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번엔 이브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도망치듯 이별을 고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그녀가 그에게 차릴 수 있는 마지막 예의였다.
그런데 발레리안의 입가에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브, 이런 농담 재미없어.”
그녀를 보는 푸른 눈동자가 진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이브는 그때 알지 못했다.
그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던 건지.
“농담 아니야, 발레리안.”
그저 그가 이 상황이 기막혀서 농담이라고 치부하는 거라 생각했다.
이브는 자신이 써 온 대본대로 충실히 입을 움직였다.
“내가 새로 받은 생명과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면서 살아가고 싶어.”
“그게 꼭 신의 자녀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음, 그건 맞지…….
생각보다 논리적으로 나오는 발레리안의 대답에 내심 당황한 이브는 다시 의연한 태도로 설득했다.
“하지만 난…… 신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광신도처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헤어질 판에 그에게 좋은 기억만 남겨 주고자 하는 것도 욕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브는 슬쩍 광기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물러나 주겠거니 싶었는데, 그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그녀를 보는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했다.
왜인지 모르게 불길함이 엄습했다. 평소와는 다른 농도의 불길함이었다.
일이 단단히 꼬인 것 같은 느낌.
‘……설마.’
아닐 거야. 이브는 불현듯 든 생각에 사고가 정지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그녀가 수녀가 되겠다는 통보에도 발레리안의 행동이 너무 차분했다.
근데 그게 설마…….
‘이미 알고 있던 거라면?’
그녀가 수녀원에 등록했다는 사실을, 발레리안이 이미 알고 있던 거라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발레리안이 그걸 알 방법이 없었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한 이브는 간신히 그 가정을 지워 내었다.
“발레리안도 신을 섬기는 기사니까 내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거라 생각해.”
“…….”
발레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브는 그의 침묵이 긍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이유리가 발레리안을 평가하길 ‘고결하면서 누구보다 독실한 성기사.’라고 했었으니까.
애초에 그런 신앙심과 사명감이 없더라면 목숨을 걸고 악마들을 처단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악마에 대적할 힘을 타고난 태양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을 갖고 있더라도 악마를 마주하며 싸우는 일은 보통 사명감으론 힘든 일이었다.
‘나와는 본질이 다른 사람이지.’
순수하게 마법사가 가지는 힘만 본다면 마법사는 그리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힘을 마법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에게 편의와 축복을 줄 수 있었고, 한편으론 재앙을 부를 수도 있었다.
100년 전, 마법사들은 소환진으로 악마가 득실거리는 지하의 문을 열어 인류를 멸망시킬 뻔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극구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게 마법사의 소행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러한 재앙을 사전에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법사를 죽이는 일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발레리안이, 그녀에 대한 걸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
단연코 그럴 리 없었다.
“다시 한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브.”
이윽고 발레리안의 입술이 열렸다.
“이게 정말 네 뜻이라고?”
그의 음성이 나직하게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브는 눈을 깜빡이며 천연스레 말했다.
“응, 이제라도 깨달아서 너무 다행이야. 신에게 영혼을 바친다는 게 이토록 숭고하고 보람찬 일인 줄 일찍 알았더라면…… 난 너와 약혼을 하지 않았을 거야.”
이브는 손을 모으며 미안하다는 듯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너에겐 미안하게 생각해.”
“이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차분했다. 이브는 왠지 주변 공기가 추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이브는 조심스레 시선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상황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발레리안의 표정이 이렇게 차가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얼어붙어 있었다.
쉬이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분위기 속에 이브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믿고 안 믿고는 너의 자유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이브, 이런 식이면 곤란해. 내가 모른 척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
그녀를 보는 그의 입가에 비틀린 비소가 스쳤다.
뭐……? 비틀린 비소?
이브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혹시 몰라 살짝 안쪽 볼을 씹었지만 더럽게 아팠다.
‘뭐야…… 너 원래 햇살 캐릭터였잖아!’
이브는 당혹스러웠다. 원작에서 이유리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도 이런 식으로 화를 내진 않았다.
“모른 척 넘어가 줬다고……?”
그리고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브는 묘하게 들리는 말의 뉘앙스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설마,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발레리안이 그녀의 정체를 알 리가 없었다. 딱히 알 방법도 없었고. 엘라는 사용된 마력을 감지할 수는 잆지만, 그 사람이 가진 마력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
‘성녀처럼 구분이 가능했다면.’
원작의 사건이 9할은 빠르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래, 가만히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더는 안 되겠어.”
그가 돌연 이브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에서 무언가를 빼 버렸다.
“도, 돌려줘!”
이브는 깜짝 놀랐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순결 반지를 빼 버린 것이다.
그게 없으면 수녀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러는 진짜 이유를 말해 줄 때까진 돌려줄 수 없어. 이브.”
발레리안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그로 인해 그가 무얼 알아냈는지 눈치챘다.
“……이미 내가 수녀원에 등록했었단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확실한 사실은, 그녀가 수녀원에 등록했다는 걸 그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어떤 방법으로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고 했다가,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걸 떠올렸다.
“설마…… 나한테 감시를 붙인 거야?”
이브는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부정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이브는 그 침묵을 부정으로 해석하고 싶었지만, 명확한 긍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대체 왜 그런 짓을……!”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발레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내가 왜 그랬을 것 같아? 이브.”
“……왜 그랬는데?”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를 본 이브는 처음으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처음에 나한테 가문이 망해서 파혼하자고 했었지.”
이브는 왜 그 얘기가 지금 순간에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단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아, 혹시 재산 증여에 관한 거라면 다시 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브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남을 속여서 가지게 된 공짜 돈은 줘도 찝찝해서 가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발레리안의 의중을 최대한 파악해 보려 해도 이것밖엔 짚이는 점이 없었다.
하지만 발레리안의 시선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 편지, 이브.”
그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와 속삭였다.
“……네가 쓴 거잖아.”
“……!”
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 편지가 어떤 편지인지 설명하진 않았지만, 당사자였던 그녀는 모를 수가 없었다.
증여 관련해서 화두로 꺼내 놓을 만한 편지는 하나밖에 없었기에.
바로 증여 문제로 에스텔라 백작을 대신해 그녀가 작성했던 편지였다.
“그게 무슨 말…… 아니.”
모른 척하려던 이브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발뺌을 하는 건 무의미했다. 이브는 마른침을 삼키고 발레리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걸 알고 있었어?”
“그래, 그걸 발견한 게 나거든.”
“…….”
이브는 머리가 둔기로 맞은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백작을 대신해 편지를 작성했다는 걸, 발레리안이 발견했다니.
절대 이 가능성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사실이 사실은 착각이었다고, 이 상황이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보다, 더 충격이 컸다.
그녀가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에 발레리안이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안심해, 네 필체라는 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여기서 고맙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이브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의 상태를 뭉근히 지켜보던 발레리안의 눈이 느리게 접혔다.
“그러니까 이 파혼, 난 절대 못 해 줘.”
방금 이브가 이별을 고하던 말투로, 발레리안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오늘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으니까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자. 조심히 돌아가, 이브.”
그녀에게 말하는 발레리안은 평소처럼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이브는 멍한 얼굴로 다시 백작저로 돌아가는 마차길에 올랐다.
그녀의 손엔 다시 돌려받은 순결 반지가 올려져 있었다.
발레리안과 같이 맞춘 붉은색의 순결 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