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날 밤.
이브의 뒤에 붙인 세작이 전한 소식에 발레리안은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그는 천천히 세작이 한 말을 되짚었다.
“안테아 수녀원?”
“예, 그곳에 있는 수녀원 사람을 붙잡고 무얼 물어봤다고 합니다.”
“무얼 물어봤다고 했지?”
“그것까진 듣지 못했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영애께 발각될 우려가 있어서…….”
발레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세작 칼렙은 그런 소공작을 조심히 살폈다.
소공작을 알게 된 건 10년 전.
루드비히 가문 후계자의 그림자를 대대로 맡던 검은 매의 출신으로서 칼렙은 소공작을 만나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는 심복에게조차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동요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소공작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칼렙은 조용히 무릎을 꿇은 채 다음에 내려질 명령을 기다렸다.
“난 급히 알아볼 일이 생겼어.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해.”
“예.”
생각을 마친 발레리안은 빠른 보폭으로 대주교실로 향했다.
외알 안경을 쓴 채 성경을 읽던 아리엘은 밤중에 방문한 발레리안을 보고 반색했다.
“발레리안! 마침 잘 왔구나.”
본론을 꺼내려고 했던 발레리안은 아리엘 대주교의 말에 멈칫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혹시 그게 이브와 관련된 일이냐는 물음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가 가라앉았다.
‘정말 이브에게 문제가 생긴 건가?’
그런 가정을 떠올리자 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그는 긴장한 눈빛으로 아리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주 좋은 소식이란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너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에서야 알려 주게 되었구나.”
발레리안은 나쁜 소식이 아니라는 말에 속으로 깊이 안도했다.
이브와 관련해 나쁜 소식을 들을 일은 없을 거란 얘기이기도 했으니.
“며칠 전에 신탁이 내려왔단다.”
“……신탁이, 내려왔단 말입니까?”
발레리안은 드물게 놀란 얼굴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100년 전. 제도 한가운데에 생성된 대형 마법진에서 지하 세계에 있던 악마들이 소환되어 인간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다.
그 기점으로 꾸준히 내려오던 신탁은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걸 보며 신이 인간을 버린 게 아니냐며 수군거렸고, 동시에 성국의 입지도 완전히 허물어졌다.
제국이 멸망할 뻔했던 황실이 경각심을 가지고 성국을 원조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성국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뼈만 남았던 교황청이 어떤 남자로 다시 일어섰다.
역대 엘라 중에 압도적인 힘을 가졌다고 칭송받던 디에고 루드비히.
그런데 그 아들인 발레리안 루드비히는 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온 제국이 열광했다.
난세 속 영웅의 탄생으로 교황청의 입지도 급부상을 했다.
여기서 성녀까지 강림한다면 성국은 이전의 광명을 되찾을 수 있었다.
“100년 만의 신탁이군요.”
발레리안은 그제야 아리엘 대주교가 왜 시종일관 들뜬 기색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그래, 드디어 우리의 독실함이 신께도 닿은 모양이야.”
“신탁의 내용은 뭐였습니까?”
“이제 곧 성녀가 내려올 거란다.”
“성녀라면 신이 점지한 인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발레리안은 성경과 역사서에서만 보던 성녀가 실존한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불과 100년 전에도 성녀는 있었지만, 악마 소환 사건으로 성녀는 다시 본래 세계로 돌아갔다.
“그래, 어쩌면 우리 인간한테 위기가 닥칠 거란 예언일 수도 있단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발레리안. 성녀님께서 오실 때까지 훈련을 게을리하면 안 된단다. 이제 이브의 병증도 완전히 회복되었잖니?”
“……알겠습니다.”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놀란 기색을 띠던 그는 아리엘과 같이 기뻐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리엘은 신탁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만으로 황홀한지 그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주교님.”
대주교실에서 나가는 발레리안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형식상의 온유한 미소였다.
그걸 모르는 아리엘은 흐뭇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머,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발레리안이 온 이유가 뭐였을까……?”
한편, 대주교실에서 나온 발레리안은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기실, 그는 아리엘에게 안테아 수녀원에 새로 신청된 수녀가 있는지 등록 명단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리엘 대주교는 교황과 달리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한 편이었다.
‘교황을 찾아갈까.’
하지만 지금 교황은 침실에서 여자나 끼며 뒹굴고 있을 텐데, 그 모습을 굳이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추잡스러운 상황을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확인해 보는 수밖에.’
푸른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 예리하고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덧 마구간으로 향했다.
몇 시간 뒤.
“그, 그게요…….”
안테아 수녀원의 평범한 수녀였던 플뢰르는 퍽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이곳에 방문한 한 기사님 때문이었다. 플뢰르는 손을 벌벌 떨며 소리쳤다.
“……아무리 중앙 대신전의 기사단장님이라도 섣불리 신입 수녀 명단을 드릴 수는 없어요!”
이 새벽 아침엔 늘 조용했던 안테아 수녀원이 이례적으로 시끌벅적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건만.
신도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유명 인사가 안테아 수녀원에 방문한 것이 그 이유였다.
심지어 그 유명 인사가 그녀를 찾고 있다고 한단다.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플뢰르는 제 앞에 있는 루드비히 경에 난감한 시선으로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지금 그는 신입 수녀 명단을 열람하길 요청하고 있었다.
플뢰르는 어제 이브 에스텔라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하며 간청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수녀님, 이 사실은 특히 발레리안 루드비히 경한테는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왜요? 가장 먼저 알려야 할 분은 그분이 아닌가요?’
‘제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어서요.’
요정을 닮은 소녀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물기 어린 루비색 눈동자가 간절히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해 주실 거죠……? 수녀님?’
‘그럼요, 꼭 비밀로 할게요. 자매님.’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플뢰르는 결심했다.
그 약속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겠노라고.
“죄송합니다. 기사님. 정식 수녀 명단은 전달 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직 신입 수녀의 명단은 보안상의 이유로 불가능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발레리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플뢰르는 살갗에 매서운 한기가 도는 느낌을 받았다.
소문으론 늘 햇볕같이 따스한 기사님이라고 자자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 앞에 보이는 루드비히 경의 모습은 그 햇살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한겨울의 서리 폭풍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녀를 보는 푸른 눈동자는 얼음보다 차갑고 칼날보다 첨예했다.
“그 신입 수녀 중에 첩자라도 있다면 수녀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첩자라뇨……!”
플뢰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어떤 첩자를 말하는 건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가령 제국에 해를 끼치는 부류겠지요.”
“그런……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은 우리 안테아엔 없어요!”
플뢰르의 방어적인 태도에 발레리안은 살짝 표정을 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명단을 보여 주십시오.”
그는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으……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심히 갈등하던 플뢰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발레리안의 표정은 지독히도 무표정해졌다.
방금의 수녀에게 보내던 일련의 눈빛과 말투는 그의 계산 하에 이루어진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인 거지, 이브.’
지금의 그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제 앞에 있던 수녀가 쉽게 명단을 주지 않은 건 이브의 요청이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는 매사 솔직하던 이브의 속을 알 수가 없어졌다.
잠시 뒤, 명단을 들고 나타난 플뢰르는 무척 난감한 얼굴로 그에게 내밀었다.
발레리안은 그 명단을 받아들고, 천천히 명단을 살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차분했다.
그리고 가장 밑에 적힌, 익숙한 이름을 발견해 내었다.
절대로 여기 보여서는 안 되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브 에스텔라.’
그 이름을 발견한 푸른 눈동자가 거친 풍랑을 만난 배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발레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명단 종이를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가슴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 * *
며칠 뒤, 소식을 들은 에스텔라 백작은 기함하며 이브를 책망했다.
“이브! 호랑이를 피하겠다고 호랑이굴로 들어가면 어쩌자는 것이냐!”
이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던 백작 부인과 노아는 한숨만 내쉬었다.
이미 이브가 마음을 굳힌 일에 가타부타 얘기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대신전에 갈 거예요. 당분간은 신앙심 깊은 신도인 척 굴어야 하니까.”
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가야 하고요.”
“이브……!”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는 아버지를 이리저리 피하며 마차에 오른 이브는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이제 오늘이면 정말 끝이네.’
플뢰르 수녀의 말에 의하면 정식 수녀가 되는 건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을 거라 했다.
그리고 지금이 딱 일주일째였다.
과거를 되짚자, 발레리안에겐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대신전에 도착한 이브는 어느새 마중 나와 있는 발레리안을 발견하고 살짝 놀랐다.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미리 나와 있던 거야?”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마차에 내려오는 걸 도와주며 말했다.
“요새 매일 이 시간에 오잖아.”
그리 말하며 웃는 발레리안은 여전히 맑고 해사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리안이라면 내 결정을 존중해 줄 거야.’
용기를 낸 이브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 나 다른 사람이 생겼어.”
차마 그의 눈을 볼 수 없었던 이브의 시선은 바닥과 허공 그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누구?”
발레리안에게서 비교적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브는 그가 생각보다 차분한 상태라는 걸 깨닫고 안심했다.
“하느님.”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오면서 만든 대본대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큰일을 겪으면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신에게 큰 혜택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깨달았어.”
실상은 달랐다.
그녀는 제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가장 먼저 신을 원망했다.
아직도 그 사실을 떠올리면 현실 감각 없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주어졌을 때, 깨달았어. 그 길이 내 길이었구나, 하고.”
“이브.”
그녀를 부르는 발레리안의 목소리에 이브는 그의 말을 끊었다. 이번엔 용기를 내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우리 끝내, 발레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