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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9화 (9/100)

9화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루드비히 공작저에선 별다른 소식은 오지 않았고, 더 기다릴 인내심이 없던 이브는 짐을 들고 내려왔다.

“이제 가 보려고 해요.”

“이브,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난다는 거니? 우리는 어떡하고.”

“노아가 있잖아요.”

이브는 옆에 심드렁한 얼굴로 서 있는 노아를 가리켰다. 그러자 백작 부인은 무척 상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들이랑 딸은 달라.”

“다를 게 뭐가 있는데요, 달렸냐 안 달렸냐 차이지.”

이브의 노골적인 말에 노아는 벌컥 화를 냈다.

“너는 진짜 마지막까지……!”

“그러니까 그렇게 차별하지 마세요. 노아도 내 가족이니까.”

백작 부부는 이브를 아픈 새끼손가락인 것처럼 대해 왔다.

그게 못내 이브한테도 불편함을 느꼈는데, 이런 이유였다면 더욱 사양이었다.

“저 하나만 입 다물고 숨으면 끝인 일이에요. 이 이상 일 키우고 싶지 않아요.”

이브의 단호한 말투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이브는 한숨을 쉬며 짐을 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웬일로 그녀의 짐을 거들어 주려고 하는 노아에게 이브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됐어, 내가 너보다 더 힘세.”

노아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반박도 못 했다. 이브는 이 기막힌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땐 힘세다고 마냥 좋아했는데.’

심지어 그것도 마력이 너무 많아서 힘으로 나온 거란다.

이브는 생각보다 제 출생의 비밀에 관한 단서가 많았다는 사실에 조금 허탈해졌다.

생각보다 그녀의 몸은 튼튼했다. 시한부 연기를 하고 있단 사실이 무색할 만큼.

며칠을 굶었는데도 말짱한 몸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까 최종 보스겠지.’

원작 속에서 흑막으로 나온 건 반 황실 세력들과 성녀를 죽이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은 비밀 세력이었다.

아마도 그 비밀 세력이 높은 확률로 우리 가문 사람이었을 테니, 그 뒤엔 이브, 자신이 배후에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발레리안과 이유리였다.

그러면 이브가 그들을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였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원래 소설 속 흑막들이나 악역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단단하게 묶어 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죽는 것도 서러운데 사랑의 큐피트나 되라는 건 더 화딱지가 났다.

그때, 집사 해럴드가 다가왔다.

“잠시, 루드비히 가문에서 전령이 찾아왔습니다.”

“전령이?”

이브를 비롯한 백작 부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문 간의 전령은 비밀리에 전할 말이 있을 때만 움직였다.

그러니 대부분은 중대사에 관련된 일이었다.

“어서 들이게.”

백작의 말에 해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드비히 가문의 전령을 데리고 왔다.

그렇게 전령이 들어왔고, 백작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루드비히 소공작님이 사라지셨습니다.”

“뭐라고요?”

이브는 전령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전령이 찾아와 대뜸 전한 소식이 발레리안의 실종 소식이라니.

“혹시 대신전에 있는 거 아니에요?”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루드비히 공작 가문에서 발레리안이 대신전에 있는 걸 모르고 행방을 묻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하물며 공작 가문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 건, 물을 마시는 행위만큼이나 일상적이고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혹시 에스텔라 영애께서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정확히 어디쯤에서 행적이 사라진 건지, 말씀도 해 주셨나요?”

“황궁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본 건 우리 집이었는데…….”

그녀는 일이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 *

“일이 참 복잡하게 되었군요.”

황태자 자비에는 반듯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브도 그의 말에 동의했기에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이제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요. 전 오늘 오후에 떠날 생각이에요.”

그를 기다리는 동안, 세간에 이브 에스텔라의 시한부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

며칠째, 잡히지 않은 그의 행방에 이브는 동동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저가 떠나야 할 적기라는 걸 알았다.

‘어차피 주인공이니까, 괜찮을 거야.’

발레리안은 악마 군수의 목까지 자른 실력 있는 기사였다. 그런 그가 며칠 정도 실종된다고 해도,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 터.

‘그걸 알고 루드비히 공작도 적극적으로 수색을 하지 않는 거겠지.’

아마 공작은 지금쯤이면 발레리안의 행방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 내 알 바도 아니야.’

물론 발레리안이 완전히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이 시간까지 제도에 남아 있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더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

완전히 마음을 접은 듯한 그녀의 반응에 자비에는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한때나마 약혼자였던 남자인데 걱정되지 않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제가 걱정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사실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떠나기 전에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자비에는 말해 보라는 듯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황실 주치의를 몇 달간만 저에게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공증이 가능한 분으로.”

“어렵지 않은 부탁이긴 합니다만,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공식적인 사망 선고가 필요해서요.”

찻잔을 들고 있던 자비에는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는 당황한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정말로, 죽은 사람으로 살겠단 말입니까?”

결국에 그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식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하군요. 발레리안과 파혼할 구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런 방식이 꼭 아니더라도…….”

언젠간 이런 질문을 황태자에게서 받을 줄 알았다. 이브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쯤에서 확실하게 내 편으로 만드는 게 낫겠지.’

판단을 내린 이브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녀는 제가 생각해 두었던 대본을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여기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전하.”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이제는 모든 게 피곤해졌어요. 발레리안의 약혼녀로 산다는 것이.”

이브는 지친 척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발레리안은 세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이라는 건 인정하실 거예요.”

기실 황태자도 외모며, 문무며 빠지는 구석은 없었지만, 황태자비는 그야말로 정치적 알력이 불가피한 자리였다.

심지어 황태자는 삼대독자. 그 옆자리를 탐내는 건 불나방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루드비히 가문은 달랐다.

황실과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지만, 언제든 중앙 정치권에서 발 빼도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다.

자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옆자리에 있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죠. 다른 영애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기도 하고, 때론 다른 분들의 외압을 받기도 하고요.”

그녀는 슬쩍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외압이 누굴 지칭하는 건지 뻔히 알았던 그는 할 말이 없는 얼굴로 입을 축였다.

“미안합니다, 영애.”

“사과를 바라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 물어보신 질문에 답해 드리는 거예요. 이걸로 대답이 충분히 되었으면 좋겠어요.”

“……충분히 되었습니다.”

기실 충분한 대답은 되지 않았다. 인기 있는 남자의 곁에서 느끼는 피로감으로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니, 자비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태자 전하께선 이해가 되지 않으실지도 몰라요. 일평생 관심 속에서 살아온 분이고, 그 시선에 익숙해진 분일 테니까요.”

이브는 그의 낌새를 눈치채고 요령껏 말을 이었다. 황태자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럴 수 있겠군요.”

“네, 전 이제 완전히 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요.”

성녀 이유리가 강림하기 전까지, 빠르게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누군가 노크했다.

-전하, 방문자가 찾아왔습니다.

“누가 기별도 없이 무례하게…….”

자비에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시종을 들였다. 들어온 시종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굴리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자비에는 시종에게 조용히 물었다.

“누가 왔다는 거지?”

“그것이…….”

시종이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태평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이브는 무심결에 그 시선을 좇았다가 찻물을 뿜을 뻔했다.

‘발레리안!’

왜 그가 여기 있단 말인가. 일주일 넘게 실종되어 있던 그가 갑자기!

‘다행히 다친 건 아닌 것 같은데.’

몰골은 멀쩡했다. 잠을 못 잤는지 살짝 눈 밑이 거무스름한 것을 제외한다면.

며칠간 실종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멀끔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발레리안, 어디 있다가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거지?”

자비에가 그녀가 궁금해하던 마음을 그대로 읊었다. 그 또한 무척이나 당황한 낯이었다.

“백작저에 들렀는데 여기 있다고 해서.”

발레리안은 대답 없이 이브에게 걸어왔다. 이윽고, 그는 제 품에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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