마 자비에와 이브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미치도록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다.’
라고.
“이브 에스텔라 영애. 이 이상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이젠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느낌이 왔던 적도 없군요. 매사 영애의 창의성에 감탄만 했으니.”
우아하게 돌려 까는 황태자의 모습에 이브는 여상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황태자에게 할 부탁은 거의 그에겐 폭탄 투하나 다름이 없었으니, 그가 무얼 말하든 그녀는 자비롭게 넘어갈 의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창의력을 발휘했습니까?”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던지는 자비에에게 이브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랑 약혼해 주세요, 전하.”
“……제정신입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꾸에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극히 제정신.”
“…….”
자비에는 잠시간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미친 자를 보는 듯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이브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이게 맨정신으로 한 말이라면 더 큰일입니다, 영애.”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 같아서 이브는 찝찝해졌다. 그녀는 약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시 계약으로 얽힌 약혼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서로 볼일만 다 보면 깨끗하게 이별하는.”
“……지금 나와 위장 약혼을 하자는 얘기입니까?”
이브의 말을 정확히 해석한 자비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곤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절대 안 됩니다. 영애의 제안은 개인 간의 약혼이 아니라 가문 간의 문제로 번질 여지가 다분합니다.”
기실 이브도 자비에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비에는 우정보다는 루드비히 가문과 황실의 주종 관계가 끊어지는 걸 더 우려하고 있었다.
“제가 파혼하는 걸 도와주시는 게 가문 간의 문제를 불식시키는 일이 될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사람들의 말대로 저와 발레리안은 분수에 맞지 않은 약혼이었어요.”
“하지만…….”
자비에는 쉬이 승낙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발레리안의 분노가 전하를 향할 것이 두려우신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예. 그렇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솔직하잖아요, 전하.
순간적으로 이브는 생각해 두었던 할 말도 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비에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발레리안이 절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자비에는 에스텔라 영애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발레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칫하면 맞아 죽겠군.’
그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자비에는 어릴 적부터 발레리안과 함께 문무를 배웠다.
그래서 알았다. 학문은 몰라도 무력에 관해선 발레리안에게 한참 뒤처진다는 사실을.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일로 발레리안이 자비에와 주먹다짐을 한다고?
전혀 상상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근데 어쩌면.’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에서 순결 반지를 거칠게 뺏어 갔던 모습을 떠올린 이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자비에가 눈치챘다.
“영애도 짐작 가는 부분이 있나 보군요.”
“그럼 발레리안이 전하를 건들지 않으면 괜찮다는 말씀인가요?”
“……뭔가 또 불길하군요. 그만 듣고 싶습니다.”
“제가 전하께 매달렸다고 소문을 내도록 할게요. 그럼 괜찮으신 거죠?”
“내가 언제 괜찮다고…… 그러면 에스텔라 영애의 평판은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자비에는 이브의 평판을 지적했다.
제 불치병을 위해 영약까지 구해 온 약혼자를 버린 여자.
그리곤 황태자에게 매달렸다는 타이틀은 웬만한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법한 악녀의 서사로 적합했다.
“……평판이요.”
제 목숨이 달린 일에서 평판이라. 정말 배부른 얘기였다.
황태자의 말로 새삼 떠올린 평판에 이브는 야트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가 굉장히 서늘하게 들린다고, 자비에는 생각했다.
“적어도 전하께는 중요하겠네요, 그 평판.”
“……무슨 뜻입니까?”
그에게 꽂힌 붉은 눈동자에 자비에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거렸다.
“친구의 연인과 약혼을 했다는 오명은 전하도 좀 리스크가 크겠죠.”
그녀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브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제국의 귀족이 얼마나 제 평판과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하물며 귀족도 그러한데 황족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더 하면 더 했을 것이다.
“도와주실 생각 없으면 이만 가 볼게요. 이제 여기 찾아올 일도 없을 테니까 따로 연락은 하지 말아 주시고요.”
그녀의 붉은 시선이 자비에에게서 미련 없이 떨어졌다. 그렇게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에스텔라 영애!”
그 모습을 황당하게 보던 자비에는 다시 소파에 털썩 앉고는 중얼거렸다.
“성격 한번 굉장히 급한 영애군…….”
혼자 남겨진 그는 이마를 짚은 채 고민했다.
이건 쥐를 잡자고 집을 통째로 태우는 격이었다.
더 고민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결론을 내린 자비에는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움직이던 펜대는 이내 멈추었다.
“하아…… 미치겠군.”
자비에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구겼다. 이미 그 약혼을 깨라고 한 입장에서 결정적일 때 발을 뺀다, 라.
누가 봐도 무책임한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신탁의 내용. 100년 전과 같은 역사가 언제라도 실현될 수 있었다.
신탁을 들은 이후, 자비에는 매일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느껴졌다. 그의 고민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한편, 마차에 올라탄 이브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상황이 단단히 꼬여 버렸잖아…….”
지나치게 맑은 하늘이 이젠 꼴도 보기 싫었다.
“그냥 비나 억수로 내려서 저 태양 좀 치웠으면 좋겠네.”
밝게 내리쬐는 햇빛을 볼 때마다 발레리안이 생각나서 더 착잡했다.
‘태양의 힘 엘,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엘라.’
발레리안이 가진 힘은 제국에서 유일했다.
그 힘은 날씨에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맑은 날일수록 그가 가진 태양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본디 마법사들은 물의 힘을 원천으로 했다.
이브가 가진 본질부터 발레리안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황태자가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아마 다른 약혼자를 물색해야 할 터였다.
한 달 안에 약혼을 졸속으로 처리해 주고, 그녀의 상황을 모르고서 이해해 줄 사람으로.
‘그런 사람을 어디서 구해!’
심지어 이 모든 절차를 밟기 위해선 일주일 내로 그 조건을 받아 줄 약혼자를 새로 찾아야만 했다.
심지어…….
‘루드비히 가문이랑 척을 질 각오도 필요하겠지.’
이리 생각하니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마저 루드비히 가문과 척을 지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마당에 어느 집안에서 그런 악조건을 포용해 준단 말인가.
환장할 노릇이다.
창밖만 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이브는 눈앞에 떨어진 물방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후드득.
분명히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억수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에스텔라 백작 저택을 가려면 큰 숲길 하나를 지나가야 했다.
그때, 마부에게 통하는 창문이 열리며 그가 말했다.
“아가씨, 잠시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마부는 그녀를 걱정하는 듯 자세히 살펴보았다. 요즘 사용인답지 않은 섬세한 모습이었다. 물론 에스텔라 가문의 사용인이라면 그녀를 왕처럼 모시긴 했지만.
“그래, 알겠어.”
이브는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며 마차에서 멍하게 있었다.
방금 비가 오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마침 비가 내리다니 타이밍 한번 끝내줬다.
잠시 내리는 소나기라 생각한 이브는 그 비가 곧 멈추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어 시간이 지난 후, 이브는 제 생각이 오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가 안 멈춰……?’
마차가 침수될 정도로 비가 오는 날씨는 드물었다. 제국의 봄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필 그 드문 날씨를 맞닥뜨린 이브는 마차 안에서 오도 가도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마부 창문이 열렸다.
“아가씨, 일단 말을 타고 숲길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건 미친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제 착각이라 치부한 이브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둘러 마차의 문을 열었다.
숲길이 온통 물바다였다.
‘아니,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그렇지, 숲길이 물바다가 되는 건 본 적도 없는데.’
이런 상황은 듣도 보도 못했다. 숲에 차오른 물은 이미 발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람은 크게 불지 않았다.
말고삐를 붙잡고 있던 마부는 그 고삐를 이브에게 건네며 말 안장을 고정했다.
“여기에 올라타세요!”
이브는 안장에 발을 걸고 올라탔다. 하지만 말도 갑자기 내리는 비에 놀랐는지 잔뜩 흥분했다.
그런 말을 모는 건 승마를 어느 정도 배운 상태여도 쉽지 않았다.
“히이잉!”
그때 덩굴에 발이 걸린 말이 깜짝 놀라 앞발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
그대로 말 안장에서 떨어진 이브가 아래로 추락하던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아래서 받아 바닥을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