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15화 (15/100)

15화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이브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대로 해가 뜨는 모습까지 본 이브의 얼굴은 밤샌 사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멀쩡했다.

심지어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전날 와인을 다섯 병 비운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이게 전부 그 영약 때문이야……!’

그 영약 덕에 이브는 와인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다.

차라리 술기운에 잠이라도 들었다면 생으로 고민하는 새벽을 보내진 않았을 텐데.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브는 화들짝 놀랐다.

‘벌써 발레리안이 온 건가?’

이브의 심장이 널뛰듯 뛰었다. 웬만한 일로 놀라지 않았는데, 어제 발레리안의 모습을 생각하면 충격이었다.

‘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그녀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편지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웬만한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을 법한 필체였을 텐데.

심지어 루드비히 공작도 아니고, 발레리안이 그걸 먼저 알아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지금 기분은 마치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 일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것 같았다.

‘여기다가 내 정체까지 알려진다면.’

그 사형수라는 비유가 현실이 될 것이 확실했다.

이브는 발레리안이 약혼을 깨 주지 않는 것이, 거짓말한 그녀를 추궁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발레리안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부류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거짓말하는 인간.’

즉,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더욱 긴장되었다.

그 편지 일로 책을 잡는다면 얼마든지 가문 차원에서 그녀를 문책할 수 있을 테니.

‘왜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냈다는 건, 발레리안이 그 편지에 관련해서 묵과한 채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어제 일로 루드비히 공작에게까지 그 일이 들어갈 수도 있을 터.

‘이런 식으로 약혼이 깨지면 곤란해.’

만약 그녀가 재판에까지 넘어가게 된다면, 이유리가 성녀로 오기까지 도망갈 시간이 없어진다.

그사이에 원작대로 이유리가 제도에서 데뷔탕트까지 치르게 된다면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삽시간에 상승한다.

“설마…… 아닐 거야.”

발레리안이…… 약혼녀를 재판에 넘기기야 하겠어?

하지만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발레리안이 절친한 동료였던 레이너드 경을 악마와 협력했다는 이유로 직접 처형했던 사건이었다.

그때, 한때나마 동료였던 죄인을 죽이는 발레리안의 손길엔 머뭇거림이란 없었다.

-라고, 발레리안의 부하 헬리엇이 우스갯소리로 말해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빌자, 이건 빌어야 산다.”

이브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가씨?

문 안에서 대답이 없는 게 이상했는지 재차 하녀 로즈가 문을 두들겼다. 이브가 대답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하녀가 아닌,

“……발레리안.”

그였다. 이브가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발레리안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 이브. 이렇게 무례하게 들어와서.”

그리곤 그는 그녀의 방 창가에 다가갔다. 창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그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무례를 끼쳤다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리낌 없는 그의 행동에 이브는 황당한 시선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발레리안, 이게 무슨 짓이야?”

마치 그는 그녀가 당장이라도 도망갈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물론 한밤중에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전에 그가 이 일에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리안이라고 평소처럼 불러.”

이상한 데 고집을 부리는 그의 모습에 이브는 좀처럼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발레리안이 말을 이었다.

“이브가 자꾸 나를 발레리안이라고 부르니까, 우리가 남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

그가 서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이 상황을 멀찍이서 걱정스레 바라보는 로즈에게 차를 가져오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로즈가 방을 나가자, 온전히 방에 둘만 남게 되었다.

이브는 테이블 앞에 앉았고,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살짝 걸려 있었다. 이브는 그 미소가 조금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브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녀의 개인적인 감상보다는 그가 하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 편지와 관련해선 공작님께 죄송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뜻이 백작님의 뜻이기도 했고, 난 아버지의 뜻을 대신해 편지에 적었을 뿐이야. 다른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백작님이 직접 적으셔도 되었을 텐데, 왜 네가 적은 거야?”

예상했던 반박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가문이 망해서 아버지가 편지를 적을 정신이 없으셨어. 그래서 내가 대신 한 거야.”

“그럴 정도로 정신이 없는 분이, 증여와 관련해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

이브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아버지가 손을 다쳤다고 할걸. 제가 생각해도 너무 조악한 변명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수녀원에 보내지 못하겠다는 의미가, 그녀를 재판으로 넘기겠다는 뜻인가.

이브는 별별 생각이 다 스쳤다.

“이브가 그랬던 이유를 말해 줘야 다음 단계로 절차를 밟을 수 있겠지.”

그 절차라는 것에 재판이 포함되진 않길 바랄 뿐이었다. 이브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유는 아까 말했던 게 전부야.”

“아니, 이브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발레리안이 단언했다. 이브는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냐며 반발하려다가 그의 단호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좋아. 말하고 싶지 않다면 더 묻지 않을게.”

이 대화에서 발레리안이 한발 물러나는 듯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벌어진 일에 이브의 눈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럼 나랑 결혼해, 이브.”

그가 품에서 꺼낸 작은 상자엔 블루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가 있었다.

이브는 그게 무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인어의 눈물.’

아주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공작성의 안채에 들어간 발레리안이 루드비히 공작 몰래 보여 주었던 가문의 보물.

대대로 루드비히 가문의 안주인만 착용할 수 있는 이 보물은 보석 감정사조차 감히 책정할 수 없는 희귀한 보석이라며 보석 감정을 포기했었다.

그때, 로즈가 티포트와 찻잔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자스민 차 가져왔습니다.”

“어…… 고마워.”

이브는 얼이 빠진 얼굴로 찻잔만 든 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조금 뒤늦게 로즈가 그녀 옆에 서 있다는 걸 깨달은 이브가 하녀에게 눈짓했다.

“이만 나가 봐.”

“네.”

방에서 로즈가 나간 뒤에도 이브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브는 한참 만에 입술을 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는데…… 네가 지금 나한테 청혼하고 있는 거야?”

“잘 파악하고 있네, 이브.”

발레리안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브는 그런 그를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다 이성을 되찾았다.

여기서 이 존귀한 목걸이가 그녀의 유품이 되지 않으려면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역시, 프러포즈를 하기엔 낭만이 부족한 것 같긴 해. 다른 장소를 찾아볼까?”

그가 해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이브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꾸만 뱅뱅 도는 듯한 이 대화가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이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뭐?”

발레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푸른 눈동자는 고요한 바다 같았지만, 작은 발화점만 생기면 활화산처럼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섣불리 이브는 입을 떼지 못했다. 발레리안은 느리게 옅은 한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브의 행동, 마치 나랑 떨어지려고 안달이 난 사람 같아.”

정곡을 찌른 말에 이브는 일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지했다.

발레리안이 이렇게까지 눈치가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자꾸만 그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행동할 때마다 당황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그가 그녀를 붙잡을 땐 더더욱.

“……맞아.”

이제 와서 그걸 부정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녀의 솔직한 대꾸에 발레리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대체 왜?”

“어제 말한 게 그 이유야.”

신의 자녀가 되고 싶다는 것, 그 이유를 들먹이자 발레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그가 말했다.

“게다가 난 지난 세월 동안 이브처럼 신을 불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그 정도로 내 신앙심이 밑바닥을 보였단 말인가.

조금 아연해 졌지만, 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죽다 살아났으니까…… 이만하면 충분한 계기 아니야?”

“정말 그게 죽다가 살아난 거라면 말이지.”

이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발레리안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어투에 그녀 또한 평정심이 깨졌다.

“무슨 뜻이야?”

“네가 그 카빌라 약초를 먹을 때 카니엘 의원의 표정을 봤거든. 그때 깨달았지. 네가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이쯤 되니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굉장한 눈썰미와 눈치를 가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간 그는 자신의 눈썰미를 감쪽같이 숨겨 왔다는 걸.

계속 발레리안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서 혼란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근데 왜…… 모른 척하고 있었어?”

“그걸 추궁해서 뭐 하겠어.”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한층 더 진해졌다.

“난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

이브는 그의 진심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묶여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

그녀는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뭐?”

“발레리안,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진짜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지?”

이젠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이브.”

불길함을 감지한 발레리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이브의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정 듣고 싶다면 말해 줄 수밖에 없겠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발레리안의 시선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또렷하게 마주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입술을 열었다.

“네가 싫어졌어, 발레리안. 싫증이 나 버렸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