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이브는 오늘도 좋은 컨디션으로 일어났다.
며칠째 몸이 너무 가벼웠다.
여기서 제자리 뛰기를 하면, 구름 위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 불로초인가 뭔가가 효과가 좋긴 한 모양이네.”
거울을 보니 평소보다 피부도 좋았다. 그 모습을 보던 이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괜히 미안한데…….”
이 영약을 구해 준 사람이 생각났다. 발레리안이 제 거짓말 하나로 구해 온 귀한 불로초 카빌라.
불현듯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걱정도 함께 딸려 왔다.
‘이제 무슨 핑계를 대지.’
이제 의욕도 상실한 상태였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이브는 생각했다.
‘오늘 날씨가 조금 흐리네. 역시 날씨는 맑은 게 좋은데.’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참 좋았다. 그 모습을 보면 발레리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 조금씩 끼어 있던 먹구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녀는 제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무슨…….”
마치 먹구름이 도망치듯이 걷힌 광경에 자신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야!”
혹시 몰라 볼을 꼬집자, 아픈 건 제 뺨이었다. 이브는 심각한 얼굴로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설마, 우연이겠지.’
뭔가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브는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비가 왕창 쏟아졌으면.”
이번엔 하늘이 잠잠했다. 이브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 바람대로 날씨가 오락가락하면 내가 인간이겠어? 신이겠지.’
그녀는 잠시나마 제가 생각한 발상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제가 마법사라고 하니 혹시 싶었다. 그러다 곧 멈칫했다.
“맞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닌데.”
이제 성녀 이유리가 강림할 때까진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브의 정체가 까발려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미친.”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브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리안한테 뭐라고 하지? 다른 핑계를 대야 하는데.’
이별 의욕이고 나발이고, 일단 그녀 자신이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 소재가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좋은 아침이야, 이브.”
누구인지 목소리만 듣고 알아차린 이브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바, 발레리안?”
심장이 쿵 떨어졌다. 왜 그가 이 시간에 백작저에 있단 말인가!
“이브의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왔어.”
“나, 난 괜찮아. 근데 왜 아직까지 공작저에 돌아가지 않은 거야? 공작님께서 많이 걱정하실 텐데.”
자꾸만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오면 곤란했다. 이브는 그 속내를 굳이 밝히지 않고, 에둘러 공작 가문을 언급했다.
“아버지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 그보다 이브, 나랑 갈 데가 있어.”
간밤에 먼 공작저를 다녀왔다는 소식에 반응하기도 전에, 자신을 데려갈 곳이 있다는 말에 이브는 화들짝 놀랐다.
“……어디?”
반사적으로 되묻던 이브는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빠르게 거절했다.
“나,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어딜 가긴 힘들 것 같은데…….”
여기서 발레리안이랑 외출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이브의 말에 발레리안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러면 더더욱 나랑 같이 가 줘야겠어.”
“……왜, 왜?”
내 대답에 무슨 문제가 있던 건가?
이브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보며 되물었다.
발레리안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대신전으로 갈 거야. 함께 가서 성력으로 이브의 몸 상태도 확인하고, 확실하게 치료도 받자.”
“……나는 정말 괜찮은데.”
“아까 아프다고 말했잖아, 이브.”
“그랬었지……. 하지만 여기서 좀만 더 쉬면 괜찮-.”
“모든 건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이대로는 내가 너무 불안해.”
그녀를 보는 발레리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니 이브는 가지 않겠다는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완전 스스로가 말한 변명에 제 발이 걸린 꼴이었다. 제 혀라도 씹고 싶었다.
‘차라리 다른 일이 있다고 둘러댈걸!’
가뜩이나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아프다는 말을 내뱉다니. 이 상황에선 최악의 변명이었다.
‘여기서 그 불치병이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고.’
발레리안의 맑고 푸른 눈동자를 본 이브는 어쩔 수 없이 채비를 꾸렸다.
* * *
“이브! 몸은 괜찮은 거니?”
아리엘 대주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브에게 다가와 몸 상태를 살폈다.
다소 부산스러운 태도가 부담스러웠지만, 이브는 어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괜찮아요, 대주교님.”
“어머, 그래? 다행이구나.”
아리엘 대주교의 시선이 이브에게서 금방 떨어졌다. 크게 반색하며 걱정하던 태도와 대비되는 빠른 무관심이었다. 이브는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차라리 이런 무관심이 자신에겐 반가웠다.
“아 참, 발레리안. 돌아왔으면 대신전부터 왔었어야지! 지금 오면 어떡하니.”
아리엘 대주교는 평소보다 더 들뜬 기색이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발레리안의 물음에 아리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와는 다른 농도의 미소였다. 그녀를 10년 넘게 보아 온 이브도 대주교가 저리 웃는 건 처음 보았다.
‘엄청 기쁘고 흥분되는 일이 있으셨나 보네.’
그 일이 바로 성녀 강림과 관련되었다는 걸 모르는 이브는 뭔 일인지는 몰라도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가까스로 흥분을 잠재운 아리엘이 발레리안에게 말했다.
“여기서 말할 일은 아니고, 조금 이따가 보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브를 데려다줘야 해서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브, 혼자는 돌아가지 못하겠니?”
아리엘의 발언에 이브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기회다!
“저 혼자서 완전히 잘 돌아갈 수 있어요. 발레리안, 대주교님이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본데 그냥 여기에 남아 있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이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거였으면 애초에 불로초도 가져오지 않았을 거야.”
발레리안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묵살했다.
거절도 부드럽고 단호하게 할 수 있는 게 능력이라면 발레리안은 그 솜씨가 탁월했다. 이브는 당황했다.
‘발레리안이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옆에 있던 사제들이 다가왔다.
“저…… 루드비히 경.”
아까부터 발레리안과 이브에 관한 소문을 듣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가 언급한 불로초와 관련한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 사제들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정말 불로초를 가지러 드래곤의 숲까지 다녀왔나요?”
“네.”
“우와…….”
발레리안의 긍정에 사제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대화를 엿듣던 이브는 화들짝 놀랐다.
‘뭐? 드래곤의 숲?’
세상일에 크게 관심 없는 그녀도 드래곤의 숲에 관해선 알고 있었다.
그곳은 금단의 구역이었다.
드래곤이 아끼는 물건이라도 만졌다간 큰 화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빌라는 드래곤의 보물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져오신 건가요?”
사제들은 눈을 반짝이며 발레리안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관심에 발레리안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다니, 신도 탄복할 정성이에요.”
흥미로 가득했던 눈빛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는 게 보통의 각오로는 힘든 일일 터.
인류애로 마음이 따뜻해진 듯 사제들은 각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망할.’
물론 이브는 홀로 웃지 못했다.
이건 모두 그녀가 불치병이라고 철석처럼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심의 가책이 그녀의 마음을 크게 들쑤셨다.
“이브, 어디 불편해?”
발레리안이 그런 이브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자, 옆에 있던 사제들이 당황했다.
“아! 죄송합니다. 에스텔라 영애. 저희가 배려가 부족했네요. 이제 막 쾌차하신 분을 이렇게 세워 두었다니…….”
“괘, 괜찮아요. 콜록.”
이브는 기침을 내뱉었다.
차라리 아픈 행세를 해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 순수하고 착한 인간들을 속이고 있기엔 양심이 너무 찔려서 여기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이브의 치료는 내가 직접 담당하도록 하마. 이리 오렴.”
아리엘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브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잘 부탁합니다, 대주교님.”
“그럼, 누구의 약혼녀인데 아무렴.”
아리엘이 너스레를 떨며 발레리안을 안심시켰다. 대주교를 따라 치료실로 들어온 이브는 긴장을 풀었다.
‘내 마력을 알아보는 건 원작에서 이유리가 유일하다고 했었지.’
그러면 아마 대주교 아리엘은 자신의 마력을 못 알아볼 것이다.
“아리엘 대주교님, 전 괜찮아요. 사실 아까 사제분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아픈 척한 거예요.”
“그렇니? 하긴, 이브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좋아하지 않았지.”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행히 이브의 말에 수긍해 주었다.
“그런 네가 발레리안에게 먼저 약혼반지를 준 건 의외였단다.”
“그, 그러게요…….”
아리엘의 말투가 미묘했다. 예전과 다르게 조금 냉랭해진 반응이었다. 그에 약간 위화감을 느꼈으나 이브는 어색히 긍정했다.
이제 와서 태어나면서 한 일 중에 가장 후회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마법사의 운명을 타고날 줄 누가 알았나.
이브는 그 말은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자꾸만 이야기의 중심이 자신이 되는 게 불편했다.
아까 아리엘과 발레리안 사이에 있던 대화를 떠올린 이브가 입을 열었다.
“아까 처음 만날 때 좋은 일이 있으신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그거.”
아리엘의 입가에 아까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묘한 열기와 흥분이 섞인 기쁨의 미소.
‘정말 좋은 일이 있으셨나.’
이렇게 아리엘이 기분 좋은 내색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니 이브도 호기심이 들었다.
“무슨 일인데요? 갑자기 그러시니 저도 궁금해졌어요. 대주교님.”
“……호호, 특별히 이브니까 말해 주는 거란다.”
아리엘은 주위를 한차례 살피곤, 작은 웃음을 흘렸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봐선 밖에 유출되면 안 되는 얘기인 모양이었다.
“비밀 엄수로 할게요.”
“어쩜, 이브는 기특하게도 눈치도 빠르지.”
아리엘이 이브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은…….”
이어진 말에 이브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곧 성녀가 강림한다는 신탁이 내려졌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