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성녀가 강림한다고.’
그렇다면 이유리가 강림한다는 얘기일 게 분명했다. 그건 원작이 실현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원작이 빗나가지 않았어.’
혹시나 가졌던 일말의 희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대로 이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
그걸 놀란 반응으로 생각한 아리엘은 좋은 기분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정말 놀랍지 않니? 역시 신은 우리의 믿음을 묵과하시는 분이 아니야. 이렇게 필요할 때는 응답해 준단다.”
“……언제 강림한다고 했었나요?”
“정확한 시일을 내려준 건 아니야. 곧 강림한다고 했으니 머지않은 날에 성녀가 대신전에 내려오겠지?”
“그렇겠네요…….”
원작을 토대로라면 두 달 뒤가 데드라인이었다. 이브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리엘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이브.”
“네?”
“서운하게 듣지 말고, 이제 중요한 시기니까 발레리안이 신경 쓰지 않게 잘 좀 처신해 줄 수 있겠니?”
“아…… 네.”
이브는 단박에 아리엘의 말뜻을 이해했다.
성녀를 가까이서 보필해야 할 발레리안에게 장애물이 되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그건 내 쪽에서도 사양이야.’
행여 제가 이유리와 발레리안의 장애물이 된다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인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성녀의 강림이 중요한 일이긴 한가 보네.’
이브는 사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조금 더 쉬지 않고?”
“빨리 리안을 대신전으로 돌려보내려면 제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정말이지, 이브는 어쩜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할까? 신께서도 이브를 예뻐해서 살려 주신 걸 거야.”
신이 날 예뻐한다면 성녀는 내려주지 않을 텐데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이브는 ‘그렇네요.’라고 적당히 대꾸하며 어색히 웃음만 흘렸다.
‘이젠 진짜로 발레리안이랑 떨어져야 해.’
이브는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뜻밖의 소식을 들은 것도 아닌데 막상 그 얘기를 들으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집안이 망했다고 하면 돈을 가져오고, 아프다고 하면 드래곤의 위협까지 무릅쓰고 불로초를 가져오는데 다른 방법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나도 결혼만 했다면 우리 이브처럼 예쁜 딸이 있을 텐데 말이야.”
아리엘이 흐뭇하게 웃으며 이브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젊어서부터 사제가 되었기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상기한 이브는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어!’
종교에 몸과 정신을 의탁하는 것.
바로 수녀원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교황청에서 주관한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순결을 지킨 미혼 여성만 가능했다.
이브는 슬쩍 제 손에 있는 순결 반지를 바라보았다.
‘수녀회는 20살까지 들어갈 수 있었지.’
그렇다면 자신은 딱 올해까지 들어가는 게 가능했다.
‘정말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심지어 신앙심이 높은 발레리안이라면 처음엔 당혹스러워해도 곧 이해해 줄 터였다.
이브는 돌파구가 있다는 사실에 살짝 들떴다.
‘진작에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강림한 이유리는 제국과 가까운 대신전에서만 머물렀다.
제국에서 가장 떨어진 수녀회에 들어가면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렇게 수녀회에서 지내다가, 때가 되면 남몰래 시골로 귀향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브가 치료실에서 나오자, 앞에 있던 발레리안이 그녀를 보며 기쁜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가 그 옆에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처럼 보였다.
들떴던 이브의 마음이 그를 보자 밀려오는 미안함에 가라앉았다.
“발레리안, 아리엘 대주교님한테 중요한 소식이 있으니까 조금 이따가 돌아와서 들어야 해.”
이브는 부러 성녀의 존재를 발레리안에게 알려 주기 위해 넌지시 언급했다.
‘그리고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그 성녀랑 영원히 행복하게 지내.’
이제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은 더 이상 짓지 말고.
이브는 이제 저에게 헌신하는 발레리안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녀의 속을 모르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제도에 머무를 생각이라 그렇게는 못 해.”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
“어차피 제도에 머무를 생각이었어.”
“거짓말하지 마.”
이브는 발레리안의 뻔한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기사 세례식을 그렇게 미뤘는데 제도에 머무른다고? 황실에서 그걸 허락해 줄 리 없어.”
“그건 이브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발레리안의 고집은 생각보다 강했다. 이브는 그에게 이렇게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에 나날이 놀라고 있었다.
“발레리안, 어차피 나 오늘 이후로 매일 이곳에 올 거야.”
“뭐?”
“이번 일로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준 신께 너무 감사해.”
불로초를 구해 준 건 발레리안이었지만, 이브는 적당히 신의 공으로 돌렸다.
이제부터라도 지하를 뚫고 더욱 아래로 치닫는 신앙심을 지상으로 끌고 올려야 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은 싱글벙글 웃었다.
“맞아, 이브가 살게 된 건 하늘의 뜻이지.”
그 고된 고생을 거쳐서 카빌라를 가져온 사람은 발레리안, 그 자신이었거늘.
그녀의 말에 서운한 내색조차 비추지 않았다. 외려 발레리안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하늘이 준 목숨이니까 값지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 앞으론 절대 그런 식으로 삶을…… 포기하지 마. 이브.”
점점 절절해지는 그의 눈빛에 이브는 순간 할 말을 잃을 뻔하였다.
순간 모든 걸 실토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위험해.’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자신이 모든 걸 말하면 그녀는 물론이거니와 가족들, 가문 식솔까지 모조리 죽는 목숨이었다.
이브는 이성을 되찾고 차분히 말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나 때문에 제도에 올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 발레리안은 대신전에 있어.”
“……혼자 돌아가도 괜찮겠어?”
발레리안은 불안한 시선으로 이브를 살폈다.
그녀는 당연히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나 때문에 기사 세례식도 미루었잖아. 이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어. 어서 돌아가.”
그녀의 대답에 발레리안의 눈빛이 고민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브는 절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좀 놔줘! 수녀원에 등록해야 한단 말이야!’
수녀원에 등록한다고 바로 수녀가 되라고 허가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 절차가 필요했고, 시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면 기사들을-.”
발레리안의 시선이 신전 안에 있는 성기사들에게 닿았다. 이브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에스텔라 가문에서 온 기사들도 있어. 발레리안도 우리 가문의 기사들 실력 알지? 충분해.”
이브는 일부러 눈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의 강경한 태도에 발레리안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따랐다.
‘휴. 정말 힘든 하루였어…….’
무사히 홀로 마차길에 오른 이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을 흘끗 보았다.
배웅을 나온 발레리안의 모습이 이젠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마차 안에 비치된 지팡이로 곧장 마부가 있는 문을 두들겼다.
“마차 돌려서 수녀원으로 가요.”
* * *
안테아 수녀원.
드넓은 평야에 있는 아름다운 봄꽃들이 둘러싸인 수녀원은 보기에도 퍽 한적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여기에 들어가면 확실히 사람들 눈엔 띄지 않겠어.’
자연과 가까운 이곳이 이브는 꽤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이곳에 이유리가 올 일이 없을 거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저 실례합니다만, 수녀 등록은 어디서 하나요?”
오는 길에 산 후드를 푹 눌러쓴 이브는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수녀복을 입은 모습을 보아선 수녀원 사람인 것 같았다.
“어머, 절 따라오세요, 자매님.”
수녀는 반갑게 웃으며 이브를 이끌었다.
‘통성명도 안 했는데 이렇게 친절하다니.’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 주는 수녀의 모습에 이브는 이곳의 분위기를 짐작했다.
‘적어도 텃세는 좀 덜 하겠네.’
꽤 작은 건물이었기에 등록하는 곳까지 가는 건 짧은 시간이 걸렸다.
“여기서 등록하시면 돼요, 아, 그리고…….”
수녀는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이브를 보았다.
“등록할 때는 신원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후드는 벗어 줘야 해요. 물론 사정을 말씀해 주신다면 감안해서 도와드릴 테니 부담은 느끼지 않아도 된답니다.”
수녀는 눈앞의 여인이 후드로 얼굴을 가린 걸 보며 안타까운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네, 감사합니다. 수녀님.”
“아닙니다, 자매님.”
이브는 그녀의 말에 후드를 벗었다.
어차피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면 이 이상 얼굴을 감추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수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은빛 머리에 신비로운 붉은빛 눈동자. 마치 달의 요정처럼 생긴 묘령의 여인은 아름답고 처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수녀는 이 여인을 알고 있었다.
“어머! 이브 에스텔라 영애? 영애께서 왜 여기에……?”
신자 중에 이브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태양의 힘을 가진 엘라, 발레리안 루드비히의 약혼녀였으니!
이브가 여기 오는 동안 얼굴을 가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혹시 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아요.”
수녀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일부러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제 병에 관해서요.”
“아…….”
수녀는 탄식을 터트렸다.
이브는 그 반응으로 그녀가 그에 관한 얘기를 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일을 겪고, 제가 그동안 무지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신이 언제든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 우리는 그 은혜에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이요.”
이브는 본격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수녀 등록을 도와줄 이 수녀를 회유하고 설득해야만 했다.
그리고 십몇 분이 흐르고, 이브의 계획은 완전히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이브 에스텔라 영애의 뜻깊은 결심에 탄복했다.
생명을 구해 준 신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의 사랑까지 포기하다니.
요즘 젊은 사람에겐 보기 드문 신실함이었다.
“그래서 그런데…… 제가 수녀로 등록했다는 건 비밀로 지켜 주셨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수녀님.”
“그럼요, 자매님.”
수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한 얼굴로 약속했다.
반드시 이브 에스텔라 영애가 이곳에 왔다는 걸 비밀로 지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